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2장 (63/199)

 # 62

62.

제10장 부자의 한탄

표영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남방 해안에 위치한 섬. 표영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바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단지 남쪽으로 이동하면 바닷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지금 가고자 하는 섬이 특별히 어떤 섬인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과연 마땅한 섬이 있을지도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표영은 강호인들이 모르는(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개방인들이 모르는)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개방이 비록 진정한 거지의 길은 걷지 않는다 해서 뛰어난 정보 수집력이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표영이 찾게 될 섬은 이제 진개방의 근거지가 될 것이며 새로운 개방의 제자들을 거지답게 훈련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는 표영의 마음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시급히 힘을 키워야 한다.’

강호에서 개방의 눈을 피해 제대로 된 거지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무인도(無人島)였다. 장소가 있다고 하여 조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표영이 찾고자 하는 장소는 개방의 본부와 같은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진정 개방인의 거처는 천하이며 중원의 모든 길바닥이라는 데는 면함이 없었다. 오직 그곳은 훈련이라는 목적만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

“음하하하! 그 섬은 새로운 강호 역사를 만들어내는 곳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날처럼 거지가 거지답지 않게 변해 버린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지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표영은 방향을 가늠하고 일직선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산이 있으면 산을 넘었고 마을이 있으면 마을을 지났다. 산을 지날 땐 사냥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마을을 지날 때는 구걸을 하며 해결했다.

새로운 각오를 되뇌이며 개방방주를 선언한 표영이었지만 거지라는 데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주는 더욱더 거지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거지 행각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이동 중에 구걸은 이제껏 해온 것인데다 전문 분야인지라 어려움이 없었다. 혹여 영 여의치 않을 때도 있었지만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게 개밥인지라 먹을 것은 풍족하기만 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을 즈음에 표영은 호남성 중부에 위치한 각회(覺悔)라는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광동성에 이를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표영은 그곳에서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지라 허기를 면하고자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걸했다.

거렁뱅이 춤을 추며 거나하게 밥을 얻어먹고 불러오는 배를 툭툭 두드리며 길가를 거닐었다. 배가 두둑한 것이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았다. 배도 꺼지고 대충 눈을 붙일 곳이 없을까 싶어 강가를 따라 걷던 표영은 한 사람이 강둑에서 몸을 이리 비틀 저리 비틀대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술을 마셨으면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위험하게 저러고 있는 거야. 쯧쯧.”

그때였다. 비틀거리던 사람이 표영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몸의 균형을 잃더니 강둑에서 데구르르 굴러 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런저런!”

표영은 말을 뱉음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15장(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으나 표영에겐 그를 구하는 데 있어 크게 문제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비탈의 중간에서 사람을 붙잡고 보니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단 몸을 부축해 강둑으로 올라선 표영은 그를 자세히 살폈다.

그는 4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결이 고운 비단옷에 목걸이며 팔찌 등이 꽤나 고급스럽게 보였다. 게다가 턱에 축 늘어져 세 겹으로 접힌 두꺼운 비계에 뚱뚱한 체구는 그가 부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보시오, 부자양반. 좋은 집 놔두고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우리 개방에라도 들어올 심산이오? 키키킥.”

표영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킬킬댔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고… 키키킥… 자자, 어서 일어나 보시오. 내가 집으로 모셔다 드리리다.”

마구 흔들어대는 통에 뚱보 중년 남자는 희멀겋게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은 떴지만 그의 눈에는 온 땅과 하늘이 뱅뱅 돌 뿐 표영도, 그리고 표영의 음성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사는 게 무엇이냐, 누가 인생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느냐, 엿 같은 세상! 콱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비몽사몽간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연신 헛소리만 질러댔다.

‘이런, 뭔가 마음에 맺힌 게 많은 모양이로군. 그렇다고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해서야 쓰나. 음… 이거 어떻게 하나?’

표영은 얼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뚱보 중년인의 몸을 흔들었다.

“자자, 어서 정신을 차리세요.”

하지만 뚱보는 이제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엿 같은 세상이여!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음정도 박자도 무시한 노래보다, 원래 이런 노래가 있었던 것인지 오늘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술이 깨야 할 텐데… 어떻게 한담. 음…….”

표영은 머리를 긁으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안 되도 손해날 것은 없으니까 말이야.”

표영은 가만히 뚱보의 등 뒤 명문혈에 손을 대고 소량의 기를 불어넣었다. 손으로 기를 조종하며 세심하게 중년인의 단전에 기가 모이게 했다. 그런 후 일거에 단전에서부터 기가 온몸으로 퍼지게 했다.

뚱보 중년인의 몸 안에서는 순간 내기가 소용돌이치며 내장과 혈맥에 들어찬 술기운을 밖으로 몰아냈다. 급기야 몸 전체의 땀구멍에서는 술기운이 일순간에 땀과 함께 빠져나왔다.

대체 얼마나 퍼마셨는지 주변이 싸하게 마치 안개처럼 술 수증기가 가득 퍼질 지경이었다. 표영은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있자 주변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하하, 이렇게 응용하니 신공이 술을 깨는 데도 기가 막힌 효용을 발휘하는구나. 역시 대단한걸.”

표영이 자신이 한 일을 감탄하고 있을 때 뚱보 중년인은 술기운을 쏟아내고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제껏 먹었던 것을 바닥에 소리와 함께 여실히 드러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대여섯 번 꾸역꾸역 소리와 함께 토한 후에 얼떨떨한 상태가 되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캄캄한 밤인데다가 급작스럽게 술이 깬 나머지 여기가 어디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술기운으로 인해 몸이 붕 뜬 듯 표현하기 힘든 기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옆에서 씨익 웃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그 표정은 ‘넌 뭐 하는 놈이고 왜 여기에 있느냐’는 뜻이었다. 표영이 얼른 답했다.

“하하하, 지나가다 대인께서 허우적거리며 강으로 빠져들려 해서 제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했지 않겠습니까. 근데 갑자기 배를 움켜쥐시고 몇 번 토하시더니만 이제 정신이 드나 보군요.”

표영의 말에 중년인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이 토해놓은 내용물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극심한 허전함에 사로잡혔다. 원래 그가 술을 마신 것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는데 갑자기 술기운이 한순간에 빠져나가자 몸 안에 내장이 다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고 머리는 두둥실 하늘에 떠 있는 것만 같게 된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술에서 깨어난 후유증이었다. 급기야 뚱보 중년인은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지며 온 천지에 혼자만 외로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누군가가 조금만 건들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표정이 되어 침울하게 강물이 흐르는 것만을 바라보았다. 표영은 그의 표정을 보며 아까부터 연신 비관하던 말들을 떠올렸다.

‘무슨 사연인지 한번 들어나 볼까.’

“대인께서는 사는 게 힘드신가 봅니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뚱보 중년인의 눈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느닷없는 반응에 표영은 눈이 동그래졌다.

‘헉! 뭐야! 내가 말을 잘못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돌이켜 봐도 크게 마음에 상처 줄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뚱보 중년인은 급기야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서글프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이구… 내 인생아…….”

“힘을 내세요. 오늘 당장 죽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표영은 어른처럼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초라한 거지와 비단옷을 입은 부자가 나란히 강둑에 앉아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거지가 등을 토닥거리며 위안하는 모습은 괴이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뚱보 중년인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엉… 어어엉… 난 진짜 서글픈 놈이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표영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을 들어주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든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다 말로 토해내면 크게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법이니 말이다.

표영은 천음조화를 시전하기로 했다. 천음조화는 모든 만물의 소리를 조화롭게 운용해 사람의 희로애락을 자극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면술과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 할 수 있겠으나 그 공능은 가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표영은 부자의 마음 깊숙이 갈무리된 고통을 끌어내기 위해 천음조하의 인(引)자결을 사용해 말했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을 슬프게 하나요?”

잔잔한 음색의 표영의 목소리는 중년인의 고막을 파고들며 뇌파를 자극했다. 부자는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의 구수하고 넉넉한 음성을 듣는 것처럼 편안해지며 저절로 입을 열었다.

“다 돈 때문이지, 돈 때문이라고. 난 그놈의 돈 때문에 슬퍼. 돈이 원수지, 돈이 원수야.”

표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나요?”

뚱보 부자는 징징거리면서 답했다.

“도둑은 무슨 도둑, 우리 집에 호위 무사가 얼마나 짱짱한지 모르고 있군.”

그건 마치 어린아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천음조화의 묘용에 걸린 탓에 가식을 걷어낸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호, 무사들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뚱보 부자는 눈물 어린 눈동자로 헤벌쭉 웃었다.

“놀랐지? 히히.”

“네, 헤헤.”

둘은 이제 아주 오랫동안 사귄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군. 난 우조환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지?”

“헤헤… 저는 표영이라고 해요. 남들은 대부분 이름 대신 거지라고 부른답니다. 그냥 거지라고 부르세요.”

“거지라… 하하하… 거참. 특이한 직업일세.”

우조환은 턱살을 출렁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마음에 있는 바를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옆에 앉은 이가 거지라 하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고 말이 통할 것만 같았다.

“이런 말은 솔직히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사실 난 거지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가난했었어. 말 그대로 가랑이가 찢어질 만큼 가난했었지. 그때가 고작 5년 전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군.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훨씬 행복했던 것 같아…….”

우조환은 과거를 회상하는지 고개를 들어 별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표영이 감탄사를 발하며 끼어들었다.

“우와∼ 놀랍네요. 그럼 고작 5년 사이에 대단한 부자가 되신 거로군요. 금맥(金脈)이라도 발견하신 건가요?”

“금맥? 케케케… 금맥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사실 그건 대단한 행운이었어. 그럼 그렇고말고, 말 그대로 행운이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과연 행운이었는지 악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조환은 웃다가 말 끝 부분에서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계속해서 그동안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