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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하극상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묵백은 소하산 회심봉 정상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이런 편안함을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래, 십 년 전에는 꼭 이런 마음이었지.”
묵백이 소하산 정상에 온 지 오 일째. 그는 정상에서 몰아치는 상쾌한 바람에 몸을 맡기며 그 바람결에 그동안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한 꺼풀씩 날려 버렸다. 바람이 휘감아 돌 때마다 그의 마음은 깃털마냥 가벼워졌다.
“이 정도 시일이 지났으면 도착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이 장로는 너무 꾸물거리는구나.”
그는 오 일 전 수하들에게 마음을 닦고자 소하산 회심봉 정상에 있을 것이라 말해 놓은 터였다. 그리고 찾는 사람이 있거든 이곳으로 올라오도록 일러두기도 했다. 개방에 느닷없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딱히 찾아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집법장로 이요참을 가리킴이었다. 그러던 차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묵백이 혼자 중얼거릴 때 작은 인기척이 들리며 산을 오르는 여러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허허… 역시 쌍놈들이었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이닥치다니.”
묵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정상에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다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세 명은 묵백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로들로서 집법장로 이요참과 무공을 전수하는 일을 맡는 전공장로 호노작, 그리고 키가 유난히 작아 난쟁이처럼 보이는 총원장로 계주억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언뜻 본 기억은 나지만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컨대 총타에서 활동하는 장로들의 수하로 한 번씩 다녀갈 때 얼굴을 스친 것이리라.
그중 한 명의 등엔 큰 봇짐이 들려 있었는데 늘어진 형상으로 보건대 분명 어떤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서들 오시오. 어찌 된 일로 세 분 장로님들께서 이 험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호탕하게 말하는 소리에 이요참이 소면탈혼이라는 별호답게 웃음을 잔뜩 머금고 말했다.
“으하하하, 그래도 멍청한 편은 아니었군.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긴 한 모양이니 말이야. 수하들에게 피 터지는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싫었나 보지?”
이요참이 유난히 밝게 웃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단단히 노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노가 클수록 더욱 밝게 웃는 소면탈혼이니 말이다. 이요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옆에 선 전공장로 호노작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정녕 방의 뜻을 거스르려 한 것이더냐?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지난날의 죄과를 반성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생면부지의 거지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참인가.”
그 말에 이요참이 끼어들었다.
“하하하, 호 장로께서는 무슨 여지가 있다고 반성 운운하는 것이오. 하하하, 분명 방주님께서 노하시고 계심을 모르신단 말씀이오? 말이 필요없소이다.”
“그래도 본인 입으로 직접 말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호노작의 말은 그 옆에 있던 키 작은 계주억 장로의 말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 장로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의 행동은 명백하니 길게 시간 끌 필요 없지요.”
작은 키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듣는 이의 고막을 울릴 지경이었다. 묵백은 호노작의 호의적인 말에 가만히 머리를 숙여 보이고 말했다.
“호 장로께서는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낱 보잘것없는 거지를 받아들인 것 때문만은 아니지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마음이 과거 오의파의 길을 걸었던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답니다. 저로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지라 세 분 장로님께서 수고로우시겠지만 저를 데려다 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흐음… 정녕 그대는…….”
전공장로 호노작이 신음을 발하며 안타까워했다. 이요참은 묵백이 변명을 늘어놓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자 기분이 더없이 좋아졌다. 이젠 계획대로 그를 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하하하,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니 아주 좋구만. 자자, 가타부타 할 것 없소이다. 배반자에겐 엄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 묵백! 너는 순순히 우릴 따라가겠느냐, 아니면 손을 쓴 후에 따라가겠느냐?”
묵백은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그러한데 어찌 만물의 으뜸인 사람으로서 그냥 곱게 따라갈 수가 있겠소. 게다가 예전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힘을 다해 싸우다 잡히거나 죽었으니 저 또한 그 길을 따라야겠지요.”
총원장로 계주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가 작은 데다가 목이 굵고 짧은 그가 갸웃거리는 모습은 노인의 모습이면서도 어찌 보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대는 우리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세 분을 상대함은 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는 데까진 해보아야겠지요.”
“하하하, 점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구나. 좋다, 나 또한 배반자를 편안하게 끌고 가고 싶진 않았던 터라 마음에 딱 맞는 말이로다.”
이요참의 느글거리는 말에 묵백이 바로 말했다.
“상대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지타주 오선교와 구지경외자 표영이라는 거지는 건드리지 말길 바라오. 오선교야 지타주로서 무슨 힘이 있겠으며 구지경외자는 무공도 모르는 일개 거지에 불과하니 내버려 둬도 아무 문제없을 것이지 않겠소.”
“하하하, 오선교라…….”
이요참이 뒤를 향해 손짓을 하자 큰 보자기를 둘러맨 개방 제자가 잽싸게 다가와 쿵! 하고 이요참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요참은 발로 보자기를 툭툭 건드리며 이죽거렸다.
“흐흐흐, 오선교는 이미 이곳에 들어가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환도뼈가 조금 부러지고 허리가 삐끗했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야. 너 혼자 데려가기엔 왠지 외로울 것 같아서 말이야. 동행이 있으면 오순도순 좋지 않겠나. 하하하.”
묵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요참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이렇게 되면 표영이라도 멀리 피하라고 했어야 했어. 장로라곤 해도 손속이 잔인해 무공을 모르는 이라고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으니 걱정이구나. 휴∼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그저 하늘의 가호가 있길 바라는 수밖에.’
묵백은 말해 봐야 더 이상 소용없음을 알고 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한번 판을 벌여봅시다.”
기를 끌어올리자 소맷자락이 기운에 의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발아래 흙먼지가 회오리쳤다.
세 명의 장로들은 진형을 부챗살처럼 펼쳐 공격을 기다렸다. 원래 강호의 법칙대로 하자면 일 대 일의 싸움이 되어야 하지만 방의 배반자를 제압함이 목적인지라 굳이 그런 법칙에 속박당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터였다.
묵백은 내기(內氣)가 극상으로 끌어올려지자 신형을 날려 중앙에 있는 호노작을 향해 그의 장기인 오운장법(五雲掌法)을 시전하며 장력을 날렸다.
쑤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섯 가닥의 구름 같은 기운이 호노작을 향했다.
호노작은 예상 밖으로 자신을 향해 공격이 다가오자 약간 의외라 여겼다.
삼 대 일의 대결같이 다수와의 대결은 외곽을 돌며 공격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중앙을 공격하게 되면 좌우의 협공까지 한꺼번에 받는 결과가 생겨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끝이 나기 십상이다.
결과야 어떻게 나오든 호노작으로서는 맞받아쳐야 했다. 다가오는 기세를 보아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없다 여긴 그는 파장권(把掌拳)을 이용해 주먹을 교차하며 맞받아쳤다.
하지만 묵백의 공격은 호노작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 오른쪽에 있는 이요참이 주목적이었으므로, 신형을 급격히 틀어 이요참을 향해 장력을 전환시켰다.
약간 여유를 가지고 있던 이요참은 자신에게 장력이 쏘아오자 훌쩍 몸을 솟구쳐 뒤로 물러났다. 묵백은 달려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힘을 다해 장력을 뻗었다.
허나 그 순간, 묵백은 양어깨가 거대한 독수리의 발톱에 뜯긴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난쟁이 계주억 장로가 응조수를 이용해 어깨를 할퀴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요참을 향하던 장력의 기세는 수그러들었고 마침 이요참이 반격한 장력에 가슴을 얻어맞았다.
퍼펑!
“으윽!”
비틀거리며 뒤로 다섯 걸음을 정신없이 물러난 묵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엽지혼 방주님! 보고 계십니까. 이 고통은 당신께 사죄하는 아픔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몸이 상할 것을 각오한 터였다. 그리고 맞는 가운데 지난날 친구들을 떠나 평안하게 지냈던 날에 대한 대가를 하나씩 지불하고 평안함을 얻고자 했다. 기혈이 진탕되며 충격에 숨을 고르기도 힘들었지만 묵백은 한소리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몸을 가다듬고 손을 뻗었다.
그의 공격은 장로 중 어느 누구의 몸도 맞히지 못한 채 그저 허공을 공격하고 말았다. 어느새 호노작의 신형이 솟구쳐 올라 연환퇴의 수법으로 묵백의 머리를 쓸어갔다.
강맹한 기세라 제대로 맞는다면 목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이 분명했다. 급격히 허리를 숙여 피하는데 호노작의 발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묵백의 등판을 찍었다.
퍽!
“욱∼”
한소리 신음과 함께 묵백의 몸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묵백은 다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번은 친구 소천의 몫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묵백은 흐트러진 몸 그대로 손을 뻗었다. 거기엔 어떤 위협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맥없이 내뻗는 주먹질에 불과했다.
이미 대결은 끝난 셈이었다. 계주억과 호노작은 더 이상 공격할 필요를 못 느끼고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이요참은 달랐다.
연신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가 주먹을 손으로 젖히고 목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묵백은 힘없이 손을 저어보았지만 그저 허공만 맴돌뿐이었다.
“넌 너무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구나, 묵백. 하하하.”
이요참은 묵백의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게 한 뒤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제대로 조준하고 두 바퀴를 돌며 힘을 실어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거의 절벽의 끝자리까지 주르르 밀려나며 묵백은 간신히 숨만 깔딱거렸다.
‘이번엔 후공우의 몫이다. 친구여, 날 보아라.’
그는 몸이 망가져 갈수록 마음은 더없이 기쁨에 찼다.
호노작과 계주억은 이쯤 하면 됐겠다 싶어 이요참을 말렸다.
“이 장로, 그만 하고 압송하도록 합시다. 더 이상 그에게 모욕을 줄 필요는 없을 듯하이.”
“그래,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지 않소이까.”
하지만 이요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 정도로는 너무 약하지 않겠소? 두 분은 일이 끝난 모양이오만 나는 조금 남았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들.”
이진구가 잔인한 품성을 지닌 것은 분명 핏줄 탓인 모양이다. 오히려 이요참에 비하면 이진구는 새 발의 피 같은 입장이 아닐까.
이요참은 한 발 한 발 다가가 묵백 앞에 이르러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무릎을 꿇렸다. 다시 머리카락을 움켜쥔 이요참은 발길질로 가슴을 강타했다.
퍽!
“으읍……!”
‘개방이여, 날 용서하라. 나의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묵백, 사실 나는 오늘 널 땅에 묻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 너의 명이 다한 것은 아닌 것 같구나. 허나 내가 우선 섭섭하니 임시로 땅에 묻어주마, 하하하.”
이요참은 묵백의 머리를 땅에 닿게 하고 발을 들어 그의 머리통을 밟았다. 입과 코와 눈이 땅에 닿은 채 묵백은 뒤통수에서 압박하는 힘에 의해 땅으로 처박혔다. 건조하기 이를 데 없어 딱딱해진 땅에 얼굴이 서서히 박히기 시작했다.
“으라차! 으라차! 으라차!”
이요참이 신이 나서 으라차를 외치며 발에 힘을 가했고 기합이 터질 때마다 묵백의 머리는 땅으로 점점 들어가 박혔다.
급기야 온전히 머리가 다 들어가고 목에서부터 다리까지만 밖으로 나온 채로 묵백은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언젠가는 온몸을 땅에 묻어주마.”
이요참은 한동안 기분 좋게 웃다가 뒤에 있는 개방 제자들을 손짓해서 불렀다. 그러자 한 명이 품에서 보자기를 펼치더니 땅에 처박힌 묵백을 끌어내 보자기에 넣었다. 정신을 잃고 보자기에 넣어지는 묵백을 바라보며 이요참이 중얼거렸다.
“미련한 놈 같으니… 평안한 길을 두고 험한 가시밭길을 가겠다니… 쯧쯧.”
‘다음은 구지경외자 차례로군. 흐흐.’
그의 얼굴에 다시금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