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개방은 요즘 날로 그 성세를 더해가는 것 같아서 자네의 친구로서 정말 보기가 좋네그려.”
-화산파와 무당파, 그리고 곤륜파의 순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혈곡이 당신을 도운 것은 개방의 정보력 때문이오. 부디 과거의 빚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마시구려.
냉랭하게 들려온 전음에 노위군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꾸미는 말도 생략한 채 전음으로 바로 답했다.
-자꾸 날 어리석은 사람 취급하지 마시오. 아무리 혈곡이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두려워하는 줄 아시오?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 가만히 지켜보시길 바라오.
“이 친구, 술만 마시지 말고 이야기 좀 하세나. 뭘 그리 마셔대나.”
-흐흐, 난 당신을 만날 때가 사실 제일 기분이 더러워. 꼭 마시지도 않는 술을 마시는 것처럼 꾸며야 하고 간사한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봐야 하니 말이야.
번개라도 내리꽂힐 것 같이 눈을 번뜩이며 곡함이 말하자 노위군은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아, 술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벌써 가려고 하나. 아까까지만 해도 오늘 마시고 죽을 사람처럼 하더니 말이야.”
-이만 가보도록 하시오.
“하하, 사실 나도 바쁜 몸이라네. 그래도 자네니까 내가 이렇게 술이라도 하지 않았겠나.”
-조만간 곡주님께 당신의 부탁을 여쭙고 다시 찾아오겠소.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하시오.
“다음에 또 봄세.”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에 불꽃을 튀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지 않겠네.”
“우리 사이가 굳이 멀리까지 나와야 할 사이는 아니잖은가.”
“하하하, 그렇지.”
곡함이 내실을 나간 뒤에 한동안 노위군은 곡함이 나간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잔인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제7장 친구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집법장로 이요참은 방주 노위군 앞에 공손히 시립한 채 말을 맺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섬서 분타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입니다.”
그는 조카 이진구를 만나고 부랴부랴 총타로 달려와 방주에게 진상을 늘어놓은 것이다.
노위군은 이틀 전 혈곡의 고수 곡함을 만난 뒤로 마음이 뒤숭숭하니 엉켜 있던 터에 이와 같은 말을 듣자 활화산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묵백, 이 개 같은 자식이 감히 방의 규율을 그리도 가벼이 여겼더란 말이냐!”
이요참은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다 저의 못난 소치입니다. 제가 집법장로로 있으면서 그런 움직임조차 포착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벌해 달라 말하는 이요참에게 노위군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묵백은 반역에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장로! 호 장로, 계 장로와 함께 당장 길을 떠나도록 하라. 묵백과 오선교를 잡아 내 앞에 끌고 오라. 내 직접 놈들을 심문하겠다!”
노위군은 자신이 사부를 배반하고 반역하여 방주의 자리에 오른 만큼 자신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에 대해서는 민감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혈곡으로부터 조롱 아닌 조롱을 당하고 난 터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속하, 방주님의 지엄하신 분부를 거행하겠나이다.”
이요참은 깊숙이 머리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묵백, 기다려라. 감히 내 조카에게 모질게 굴다니 백 배로 갚아주마.’
묵백은 요즘 분타에 머물지 않고 허운 지타에 내려와 있었다. 그건 이진구 파동으로 인해 술렁대는 지타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방인들은 그런 묵백을 보며 심난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의 묵백의 마음은 작은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잠도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는데 원인을 말하자면 집법장로 이요참이 다녀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나는 친구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은 많이 부끄러웠지.’
이요참이 떠나면서 쏘아본 눈빛의 의미를 묵백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어떤 방법으로든 보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야유회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기대와 설레임 같은 것이었다.
지난날 함께했던 친구들과 이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이다.
‘잠도 오지 않으니 산책이나 할까.’
늦은 밤이라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았지만 밤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며 한참을 걷던 그는 문득 앞을 바라보다가 ‘허허’ 하고 헛웃음을 날렸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표영의 거처 앞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 참.’
그의 발길이 표영에게로 옮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개방이 정의파의 길로 돌아섰을 때, 그 길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던 마음을 돌아보게 하고 떠나기로 결정짓게 했던 계기가 바로 표영으로 인해 생겼으니 말이다.
묵백은 조용히 표영을 불렀다.
“흠흠, 안에 있나?”
‘묵 타주가 야심한 밤에 웬일이지?’
묵백이 헛기침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표영은 이미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 있었지만 짐짓 자는 척했다. 묵백은 고른 숨소리를 통해 표영이 깊이 잠들었음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곤히 잠들었는데 괜히 깨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만날 수 없을지 모르잖는가.’
묵백은 침상으로 다가가 표영을 흔들어 깨웠다.
“이보게, 구지경외자. 좀 일어나 보게나.”
따뜻한 손길로 어깨를 흔들자 표영은 그때서야 눈을 비비고 잠에 못 이기는 척 몸을 비틀며 짜증 섞인 말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누군데 잠을 깨우고 난리야, 난리긴. 개한테 물리고 싶어 안달이 난 거냐.”
그러다 묵백을 정면으로 보고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와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이런! 분타주님께서 오셨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만 헛소리를 질러대다니… 아이고, 너무 죄송합니다요.”
“허허허, 아무 연락도 없이 늦은 밤에 불쑥 나타난 내가 잘못된 거지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오히려 내가 미안하게 됐네.”
묵백은 표영에게 말할 때 마구 하대를 하지 않았다. 개방의 서열로 보자면 까마득하여 ‘∼해라, ∼그랬다’ 식으로 말할 수도 있을 터이나 그는 표영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은지라 마음으로는 작은 스승과도 같이 여긴 터였다.
“나는 내일쯤으로 해서 잠시 산에 올라가 수련을 할 생각이라네. 오랫동안 못 볼지도 몰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해서 말이야.”
뜬금없는 수련 이야기에 표영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겉으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지금도 무공이 세신데 거기에다가 더 수련을 하신단 말씀이세요? 욕심이 지나치신 거 아니십니까?”
“하하하, 이번 수련은 마음을 정양하기 위함이지. 마음이 성취를 이루면 무공도 성장하는 것이니 자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로군. 잠깐 나랑 바깥바람이나 쐴까.”
“좋죠.”
둘은 밖으로 나와 외진 길을 걸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묵백이었다.
“사실 내가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함이네.”
“……?”
표영이 의문스런 눈빛을 답변 대신 보내자 묵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겐 친구들이 있었다네. 아주 좋은 친구들이었지. 자넨 친구들이 있나?”
“친구요? 음…….”
어릴 때는 게으름으로 인해 또래 친구를 사귈 겨를이 없었던 표영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구협 개사부, 사부 엽지혼,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개들. 스승들이며 부하들이지만 모두들 거리낌 없이 대해주었던 좋은 친구들이기도 했다.
“헤헤… 좋은 친구들이 몇 명 있긴 하죠.”
“자넨 복을 받았나 보네. 한 명의 좋은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나라를 얻는 것보다 어려우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선 나도 복 받은 사람 중 하나였지. 하지만 난 내 친구들에게 있어 과연 좋은 친구로 남았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못했다네. 난 그들과 함께 힘든 길을 가지 못했거든.”
묵백은 과거 정의파로 돌아서는 개방에 반대해 죽거나 잡힌 친구들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웬일인지, 그 상세한 내막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표영에게는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난 그동안 친구들이 많이 그리웠어. 하지만 그전까지는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그러던 차에 자네를 만나게 되자 그리움이 너무 커져 버렸다네. 친구들은 모두 자네같이 보잘것없는 외양과 소탈한 삶을 살아갔었거든.”
표영은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모두 자네같이 보잘것없는 외양과 소탈한 삶을 살았거든’이라는 말을 듣자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묵 타주는 지금 개방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묵백으로서는 표영을 철저한 거지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정작 전대 방주인 엽지혼의 제자로서 개방의 변천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묵백 스스로는 독백하듯이 말하는 것이었지만 표영은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의 전후를 추측하느라 분주했다.
“이젠 나도 그런 친구들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네. 잘만 하면 곧 친구들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친구 분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계시나요?”
표영은 그곳이 대사형이 되는 장산후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글쎄… 어디에 있을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곧 친구들에게 나를 데려갈 사람이 오지 않을까 싶네.”
“와∼ 정말이십니까? 좋으시겠네요. 거기에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재밌을 것 같은데.”
“허허허.”
묵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표영을 보며 웃었다.
‘그곳은 음습한 뇌옥일 텐데… 이 친구는 어디 평화로운 곳인 줄로 생각하는가 보군.’
묵백은 직위가 분타주인만큼 노위군이 방주가 되면서 많은 반대자들이 사로잡혔음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편안한 처소가 아님은 분명할 것이라 추측했다.
“하하, 너무 좋은 곳이라 자네하고 가긴 좀 아까운걸. 자넨 데려가지 않는 게 좋겠어.”
“야∼ 이거 너무하시는군요. 그러실 줄은 몰랐는걸요.”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영원히 자네는 데려가지 않을 셈이네. 껄껄껄.”
그 말에 표영은 쀼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 사부님을 따르던 이들이 어딘가에 있긴 있나 보구나. 그렇다면 묵 타주는 반기를 들 셈이란 말인가? 아니면 스스로 옷을 벗겠단 말인가? 언젠가는 내가 그들을 모두 찾아야겠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개방인들이 아닌가.’
“숨으신다고 제가 못 갈 것 같으세요? 제가 꼭 천안통을 익혀서라도 분타주님이 가신 곳을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허허… 거참.”
순진무구한 말에 묵백은 따스함을 느꼈다.
‘이 친구처럼 나도 순수했다면 좋았을 것을……. 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구나.’
묵백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고 그는 표영과 한참을 더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했다. 묵백으로서는 마지막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