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
이요참은 개방의 집법장로로 강호에서는 소면탈혼(笑面奪魂)이라 불렸다.
집법장로란 법을 집행하는 개방의 어른이라는 뜻으로 방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그런 행위들을 엄격히 관리하는 이를 의미했다. 이요참은 환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느냐?”
너무도 자상한 말이었지만 이진구는 되려 불안함에 휩싸여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는 숙부가 밝게 웃을 때야말로 가장 심사가 뒤틀려 있을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강호에서 그를 이렇게 불렀겠는가. ‘웃으면서 영혼(靈魂)을 취한다’는 소면탈혼이겠는가. 어느 누구라도 그 웃음을 정면으로 대한 자는 무사하긴 틀린 것이다.
이진구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 찧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허허허… 잘 지냈느냐?”
이요참은 다시금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잘 지냈느냐?’의 ‘냐’ 자를 끝낼 때는 어느덧 그의 발길은 이진구의 머리통을 향하고 있었다. 밝은 웃음소리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기세였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이진구는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뒤로 한 바퀴 회전하며 나자빠졌다.
그나마 내공을 실어 날린 발길질이 아닌지라 목숨엔 지장이 없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잘못했습니다, 숙부님. 어억… 용서해 주십시오.”
식은땀을 연신 흘리며 이진구는 용서를 구했다.
“허허허…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냐. 허허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남아 있음은 아직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매서운 발길질이 가해졌다.
퍽퍽. 퍼퍼퍽. 퍽퍽.
방 안에는 이요참의 웃음소리와 이진구의 맞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한데 섞인 채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일다경(15분) 정도가 지나 이진구가 바닥에 뻗어버린 후에야 이요참은 웃음을 거두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화가 풀린 것이다.
“일어나라.”
이진구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언제 아팠냐는 듯 번개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요참은 비로소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한 채 조카의 몰골을 살폈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이리저리 굴리고 살이 쏙 빠져 피골이 상접한 것이 영 사람다운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쯧쯧.”
예전의 당당하고 거만하기까지 하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엿보려 했지만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는 길에 분타에 들러 자세한 내용은 들었다.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동굴에 갇힌 것도 모자라 이젠 헛소리까지 해대다니… 방과 가문에 먹칠을 하겠다는 수작이냐?”
이요참의 냉엄한 말에 이진구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듣고 얼른 그 말에 답했다.
“숙부님, 제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 구지경외자에 대해 하는 말씀이시라면 그는 실제 대단한 고수였습니다. 그가 저를 죽이려 한 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뭔가 비밀스런 뜻을…….”
하지만 이진구의 말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이요참이 손을 날려 이진구의 뺨을 갈긴 것이다.
짝-
“이런 바보 같은 녀석, 내 앞에서조차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이겠다는 것이냐. 구지경외자인가 뭔가 하는 놈은 그저 거지일 뿐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하는 게냐!”
그는 이곳에 오기 전 표영을 만나고 온 터였다. 혹시나 해서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약간 맛이 간 거지 녀석일 뿐, 그 외는 더도 덜도 아니었다. 이요참 같은 고수조차 표영이 익힌 비천신공이 자연과 일체되어 버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표영의 강한 내공의 힘조차도 비천신공은 안으로 갈무리해 놓은 터였다.
“너에게 듣기 위해 묵백에게는 묻지 않은 것이 있다. 구지경외자란 녀석은 어떻게 개방 제자가 되었느냐?”
이진구로서는 진실을 말해도 숙부조차 믿지 않자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정은 구지경외자를 빼곤 이야기가 안 되는데 그것을 말할 수 없게 되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숙부가 꺼낸 말을 듣자 이진구는 번뜩 기막힌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까 했던 말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기만하려 함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기가 두려워서 구지경외자를 끌어들였던 것뿐입니다. 사실은 이번 일이 있기 전 저는 분타주와 지타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묵 분타주와 오 지타주가 느닷없이 거지인 구지경외자를 개방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로선 개방이 거지들의 소굴이 아니기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저로선 어찌해 볼 수가 없어 마음으로만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소하산에 마음을 달래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복면을 쓴 네 사람이 길을 가로막더니 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무공이 너무도 강해 계속 맞설 수 없게 된 저는 급한 김에 동굴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이없게도 갑자기 동굴이 무너져 내리면서 갇혀 버리게 된 것이랍니다.”
이진구로서는 구지경외자에게 원한이 깊었지만 어차피 묵백과 오선교를 손봐주게 되면 구지경외자도 자연 그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이요참이 이야기를 다 듣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음… 묵백과 오선교가…….”
묵백과 오선교를 읊조리는 이요참의 눈빛이 번뜩였다.
“복면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론 묵백 분타주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언젠가 제게 ‘한번 단단히 혼이 나야겠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었으니까요.”
“네 말은 사실이렷다.”
“제가 어찌 두 번씩이나 숙부님을 기만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묵백은 분명 과거 오의파로서의 개방을 동경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흐흐흐, 그렇다면 가만 놔둘 수야 없지. 근데 너는 왜 내게 찾아와 일을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바보 같은 녀석. 처음에 바로 내게 달려왔다면 네 녀석도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더냐.”
이진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송구스런 표정을 짓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숙부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냐?”
“사실 이번 일로 모든 내공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조카를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무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로선 삶의 모든 것이 달린 문제였다. 하지만 이진구의 마음과는 달리 이요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온초방에서 온 의원으로부터 조카의 몸 상태를 들은 터였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무공을 회복할 방법은 현재로썬 불가능하다. 하지만 설사 네가 무공을 회복했다고 해도 넌 더 이상 개방에 남을 수 없다. 아니, 개방뿐만 아니라 강호를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구지경외자가 거지 같다고 하지만 너야말로 구지경외자란 놈보다 더 거지같이 행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어찌 다시 강호를 활보할 수 있겠느냐.”
“숙부님! 제발 이 조카를… 흑흑.”
이진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실 이진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공을 잃었다는 것보다 그를 노리는 원수들이었다. 그동안 괴롭힌 자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언젠가 그들이 찾아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미 그들은 선물까지 표국을 통해 보내오지 않았던가.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이요참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눈물을 거두어라. 무공을 다시 회복할 순 없어도 너의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해주겠다. 일단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대로 고향에 내려가 있어라. 하지만 그곳에도 오래 머물기는 힘들 것이다. 일단 그곳에 있으면 내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 그때는 다른 외진 곳으로 옮겨 농사를 짓고 평범한 농부로서의 삶을 살도록 해라.”
“네? 노, 농부라뇨?”
농사꾼이 되라니……. 이진구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팔팔한 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야 하다니……. 오직 그가 있어야 할 곳과 죽어야 할 곳은 강호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쓸모없는 놈. 이 모든 게 다 네놈이 섣불리 행동한 것 때문이니 누굴 탓할 것이 못된다.”
“숙부님!”
“더 이상 긴말할 필요 없다. 나는 지금 당장 총타로 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겠다.”
이요참은 냉정하게 방을 나갔고 이진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숙부가 떠나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앞날이 창창하던 이진구는 이제 평범한 농부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그에게도 강호에도 좋은 일임이 분명했다. 평범 속에 자신을 돌아보아 남은 여생을 땀을 흘려 수고롭고 보람되게 산다면 그보다 값진 것은 없으리라.
제5장 뇌옥
망창산은 그 산세가 험하기로 이름 높았다. 봉우리마다의 위용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고 여러 화가와 문인들은 그 산세를, 그리고 풍광을 시로 읊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산행로는 길게 이어지며 나름대로 평평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외의 길은 사람이 지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망창산의 산행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험준한 산악을 마치 평지를 달리듯 오르는 이가 있었으니, 그 빠르기가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타고 기어오르듯 하는 것이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황금빛 장포를 둘렀는데 멀리서 볼 것 같으면 햇빛을 받은 옷이 번쩍번쩍 빛나 마치 반짝거리는 황금빛이 이동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곧 도착하겠구나.”
그는 산 위를 바라본 후 고집스럽게 보이는 입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리면서 연신 발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방향으로 보건대 낭아봉 정상이 목적지인 듯했다.
낭아봉은 망창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이리의 이빨처럼 생긴 형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윽고 낭아봉 정상에 오른 그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절경이 햇살 아래 찬연하게 빛나고 있어 절로 마음에 호연지기를 일으켰다.
“언제나 봐도 아름다운 곳이야.”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그의 황금빛 옷이 펄럭이며 뒤로 펼쳐졌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그는 한동안 주변을 거닐다가 절벽의 끝자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곤 풀숲을 향해 오른손을 대각선으로 살짝 뻗었다. 그러자 풀숲에서 짜르륵 하며 뱀의 형상 같은 밧줄이 손으로 빨려들었다.
그가 펼친 수법은 허공에서 물건을 취하는 격공섭물이었다.
그곳에 이미 밧줄이 놓여 있음을 잘 아는 듯한 행동으로 보아 자주 이곳에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밧줄을 된 그는 몇 차례 당겨보아 튼튼한지 여부를 살폈다. 묵직한 반탄력이 돌아오는 것으로 밧줄이 쇠말뚝에 단단히 고정돼 있음이 확인되자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그의 몸을 따라 밧줄이 곡선을 그리며 활짝 펴졌다가 그 줄이 다해 절벽의 중간에서 팽팽히 당겨졌다. 출렁하며 그의 몸이 낙하하다가 멈춰 섰고, 신형이 기이하게 뒤틀리면서 벽 쪽으로 부딪쳐 갔다.
누가 보았다면 참으로 괴이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몸은 절벽에 부딪치지 않고 벽 속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가 버렸다.
사실 밧줄의 길이가 다한 그곳 절벽엔 큰 구멍이 뚫린 동혈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동혈이 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알았다고 해도 그곳으로 내려가 볼 엄두는 내지 못했으리라.
그가 절벽에 뚫린 동혈에 내려서자 동혈 입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속하, 방주님을 뵙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라도 된 양 그들의 말은 똑같이 튀어나왔다. 황금빛 옷을 입고 내려선 이는 바로 현 개방 방주 노위군이었던 것이다.
“그래, 별일들 없겠지?”
“네, 방주님의 보살핌에 따라 이곳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좋다.”
노위군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의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넓어졌고 길이 또한 의외로 길었다.
이 은밀한 처소는 무엇이며 과연 어떤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진 곳일까.
사실 이곳은 개방의 비밀 뇌옥으로 반구옥(反拘獄)이라 불렀다. 개방 내의 반역자들이나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방주와 장로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표영의 사부 엽지혼이 있을 때는 존재조차 없던 것이었으나 노위군 때에 이르러 새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은밀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 방주였던 엽지혼을 따랐던 오의파의 개방 고수들이 대부분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위군을 반대했던 이들은 외부적으로는 개방을 떠나 은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이곳에 모두 감금되어 있던 터였다.
그중에는 방주 노위군의 사형인 장산후도 갇혀 있는 상태였다.
동굴을 따라 한참을 걷자 나무로 좌우가 밀폐된 공간이 보였고 그곳마다에는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그 안에는 햇빛도 받지 못한 채 진정한 개방을 꿈꾸는 이들이 피폐한 몰골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는 과거 대단한 명성을 지닌 자도 있었고 뛰어난 고수들도 많았지만 현재는 힘없이 갇혀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들은 연골산에 중독되어 내공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기에 그저 하루 한 끼 넣어주는 밥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동굴 끝자락으로 이동한 노위군은 열쇠를 열어 밀폐된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횃불을 밝히자 어두운 내부의 광경이 드러났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여기저기 웅크리던 쥐들은 불빛에 놀라 구석으로 숨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옥 안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른 채 힘없이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노위군은 코를 틀어막으며 은근히 내공을 실어 말했다.
“장 사형, 잘 계셨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