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
이진구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후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삼 일이 지나서였다. 그의 눈은 퀭하니 들어갔으며 눈동자는 풀려 아무런 빛도 내지 못했다. 깨어난 그는 이젠 누군가가 문병을 올까 봐 전전긍긍했고 극도로 불안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다. 심지어 의원인 온초가 병세를 살피러 들어올 때도 깜짝 놀라며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으니 그 정도의 심각성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이렇게 되자 개방에서도 되도록 방문을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손님이 그를 찾게 되었다. 그 방문자는 바로 표영이었다.
표영은 병문안을 함에 있어 어려움이 없었다.
첫째, 그가 개방인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의원 온초가 표영의 열렬한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온초는 특별히 개를 좋아했는데 정도가 심해 의국에조차 서너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을 정도였다. 개들은 모두 사냥개 종류로 사납기가 여간 매섭지 않았다. 하지만 온초가 표영을 맘에 들어 하는 건 사나운 개들이 마치 애완견으로 돌변한 듯 표영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떠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선 그런 모습이 그저 신비하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자, 여기네. 자네가 개방에 들었다는 말은 들었네만 이렇게 병문안을 올 줄은 몰랐군.”
온초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이진구의 병실로 인도했다.
“개방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곳이잖습니까. 그러니 어찌 어려움을 보고 나 몰라라 하겠어요. 하하하.”
표영이 괜히 으스대듯 말하자 온초는 우스운지 킬킬댔다. 그는 원래 웃을 때 점잖게 미소 짓곤 하는데 이상하게 표영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 어린애처럼 웃곤 했다.
“근데 자네, 무슨 선물을 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작은 것에도 큰 충격을 받는단 말이야.”
“거지가 돈이 어디 있다고 선물씩이나 사 들고 오겠어요.”
“하하 그렇긴 하군. 자, 들어가 보세나.”
온초와 표영은 병실로 들어섰다. 이진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바로 온초 의원의 얼굴을 알아보고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 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만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너는, 네가 왜… 이 나쁜 놈! 날 죽이려고 왔구나. 날 내버려 둬……. 으아악! 살려줘!”
이진구는 설마 하니 구지경외자가 직접 병실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지라 두려움에 떨었다.
‘날 죽이려는 것일까? 왜? 왜? 날?’
그날 표영이 소하산에서 얼마나 대단한 무위(武威)를 보여 주었던가. 자신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고수인 것이다. 이진구는 덜덜 떨며 침상 모서리 쪽으로 이동해 버둥거렸다. 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온초를 보고 말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이런 경우엔 갑자기 좋아지기도 하니까 기대를 저버려선 안 되는 법이지.”
이진구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이 나쁜 놈, 넌 대체 무슨 속셈이냐. 감히 이곳까지 찾아와 날 죽이려 하다니… 개방이 그렇게 허술하게 보이더란 말이냐. 여긴 증인들도 많으니 어디 한번 죽여 볼 테면 죽여 봐라.”
온초는 더 이상 있다간 표영의 기분까지 잡칠 것을 우려했다. 구지경외자의 성질을 건드려 봤자 개들만 두들겨 맞을 게 뻔하니까 말이다.
“안 되겠네. 오늘은 전혀 대화할 가망성이 없겠어. 다른 사람이 왔을 때는 저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자넬 보고는 너무 심하군. 그냥 오늘은 돌아가게나.”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표영은 온초에게 대답하고 문을 나서면서 고개를 돌려 이진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이진구는 별 일 없이 돌아간다고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표영의 괴이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럼 이만… 어거거 어거거… 어거거거 어거거…….”
이진구는 ‘어거거’ 하는 소리에 파파팟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소리는 어디서 많이들은 소린데… 헉! 이럴 수가… 그때의 벙어리… 이런…….’
바로 동굴에 갇혀 있을 때 작은 구멍을 뚫고 때만두를 건네주었던 벙어리의 목소리였다. 이진구는 모든 신경이 곤두섬을 느끼며 참혹스런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가 병실에 있으면서 가장 의문스럽게 여긴 부분은 벙어리의 정체였다.
나중에 그 만두가 때만두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야 밝혀진바 자신을 비참하게 한 원흉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기경외자였던 것이다.
“으아악∼ 으아악∼ 으아아아아아∼∼ 으아악∼!”
그건 한 마리 짐승의 부르짖음과 같았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는 온 병실을 뛰어다니며 머리를 벽에 박았다가 다시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기도 하면서 난리가 아니었다.
거의 일 식경(30분) 정도를 지랄 발광을 하던 이진구는 힘이 다했는지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그의 입가엔 침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었고 눈은 헤롱헤롱해져 광기 어린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젠 진짜 정신이 미쳐 가고 있는 것이다.
“흘흘… 흘흘… 흐흐흐……. 헤에∼ 벙어리… 벙어리…….”
실없는 웃음을 날리는 이진구의 눈은 광기(狂氣)로 번들거렸다.
제4장 소면탈혼
이진구는 여러 선물 공세와 표영의 ‘어거거’ 충격 등의 우여곡절을 거친 후 5일이 지나 온초방에서 나오게 되었다.
온초 의원은 완전히 돌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안정감을 찾자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병실을 나서기엔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극구 만류했지만 이진구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이진구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진구가 겪고 있는 후유증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퇴방은 시기상조였다.
이진구는 수전증(手顫症)에 걸려 손을 쉴 새 없이 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허리를 약간 숙이고 두리번거리는 괴이한 습관도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진구의 모습에선 거만을 떨던 과거의 그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무공은 폐지되고 동굴 사건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소문이 퍼졌으니 그저 앞길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만약 이진구가 표영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혹은 새로 발령받은 지역으로 속히 떠나 버렸다면, 거지 하나쯤 들어오는 것이 어떠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더라면 그의 삶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것도 개방 방주인 표영을 말이다.
어쩌면 그가 방주를 죽이려 했으니 당연한 형벌을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진구는 속히 온초방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이진구에게 집중된 터라 곧 그가 온초방을 나섰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파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이제껏 이진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동굴 참상을 목격한 무림인들은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유명인이 돼버린 이진구를 보기 위해 모여든 온초방 주변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 디딜 틈도 없는 가히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난 아직 얼굴조차 모르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것 있지.”
“나도 정말 보고 싶어. 기적의 생환자이자 박쥐의 제왕, 때만두의 신화를 이룬 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천명(天命)이라는 게 있긴 있나 봐. 어떤 사람은 길 가다가도 어이없이 죽기도 하는데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나기도 하니 말이야.”
이진구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였다.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같을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당시 이진구의 동굴 참상을 목격한 무림인들이 한데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죽지 않았나보군. 킬킬킬… 나 같으면 진작 자살하고 말았다.”
“이진구는 이제 걸인지존이 되었으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은 훤히 뚫린 셈이군. 거지 생활만큼은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나.”
“암, 그렇고말고. 이 세상에 그가 먹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나. 이미 먹는 것에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고 봐야겠지. 앞으로 개방 방주가 될 사람은 이진구밖엔 없다니까.”
“하하하, 하여튼 기구한 운명이야. 사람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어찌 이진구가 그런 지경에 처할 줄 알았겠나.”
왁자지껄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개방에서 이진구를 데려가기 위해 도착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인파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뭐라고 해야 할지… 참나, 이렇게 되면 마차라도 하나 있어야겠군.”
드디어 정오가 지나 이진구가 나오는 시간에 이르게 되었고 온초방의 정문에는 작은 마차가 준비되었다. 모인 무리 중 눈이 빠른 자가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나온다, 나와. 저기 봐, 저기.”
이진구가 개방 당주들의 부축을 받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술렁이더니 일제히 일어서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함성.
“와! 걸인지존 만세.”
“와와… 와와……!”
“걸인지존∼ 사랑해요∼!”
대단한 인기였다. 개중엔 평범한 모습에 실망한 사람도 있었다.
“그저 그렇게 생겼네 뭐.”
아마도 괴물 같은 형상을 떠올렸으리라. 그런 와중에 싸우는 무리도 있었다.
“야, 새끼야! 앞에 안 보이잖아. 좀 비켜봐!”
“자리를 똑바로 잡았으면 됐잖아. 이 쌍놈의 자식아. 언제 봤다고 새끼라고 하는 거냐!”
“그럼 니가 새끼지 어른이냐, 쌍놈의 자식! 너, 몇 살 먹었어?”
“너보단 많이 먹었어. 호로 자식아.”
“야, 새끼들아! 싸우려거든 다른 데 가서 싸워. 이 개자식들아!”
“넌 또 뭐야, 썅∼”
이진구를 보려고 새벽같이 온 그들이었기에 조금 가려져 안 보이게 되자 서로 치고 받고 난리가 아니었다. 어느덧 마차에 오른 이진구는 이런 여러 가지 함성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해 호흡하기조차 곤란할 지경이었다.
‘흑흑흑… 내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흑흑흑.’
그는 마차 안에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고, 그런 가운데서도 밖에서는 이진구를 향한 수많은 찬사와 조롱이 이어졌다. 급기야 이진구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개방에서는 그 뒤를 따르지 못하도록 급히 가로막았다. 추세로 보건대 막지 않는다면 한없이 따라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차는 이진구의 처소가 아닌 반대쪽으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이진구가 거하게 된 곳은 운백산(雲伯山) 중턱에 자리한 개방의 비밀 처소 중 하나인 타봉루였다.
타봉루는 각 분타마다 하나씩 두었는데 분타 내의 지도자들이 모여 집회를 여는 곳으로 일반 개방인들 중에서도 존재 여부를 아는 자가 드물 정도로 은밀한 곳이었다. 분타주 묵백으로서는 이곳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의 눈길과 호기심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판단한 것이다.
이진구는 타봉루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안식(安息)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히 혼란스런 정신 상태인지라 그는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시중을 드는 개방 제자들만 식사를 전달할 때 들어오게끔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어지러움 속에 침상 위에서 뒤척일 때였다.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가만히 문이 열렸다.
방금 전에 식사를 끝낸 이진구의 안색이 급변했다. 식사를 가지고 올 때도 인기척을 내라고 일렀으며 긴급한 일을 전할 때도 반드시 문밖에서 어떤 연유인지 말하고 들어오라 했던 터였다.
‘이 새끼들이 날 물로 보나.’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침상 옆에 있는 탁자 위의 술잔을 잡고 방문을 향해 던졌다.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느냐?”
와장창.
술잔이 문에 맞아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무공을 잃어버린 그로서는 자신의 말이 무시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와장창 소리가 난 뒤 문이 완전히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는데 어찌나 환한 미소이던지 누가 보더라도 마음이 밝아질 것만 같았다.
때려죽일 듯 노려보던 이진구는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헛바람을 들이키며 침상에서 구르듯이 내려왔다.
“헉! 수, 숙부님!”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이진구의 숙부 이요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