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
표영이 거의 백여 개가 넘는 회선환을 만들었을 때 바깥에서 조심스런 음성이 들렸다.
“두목님! 늑대가 도착했습니다요.”
어느덧 표영은 두목으로 칭호되고 있었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표영은 만든 회선환 중에 하나를 들고 싱글벙글한 얼굴로 산적들에게 향했다. 산적들은 그때까지도 각자 지은 시를 읊고 있었고 그 앞에 늑대 한 마리가 네 다리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드러누워 낑낑대고 있었다. 표영이 가까이 이르자 시를 읊던 산적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변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이 시를 바칩니다!”
표영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한낱 새조차도 집이 있고 미련한 곰도 굴이 있어 드나든다.
미물의 본성이 이러하건만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던가.
길 잃은 송아지마냥 정처없이 떠돌기만 했구나.
내 고향 그곳에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생각하시겠지.
이제 와 후회하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다.
나에겐 돌아갈 곳이 있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던가.
과거와 지금은 불효자가 되었으나
이제 나는 천하에 이름을 떨칠 효자가 되리라.
산적치고는 그럴싸한 내용이었다. 시를 들은 표영은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계시겠지? 형은 돌아왔을까? 나는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까.’
집을 떠나온 지를 꼽아보니 어느새 4년이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사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개방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가도록 하자.’
표영은 상념을 떨쳐 내고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자, 너희들이 쓴 시를 잊지 말고 평생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두목님.”
“허허… 참…….”
두목이라는 말이 낯선 표영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자, 늑대를 풀어라.”
미효문과 노강이 밧줄을 풀자 늑대는 사나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표영의 눈빛과 마주치기가 무섭게 언제 이를 드러냈냐는 듯 쏙 감추고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어느새 표영이 흉악육식으로 갈고 닦은 눈빛을 뿜어낸 까닭이었다. 호랑이나 곰조차 두려워할 눈빛에 늑대가 쫄아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늑대를 잡으러 갔던 미효문과 노강, 그리고 백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놈을 생포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어쩌나 포악한 놈인지 미효문의 허벅지가 긁히기까지 하고 잡아온 터였다. 그런데 이제 눈빛 한 방에 순한 개같이 변해 버린 것이다.
‘허허, 요즘 늑대들은 무림고수를 알아보나? 거참.’
표영이 늑대에게 다가가 늑대의 머리통을 오른손으로 톡톡 치고 왼손으로는 작고 새까만 회선환(回善丸)을 들어 보이며 산적들에게 말했다.
“늑대에게 먼저 시범을 보이도록 하겠다. 여기 이건 회선환(回善丸)이라고 하는 독약이다. 내가 조정하기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함부로 해독할 수 없는 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자, 일단 이것을 먹이도록 하겠다.”
표영은 잔뜩 겁먹은 늑대의 입을 벌리고 회선환을 집어넣었다. 늑대는 견왕의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텁텁한 맛의 회선환을 꿀꺽 하고 삼켰다.
“이 늑대는 내 회선환을 먹었다. 이번에 먹인 것은 즉시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잠시 후 늑대는 죽게 될 것이다.”
산적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자꾸 독약 이야기를 하는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부정했다.
‘설마 저것을 우리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아닐 거야. 그럼. 저분은 착한 분인 것 같지 않더냐. 우리를 한 대도 패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거라구.’
‘근데 정말 늑대가 죽긴 죽는 걸까?’
“자, 늑대의 상태를 한번 볼까?”
표영은 늑대의 입을 벌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는 척하다가 검지 끝을 통해 몸 안에 내재된 오극전갈의 독을 미세하게 발출했다. 아주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늑대는 순식간에 ‘커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경직되더니 옆으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바르르 떠는 것조차 없었다. 그냥 죽어버린 것이다. 오극전갈의 독의 위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시전한 표영조차도 나타난 현상에 놀랄 지경이었다.
‘정말 함부로 사용할 게 못 되는구나.’
표영이 놀랄 지경이었으니 산적들의 놀라움은 어떠했겠는가. 모두의 얼굴은 백색 분가루를 바르기라도 한 듯 새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절하게 했던 것에서 느꼈던 두려움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잘 봤겠지. 회선단의 위력은 막강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곧바로 죽기도 하고 1년, 혹은 십 년까지 생명을 유지하게도 한다. 그중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먹일 회선단은 바로 10년 후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하는 말에 산적들은 난리가 아니었다. 절반은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엄마∼’를 외쳤고 거의 나머지 절반은 표영에게 달려들어 바짓자락을 붙들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엉엉… 엄마∼ 엄마∼”
“흐흐흑… 이대로 죽을 순 없습니다요. 흑흑.”
“잘못했습니다요. 잘못했습니다요. 앞으론 절대 나쁜 짓 안하겠습니다요. 엉엉.”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원래 저는 산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두목님, 살려주세요.”
“왜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어엉… 어엉…….”
삽시간에 울음바다로 변해 버리자 표영은 짐짓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울음을 그치고 내 몸에서 떨어지지 못해! 셋 셀 동안 소리가 나면 모두 저승으로 보내주겠다. 하나… 둘… 셋…….”
다시 거짓말같이 고요가 찾아들었다. 하지만 산적들은 소리만 내지 않을 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너희들이 먹을 회선환(回善丸)은 늑대가 먹은 것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회선이라는 말 그대로 너희의 성품이 선(善)한 길로 접어들면 저절로 해독이 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전히 악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중도에라도 발작을 일으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악한 마음을 품게 되면 몸속에서 그 기운이 독을 자극해서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더 이상 이 문제로 토를 달지 말도록. 자, 일렬로 줄을 서서 따라와라.”
산적들은 이제껏 산전수전 다 겪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선하게 살면 해독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산적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길,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제 독약을 먹고 죽어야 할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냥 몽둥이로 패 죽였어도 우린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원래 독약은 만들기가 쉽지 않아 극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우리에게 회선환을 먹이려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적들이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을 때 표영은 성큼성큼 걸어가 회선환을 만들어 놓은 곳으로 향했다. 산적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축 처진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표영은 회선환을 집어 들고 제일 첫 번째에 선 양축에게 말했다.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알겠느냐? 자, 받아라.”
양축은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정말이지 이거 안 먹으면 안 될까요?”
“내가 먹여주랴?”
“아닙니다요, 제가 먹겠습니다요. 근데 이거 물 없이 그냥 먹어도 되나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볼 양이었다.
“뒈질래?”
“흑흑흑…….”
양축은 어쩔 수 없이 회선환을 입에 넣고 느린 동작으로 서서히 씹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정말 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그적 우그적.
이 회선환은 과연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회선환의 재료는 한 가지였다. 그건 바로 표영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때였다. 여기엔 독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때로만 이루어졌다. 웃통을 벗은 채 만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음, 좋아. 잘하고 있어. 조금 텁텁할 거야. 그래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니 너무 겁먹진 마라.”
양축은 입 안이 끈적끈적한 게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꿀떡꿀떡 삼키고 싶었지만 치아 사이사이에 끼는지라 빼 먹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남기면 곤란해.”
“흑흑… 알았습니다요.”
눈물을 머금고 양축이 회선환을 복용한 후에 뒤를 이어 순서대로 먹게 되었다. 산적 중에 담력이 약한 녀석은 먹고 난 후 충격을 받고 혼절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도저히 먹을 수 없다며 발버둥치다가 강제로 먹은 후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실없이 웃기도 했다. 개중엔 자기 것이 다른 사람들 것보다 더 크다며 바꿔달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표영이 때를 비벼 만들 때 어떤 것은 더 많이 들어간 것도 있었던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고 끝내 모든 산적들이 회선환을 먹어치웠다. 표영으로서는 그동안 애지중지하게 모아두었던 때들의 손실이긴 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자, 이제 어서들 짐을 챙겨 각자 고향으로 떠나라. 그리고 사로잡은 이들은 모두 풀어주고 그들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노잣돈을 챙겨주도록. 알겠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모든 산적들은 얼빠진 사람마냥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거렷다. 좋다. 회선환을 하나씩 더 복용토록 해주마.”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부랴부랴 일어나 손을 저으며 말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자, 자, 서두르자.”
산적들은 침통한 가운데서도 바쁘게 움직이며 짐을 챙기는 한편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어느덧 등에 짐 보따리를 짊어진 산적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표영에게로 와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요. 근데 정말 말씀하신 것 확실한 거죠?”
표영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산적들은 약간은 침통한 뒷모습을 보이며 하나둘 표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떠난 뒤 텅 빈 산채에는 표영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좋아. 이제 본격적으로 거지의 삶을 살아볼까! 하하하!”
만족스런 웃음을 날리며 표영도 산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