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1장 (6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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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9장 새로운 다짐

표영은 보자기 안에서 이동 중 혼절하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우겨넣어진 데다가 옮겨지며 흔들리는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표영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등바닥부터 차가운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야산의 험준한 곳에 버려진 것이었다.

‘제길.’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죽일 놈, 내 용서하지 않겠다!’

표영은 보자기에 감싸인 채 한동안 온갖 욕을 해대며 마음을 추슬렀다.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에 쌓인 것을 털어내는 것이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일조하는지라 잠시 후엔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표영은 누운 채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다행히 경락은 손상된 부분이 없었고 내장도 파열되지는 않았다. 크게 반항하지 않은 덕분에 이요참도 내력을 사용해 공격을 가하진 않았던 것이다.

표영은 보자기에 감싸여 낮인지 밤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성한 왼손 손끝에 기를 모으고 천을 쭈욱 그었다.

손이 가는 대로 보자기는 마치 칼로 오려낸 듯 길게 양쪽으로 갈라졌고 그제야 바깥이 훤히 보였다. 때는 어슴푸레한 햇살이 나무들 사이를 파고드는 아침이었다.

‘먼저 뼈를 맞춰야겠지.’

조금만 움직여도 부러진 뼈에서 후끈함이 일며 통증이 몰려 왔다. 아픔 때문인지 환히 웃어 보이던 이요참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묵 타주님도 이런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무공을 모른다고 여긴 나에게조차 이 정도로 손을 쓸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곤욕을 당했을까. 잔인한 놈, 내 너를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표영은 다시금 이를 바드득 갈고 어긋난 뼈를 하나씩 맞추었다. 이미 인체와 혈도에 대한 공부를 한 터라 뼈의 구조에 대해서는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근육과 뼈에 대한 공부 없이는 혈의 위치와 혈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요참이 이러한 표영의 행동을 보았다면 기겁을 하였으리라. 그로선 표영을 한낱 거지로 여겼기에 한쪽만 부러뜨려 놓아도 꿈쩍 못하고 야산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설픈 자비를 베푼 것이 표영에겐 복이 되었고 이요참에게는 큰 후환을 남겨놓은 일이 되고 말았다.

표영은 손으로 턱뼈를 먼저 맞추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어깨, 팔목, 손목, 손가락, 갈비뼈 등의 순서로 차례차례 맞춰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뼈가 부러졌을 뿐 으스러진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으스러지기라도 했다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죽진 않더라도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의 상태로 짐작컨대 대략 보름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표영으로서는 이번 일로 황량한 야산에 버려지는 곤욕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꼭 손해만 입은 것은 아니었다.

외부로부터 큰 충격을 받게 되자 아직까지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힘, 즉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의 기운이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어 기를 북돋았고 차츰 전신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뼈와 근육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비천신공도 한 단계 성숙되게 되어 몸 안을 감도는 기운은 더없이 청명하고 거센 힘을 나타냈다.

비천신공의 특징이 비천함 가운데 그 내력이 솟구치는지라 애매한 가운데 고난을 받은 이번 일로 인해 더욱더 큰 힘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표영은 몸 안을 회오리치듯 요동치는 비천신공의 힘을 느끼고 사부의 음성을 떠올렸다.

“비천이라 함은 자신의 우매함과 욕심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비천함에 이른다는 것은 그저 아무 죄 없이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야 비로소 비천함이라 할 수 있는 법.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될 때 비천신공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될 것이며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표영에게 있어 이번 일이야말로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던가.

신공의 성장은 만성지체의 틀을 깨는 데도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해 이제 거의 구 할 정도 그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과거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했다.

한편 표영은 가만히 이번 일을 되새기면서 떠난 사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지금의 내 마음이 이렇듯 답답한데 사부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는 어느 누구도 개방 방주로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모욕을 당했지만 사부님은 믿었던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지 않는가.’

표영은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부를 공격했던 이들은 분명 개방 내부 인물의 소행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중 유력한 인물로는 단연 현 방주인 노위군을 지목했다. 사부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도, 몸에 받은 충격도 충격이겠으나 분명 제자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인해 심적 타격이 너무 큰 탓일 것이라 여겼다.

‘노위군, 이요참. 지금은 안전하다 생각하겠지만 언젠가는 사부님이 당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운기행공을 하며 몸의 회목을 돋우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울적한 심사를 한숨 소리와 함께 달래고 있을 때 멀리서 컹컹 하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웬 개떼들이지?’

개 짖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 50여 마리의 개들은 어느새 표영의 눈앞에 이르렀다.

개들은 모두 허운 지역에서 함께했던 표영의 부하들이었다. 한결같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하는 한편 주위를 빙 둘러 마치 호위하듯이 섰다.

그중 흑구(黑狗)는 입에 견왕봉을 물고 와 표영의 손 옆에 얌전히 놓았다. 표영은 개들이 자신의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자식들 보게,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지…….’

한낱 짐승에 불과했지만 어쭙잖은 강호인들보다 의리가 있는 놈들이었다.

표영은 마음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장으로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법. 표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꼭 감았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네놈들이 더 낫구나.’

개들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표영의 명령으로 돌아간 개들은 하루가 지나 아침이 되어 토지묘로 가 보았다.

거기엔 서열 3위까지의 개들이 축 늘어져 죽어 있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견왕의 신물인 견왕봉이 덩그러니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개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견왕의 거처로 가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도 견왕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 노인에게 당한 것임을 직감한 개들은 뛰어난 추적술을 가진 50여 마리의 개들이 대표로 견왕을 찾아 나선 것이다.

표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냄새를 많이 풍기는 표영인지라 후각을 이용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온 것이다.

***

개들은 표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안타까운 듯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도 없이 얻어터지고 매를 맞았던 개들이었지만 표영을 왕으로 여기고 있는 그들이기에 이 먼 곳까지 쫓아온 것이다.

아직 턱뼈를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하기가 어려운 표영이었지만 왼손을 뻗어 개들을 하나씩 어루만져 주었다.

개들은 견왕의 손길에 그저 감지덕지했다. 언제 이런 따스한 손길을 받아보았던가. 개들은 표영에게 다가가 혀로 핥다가 지네들끼리 월월 하며 뭐라고 의사소통을 하더니만 다시 어디론 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후 개들이 한 마리씩 돌아왔는데 저마다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바둑이는 근처에서 칡뿌리를 캐왔고, 점돌이는 집에서 자기가 먹을 개밥을 밥그릇째 입에 물고 왔다. 또한 백구는 밭에서 무우를 캐와 슬그머니 표영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 외에도 괴이하게 생긴 약초며 자질구레한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표영은 일단 허기를 면하기 위해 개밥과 칡뿌리, 그리고 약초를 씹어 먹었다. 개 사부 밑에서 지겹도록 먹었던 개밥이었지만 그때의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적인 맛이 느껴졌다. 다시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짜식들… 날 감동시키다니…….’

그때였다.

표영의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솟아오르더니 기도를 타고 입으로 솟구쳤다. 그건 검붉은 핏덩이였다. 개들은 저마다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표영은 되레 피를 토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한 줄 비천신공의 구결이 머리에 떠올랐고, 어느 순간 표영은 스르르 잠에 빠졌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이던가. 눈에 보이는 것에 착념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줄 알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세상과 또 다른 힘을 얻을 것이다.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를 볼 줄 알아야 하건만 진정 세속에 물든 이는 진흙을 건드리거나 가까이 하지도 않으려 하니 어찌 진주를 얻을 수 있으리오. 발이 진흙에 젖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손이 더러워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비천신공의 힘을 더하여 얻을 것이다.”

표영은 시련을 겪은 후 비천신공이 발현되어 몸 안에서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는데 개들을 바라보며 깨달은 바가 있어 ‘흙 속의 진주’에 대한 각성을 이루었다.

1차 각성 때도 피를 토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검붉은 피를 토해낸 것은 마음에 잔재되어 악한 기운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보름이 채 되기도 전인 10일째가 되자 표영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비천신공의 발현으로 회복 속도가 놀랍도록 빨라진 것이다.

“야하∼ 날아갈 것 같구나.”

진기가 전보다 더욱 충만해져 손과 발의 놀림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더불어 만성지체를 타고난 흔적으로 남은 푸르스름한 흰자위는 거의 9할 정도가 사라진 상태가 되어 세밀하게 살피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표영은 그동안 수고한 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의 노고가 적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지 너희의 충성스런 마음을 잊지 않으마.”

표영은 일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쓸어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개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움에 젖었다. 자신들은 견왕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런 은총(?)을 입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표영은 개들을 쓰다듬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나는 먼 길을 떠나고자 한다. 너희는 내가 없더라도 항상 자신이 맡은 바 사명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주인에게 충성하도록 하여라. 자, 해산∼”

표영은 새로운 길, 새로운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비록 개들이 충성스럽다고 해도 개방을 개혁함에 있어서 개들을 데리고 고수들과 맞서고 작전을 펼치며 강호를 누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개들은 표영의 기색만 살필 뿐 도무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끼낑, 낑.

흐응, 흥.

그저 끙끙대며 아쉬움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표영은 씩 웃었다. 가라고 했을 때 모두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면 서운했을 것만 같았다.

‘자식들… 나도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는걸.’

하지만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허운 지역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돌아가라. 이 말을 듣는 것도 충성이랄 수 있다.”

표영은 다시금 손을 들어 교차하며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개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하나둘 돌아서서 산을 내려갔다.

혹시나 견왕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한 번씩 뒤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돌아가라는 신호뿐이었다.

표영의 시야에서 개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마지막 백구의 뒷모습도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제 완전히 혼자였다. 숲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자 문득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사부가 떠나고 혼자가 되었을 때의 외로움이 떠오르자 도리어 마음에서 불덩이 같은 열화가 피어나며 귓가로 한 음성이 울렸다.

“넌 개방의 방주다. 개방의 방주야!”

마지막 세상을 하직하던 사부의 절규였다.

‘그래, 나는 개방의 방주다. 난 반드시 개방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부님의 시대처럼 반드시 개방을 돌려놓고야 말테다. 반드시!’

표영은 두 팔을 위로 쳐들고 크게 외쳤다.

“나는∼ 개방의∼ 방주다∼ 산이여! 땅이여! 들리는가∼ 나는 개방의 방주! 들리는가, 강호여∼ 들리는가∼ 개방이여∼ 여기 이곳에 방주가 있다∼!”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소리는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근처 나무 위에 있던 새들이 우수수 하늘로 날아올랐다. 표영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사부님∼ 사부님∼. 제가 해낼 겁니다. 이 제자가 해낼 거라구요. 들리시죠∼ 이 제자가 해낼 거란 말입니다∼!”

표영은 거의 반 시진(1시간)에 이르도록 고함을 질렀다.

답답하게 맺혔던 마음이 소리를 통해 해소되었고 한마디씩 외칠 때마다 마음 가득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일었다.

얼마나 외쳤을까. 어느덧 외로움과 막막함이 사라지고 마음 깊은 속에서 하나의 울림이 전해졌다.

‘나는 개방의 방주다. 내가 방주인데 굳이 개방에 들어갈 필요가 무엇이던가. 내가 있는 곳이 개방이며 나와 함께하는 이들이 곧 개방의 제자들이다. 진정한 개방은 내가 만든다. 새로운 개방, 진정한 개방이다. 가짜 개방은 이제 필요없다. 오로지 강호엔 진정한 개방, 진개방이 있을 뿐이다.’

가슴 가득 뿌듯함이 밀려오며 힘이 용솟음쳤다.

진정한 개방, 즉 진개방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표영은 방향을 가늠해 보고 풍운보를 시전하여 남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건 한줄기 바람이 지면을 스치는 듯한 빠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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