# 63
63.
그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우조환은 40세가 되어갈 때까지 변변치 않은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힘든 막노동을 해가며 하루하루 연명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진주나 보석은 없었지만 진주같이 맑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으며 보석같이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
일은 무척이나 힘들어 날마다 허리를 움켜쥐어야 했지만 저녁이 되면 아내와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힘든 일도 참아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간혹 일하는 중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집에 돌아와 아들의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힘이 솟아나곤 했다.
어서 돈을 벌어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우조환에게 아내는 몸이 건강한 것이 최고이며 지금도 불만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그에겐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또한 15살 먹은 아들은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자랑스러워했고 모난 구석 없이 잘 자라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마음의 위안을 삼고 고된 나날을 보내던 우조환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5년 전 어느 날이었다. 이날은 급여를 받은 날인지라 크게 마음먹고 고기집에 들러 삼 인분의 고기를 들고 발걸음도 신나게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오늘 같은 날은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냐며 붙들었지만 과감히 뿌리친 터였다.
그로선 동료들과 술을 마심보다 가족들과 함께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더한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거의 집에 이르게 되었을 때였다. 그의 눈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가 보였는데 다리를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아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조환은 일터에서 힘들게 일하고 꽤나 몸이 쑤셨지만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이구, 할머니.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가는 길이 같으니 제가 가는 동안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고맙수다. 이제껏 많은 사람이 지나갔지만 모두들 자기 갈 길만 바삐 갑디다. 정말 박한 세상이지요. 댁처럼 사람들이 다 자비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조환은 짐 하나를 들어주고 지나친 과찬을 듣자 왠지 기분이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다들 바쁜 일이 있었겠지요. 저야 뭐, 같은 길이니 크게 대단할 것까진 없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디유.”
할머니의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걷던 우조환은 거의 집 가까이에 이르게 되자 걱정이 앞섰다.
‘사방이 캄캄하고 이대로 계속 가면 외곽 지역이라 험한 길만 나올 텐데 할머니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할머니 혼자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닐 성싶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제가 사는 곳이랍니다. 비록 누추하지만 저녁이 되었으니 함께 식사도 하시고 오늘 밤은 저희 집에서 묵도록 하시지요.”
그 말에 할머니는 몇 번을 사양하며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보내기엔 우조환의 마음이 편치 않는 걸 어떡하겠는가.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서 할머니는 우조환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난 옷도 지저분해서 괜히 집 안만 어지럽힐 것 같구먼. 또 댁에 있는 분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할머니는 말끝을 흐리는 것이 영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런 것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내나 아들도 모두 반가워할 테니까요.”
“그러면 좋겠수다만.”
“하하, 염려 마시라니까요.”
할머니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조환의 아내 모가영은 낯선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던 것이다.
마음을 졸이던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조환과 모가영, 그리고 그들의 아들 우경을 바라보았다. 그건 주름이 가득한 미소였지만 주위를 밝게 비추는 등불처럼 환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후 단칸방에서 평소보다 이불 하나를 더 펴 할머니를 주무시게 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내 모가영이 이른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모가영은 어슴푸레한 햇살을 통해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이 드신 분들은 역시 아침잠이 없으시구나.’
할머니가 어제 저녁 가지고 왔던 짐이 그대로 있었던지라 잠깐 나간 것이라 생각하고 곧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조환이 일터로 나갈 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고개가 갸웃거리긴 했지만 짐 때문에라도 멀리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되어서도 다음 날이 되고 또 다음 날이 되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우조환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겨 할머니를 찾을 단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혹시나 짐 속에 할머니가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적혀 있지 않을까 싶어 짐을 풀어보았다.
‘쪽지라도 나와야 할 텐데…….”
보자기를 풀고 사각형의 큰 상자가 열자 팔찌 하나와 작은 서신이 보였다. 그 팔찌는 언뜻 보기에 크게 값어치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할머니의 행색이 워낙 초라한지라 설마 하니 대단한 보물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팔찌 아래에 놓여 있는 서신을 읽어본 우조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신의 내용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가족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소중하게 여긴 보물을 받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나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 터, 진실로 이 보물을 소유할 만한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혹여 어느 집에 머물다가 내가 떠나고 짐만 남겨놓았다면 그 집이야말로 내가 보물을 건넬 만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니 부디 적절히 사용하여 후세에 덕을 세우길 바라는 바이외다.’
뜻하지 않는 글인지라 두 부부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보물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조환이나 모가영은 여전히 이 팔찌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겼다.
보물이라는 말에는 진짜 보물이어서 보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있지만 각자에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그것이 비록 하잘것없게 보일지라도)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믿고 모시는 신(神)이 보물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부모님이 남기신 유언이 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조환에게 있어서 보물이 아내와 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우조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
표영은 아주 특이한 이야기인지라 잔뜩 호기심이 일어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우조환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 뒤 몇 달 동안 그 팔찌에 대해 잊고 있었다네. 그러던 중 우연히 집 안을 정리하다가 할머니가 남겨놓았던 상자를 다시 보게 되었고 팔찌를 꺼내 보았지. 근데 문득 호기심이 일더란 말일세. 과연 이것이 값어치가 나가는 것일까 하고 말이야. 난 바로 팔찌를 들고 마을에서 가장 큰 보물상에 팔찌를 보여주었어. 허허허, 그랬더니 갑자기 보물상 주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리지 뭔가. 난 그 순간 이 팔찌가 사실은 대단한 보물이로구나 하고 직감했지. 난 보물상 주인에게 이 팔찌의 1할을 줄 테니 처분해 달라고 했다네. 사실 나로선 금화 대여섯 냥 정도만 나가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네. 보물상 주인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 좋아하더군. 사실 팔찌의 값어치는 하나의 성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지 뭔가. 만약 그 당시 보물상 주인의 마음이 조금만 악했더라면 난 아무것도 모르는지라 은전 몇 냥만으로도 좋아했을 것이네.”
왠지 우조환의 말에는 보물상 주인의 왜 그리도 마음이 선했는지 오히려 안타깝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표영은 행복한 가정이니만큼 돈이 생겼으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건만 왜 이리도 한탄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뒤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난 바로 큰 부자가 되었지.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어. 돈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더란 말이야. 돈이 많이 생기다 보니까 헛된 욕심이 동했지.”
그날로부터 우조환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생긴 큰돈에 의아해 할까 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그곳에서 큰 장원을 사들였다.
다 쓰러져 가는 움막집, 그것도 단칸방 신세에서 이젠 수십 개의 방이 딸리고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병풍처럼 두른 거대한 집을 얻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얼마나 많이 자신의 살을 꼬집었는지 몰랐다. 우조환은 더 이상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쓰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던 것이다. 정녕 그 액수는 500년 동안 있는 힘껏 쓴다 해도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돈이었다.
그렇게 살기를 6개월 정도 지나자 점점 우조환은 졸부의 근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고급 술을 마셔대기를 물마시듯 했고 근사한 주루에 나가 아름다운 여자들에 눈이 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 맛을 들이자 아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박에 술에 여자에 취해 날이며 날마다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그래도 돈은 마를 줄을 몰랐다. 그가 최고급 술과 음식과 옷을 입고 다니며 즐길수록 반대로 그의 마음은 썩어 갔다.
또한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강호의 큰 힘을 가진 무사들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했고 권력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우조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조환이 밖으로만 나돌자 남편밖에 모르고 지내던 아내 모가영도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귀금속과 사치스런 고급 옷들로 채우느라 바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점차 외출도 잦아지며 집안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흠… 잘은 모르지만 짐작하기엔 따로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아내에 대해 말하던 우조환의 얼굴엔 착잡함이 가득했다.
표영은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심각하게 들어줄 뿐이었다.
“집사람은 2년 전부터는 도박을 하기 시작하더군.”
모가영은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상류층 여인들과 어울리며 도박에 맛을 들였다. 우조환은 우조환대로, 또 안살림을 책임지는 모가영은 모가영대로 밖으로 나도니 한참 민감해질 시기의 아들 우경이 바르게 자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경은 처음에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주루를 드나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젠 습관으로 굳어져 수준이 거의 아버지 우조환의 경지(?)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예전에 소박한 꿈을 가진 소년의 마음은 어느덧 황량한 바람이 부는 광야로 돌변해 버린 것이다. 20세의 나이에 성격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 알기를 벌레처럼 여겼고 얼굴엔 교만함이 가득했다.
우조환이 다시 한탄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우리 집안은 콩가루가 돼버리고 만 거야.”
우조환이 술에 만취해 죽고 싶다고 소리 질렀던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아마도 그 할머니는 악귀가 변신해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재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훨씬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날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거냐고.”
이야기를 다 들은 표영의 얼굴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할머니가 악귀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복을 건네주려 했겠지. 할머니가 남겼다는 서신의 내용을 보자면 보물을 올바르게 사용할 사람, 즉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을 찾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할머니는 이 사람의 성실함과 가정을 아끼는 마음을 보고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 사람은 큰돈을 사용하는 법을 몰랐구나.’
우조환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표영은 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거지라는 게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문득 사부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제자야. 사람은 살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일생을 살기도 하고, 명예를 좇아 달려가기도 하고, 권력을 향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도 한단다. 그렇게 되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결국엔 돈과 명예와 권력의 종이 되고 말지.
하지만 인간이 규율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채 더불어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 자라면 사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자는 그것을 지키려 하고 또한 그것에 만족함이 없으니 늘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진정 하늘을 아비 삼고 땅을 어미 삼아 살아가는 삶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으며 무슨 부족한 것이 있겠느냐.
소유하려 하지 말고 지키려 하지 말고 마음껏 너의 나래를 펼쳐라.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떠한 장소나 시간에도 구애됨이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생이며 걸인이란다.]
‘그래, 이 사람은 그만 돈의 종이 되고 말았구나. 어떻게든 도와주어야겠어.’
표영은 말을 들은 이상 그대로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표영은 천음조화를 풀고 쾌활하게 말했다. 천음조화는 이제껏 우조환의 심령을 파고들며 제압하고 있는 터였다.
“헤헤헤, 대인! 그렇게 돈이 많으시면 저 같은 거지에게 좀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헤헤… 구걸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말이죠. 조금만이라도…….”
천음조화의 억제에서 풀리자 우조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던 생각이 닫히고 눈앞에 현실로 돌아섰다.
시간도 적절히 지난 터라 술에서 갑자기 깨어나 그 후유증으로 울적해져 있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가신 상태였다. 그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표영을 노려봤다.
“떼끼! 이런 거지같은 놈을 봤나. 어디서 감히 돈을 뜯으려 하느냐! 노력해서 돈 벌 생각은 않고 거저 얻어먹는 것이 버릇이 되었구나. 이놈아, 난 친척들에게도 돈을 주지 않아. 이런 썩을 놈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