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던 산적들은 어이없는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곤 실실거리다가 급기야 언제 긴장했냐는 듯 깔깔대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푸하하하! 거지라니.”
“역시 거지새끼였구먼.”
“야, 새끼야! 괜히 긴장했잖아!”
“짜식, 되게 웃기네.”
최고두령 양축마저도 긴장이 풀리며 실실거렸다.
‘허허,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군. 뭐든지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하면 괜히 일이 꼬이게 되는 법이지. 저놈은 그냥 거지라고 하지 않는가.’
산적들 앞에서 태연히 거지라고 말한 이는 그럼 과연 누구인가. 당연히 표영이었다. 조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칠마단의 본거지로 달려온 것이었다. 모두들 웃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표영이 가만히 뒷짐을 지고 발길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역시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또렷하게 귓가에 파고드는지라 산적들의 웃음이 잦아들었고 모두는 귀를 기울였다. 표영이 천음조화를 운용해 음성을 발한 탓이었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너희가 그때 나를 만났다면 너희들의 다리 하나씩을 부러뜨린 후에 말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각성(覺醒)을 이루었고 기분도 좋으니 특별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너무나 광오한 말에 산적들은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대체 자신들의 숫자가 몇 명인가 말이다. 좀 깎아준다고 해도 100대 1이 아닌가. 게다가 일곱 두령들이 한 명도 외부로 출타하지 않은 채 모여 있는 상황이다. 헌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말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한단 말인가. 그들의 생각이야 어찌 됐든 표영은 말을 계속했다.
“똑똑히 들어라. 앞으로 이곳은 폐쇄한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간단히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고향에 가거든 그동안 못다 한 효를 행하며 속죄하며 살아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음, 오순도순 살아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표영의 말이 끝나자 산적들은 드디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산적들은 왜 자신들이 지금까지 꼬박꼬박 말을 들어주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채 광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죽어라, 임마∼!”
“간다!”
“거지면 다냐! 거지라고 우리가 봐줄 것 같으냐!”
“나는 봐주겠다. 거지 놈의 면상을 봐버릴 테다!”
온갖 함성을 내지르며 두령부터 말단 부하들까지 깡그리 몰려들었다. 표영은 ‘풋!’ 하고 웃으며 뒷짐을 풀지 않은 채 풍운보(風雲步)를 시전했다.
산적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때려죽이겠다며 달려들어 저어댔다. 어지러운 광경이 펄쳐지고 부옇게 먼지가 일어나는 가운데 표영은 100여 명의 산적들 사이사이를 바람처럼 누볐다. 비록 좁은 틈바구니였지만 이들의 무공 수준은 저급하기 이를 데 없어 피하는 것은 어려울 게 없었다.
마치 이 장면은 멀리서 보노라면 산보를 나온 사람이 자연을 구경하며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저기 눈을 돌리고 주위를 구경하면서 표영은 도(刀)와 검(劍), 사슬 등 각종 무기와 주먹과 발길질을 피했다. 잠시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으악! 내 코야. 어떤 새끼야!”
“크웩! 왜 날 때리시는 거예요. 두목님.”
“어? 어… 그래, 미안하다.”
“야, 새끼야! 칼을 어디다가 들이미는 거야. 배에 구멍날 뻔했잖아!”
“으어억……!”
“사람 살려∼”
“허춘, 이 새끼야, 왜 날 죽이려드는 거냐. 죽고 싶으냐!”
“널 찌르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래도 새끼야. 죽을 뻔했잖아. 너도 맛 좀 봐라!”
우르르 몰려 표영 하나를 잡겠다고 무기를 휘둘러 대다 보니 정작 목표물은 번번이 놓치고 자기 편을 공격하는 꼴이 돼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떤 경우는 표영을 공격하는 것엔 관심이 없고 서로 치고 받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희롱당하면서도 산적들은 깡이 있었다. 여전히 미친놈들처럼 휘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미 이때는 벌써 100여 명 중에 50명이 부상을 당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 몸을 치료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거의 반 시진(약 1시간)이 지났을 때 산적들은 급기야 탈진해 그 자리에서 끝내 모두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공터엔 백여 명이 패잔병처럼 드러누워 씩씩대고 있었고 유일하게 서 있는 사람은 표영 혼자뿐이었다. 표영은 씨익 웃으면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땀을 손으로 찍어냈다.
‘땀이 났군. 아직은 너무 부족해.’
부족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최고에 대한 부족함이었을 뿐 첫 무공 운용치고는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산적들은 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나쁜 머리를 굴리며 방금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았다. 한 대도 맞추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게다가 상대는 전혀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거지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했다면 아까 말한 대로 다리 한쪽이 문제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최고두목 양축도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씨이∼ 이젠 죽었군.’
모두들 헐떡거림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듯싶자 표영이 산적들이 쓰러져 있는 곳에서 벗어나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 쪽으로 향했다.
“나무야, 너에겐 미안하다만 사람의 발을 부러뜨리는 것보다는 네가 희생하는 것이 더 낫겠지?”
나무는 덩치 큰 어른의 몸통만한 굵기를 지녔다. 산적들은 느닷없이 거지가 나무를 보고 말을 걸자 괴이함을 떨치지 못하고 누운 채 주시했다.
‘저 새끼, 뭘 하려고 저러나.’
‘혹시 미친놈 아닐까? 나무하고 말을 하네.’
‘이씨∼ 어쨌든 잘못 걸렸어.’
표영은 나무 앞에 서 있다가 몸을 두 번 회전시키더니 뒤돌려 차는 수법으로 기로 나무를 걷어찼다. 각법인 회구각(回狗脚)이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뻗어 나간 발길질을 얻어맞은 나무는 ‘우지끈’ 소리와 함께 허리가 동강나 버렸다.
“허걱!”
“뭐, 뭐냐.”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지?”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가 쓰러질 때 산적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표영은 뒤돌아서서 조용한 음색으로 말했다.
“자, 앞으로 다섯을 세겠다. 그 안에 앞쪽으로 10줄을 맞추고 그 뒤로 반듯하게 정렬하도록 한다. 하나, 둘, 셋…….”
다섯은 물론이고 넷까지 셀 필요도 없었다. 번개의 빠름이 이 정도일까. 산적들은 후닥닥 뛰어와 알아서 구령을 붙이고 열 줄을 맞춘 후 그 뒤로 정렬했다 그중 최고두목 양축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며 줄 맞추라고 난리였다.
“야, 새끼야! 너, 구파영! 줄 똑바로 못 맞춰! 내가 그렇게밖에 교육 못 시켰어? 저걸 그냥!”
연신 고함을 질러대는 양축에게 표영이 다가오더니 타구봉을 꺼내 그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너.”
“네?”
“너나 조용히 해.”
“네? 아, 네……. 알겠습니다요. 헤헤헤.”
모든 산적들은 이제껏 두목이 헤헤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호탕했으며 사내다움을 강조했던 두목이 아니던가. 그들은 한 인간이 거대한 힘 앞에서 얼마나 빨리 변하고 망가질 수 있는가를 실감했다.
표영이 헛기침을 하고 뇌까렸다.
“세 가지 길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겠다. 잘 들어라. 첫째,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은 후 고향으로 직행한다. 둘째, 실컷 얻어터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셋째, 여기서 그냥 뼈를 묻는다. 자, 이중에 세 번째를 택할 사람 있으면 손 들도록.”
산적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자칫 숨이라도 크게 쉴라치면 오해해서 죽여 버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좋아. 그럼 두 번째를 택할 사람?”
여전히 고요함이 주변을 장악했다.
“그럼 모두 첫 번째를 택하겠다는 것이냐?”
표영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산적이 대답했다.
“네∼!”
서당에서 훈장님의 말씀에 대답하는 어린 서생들이나 보여 줄 수 있는 일체감을 산적들은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후후, 의외로 순진한 녀석들이군. 맘에 들었다.”
표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너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 일이란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거든. 지금은 내 앞이라 고분고분하는 척하지만 뒤돌아서면 언제 딴 짓을 할지도 모르잖느냐.”
두목 양축이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저희를 믿으십시오! 사내대장부로서 어찌 두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음… 사내대장부라… 좋은 말이지. 그런데 그런 사내대장부가 산적질을 일삼고 있었다 이거렷다. 아주 훌륭한 사내대장부로군. 그렇지 않아?”
양축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네가 사내대장부라면 나랑 한판 붙어보겠느냐?”
그러자 양축이 손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아하하… 아하하……. 저 사실은 사내대장부 아닙니다요. 진짜라구요. 저 진짜 별것 아니에요. 애송이에 불과합니다요. 헤헤헤…….”
그런 두목의 급변에 부하 산적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오늘 아침까지 두목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우리는 사내대장부다. 그렇지 않느냐! 남자답게 호탕하게 오늘 하루를 시작하자. 으하하하!”
하지만 곧 이어 모든 산적들 또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표영의 말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 사내대장부가 또 있나?”
모든 산적들은 혹시 오해를 받을까 손을 휘저으며 난리가 아니었다.
“전 아닙니다.”
“그냥 수놈일 뿐입니다!”
“사내대장부를 접은 지 오래되었습니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사내대장부하고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부인하는 말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이런 말까지 나왔다.
“저는 원래 여자였습니다요.”
표영은 기가 막힌 듯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하하하, 아주 웃기는 놈들이군. 이놈들하고 함께 지내면 심심하진 않겠는걸.’
하지만 겉으로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후에 물었다.
“혹시 이곳에 개를 키우고 있나?”
그 말에 양축이 냉큼 대답했다.
“헤헤, 개는 없습니다요. 전에 한 마리 있었는데 여름에 보신을 하느라고… 배가 고프신 겁니까요? 먹을 것은 많이 있습니다요. 제가 또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지라… 한요리 합죠.”
“살아 있는 놈이라야 한다. 음… 개가 없다면 산에서 늑대라도 한 마리 잡아와야겠군.”
표영은 앞줄에 앉은 산적들 중 무작위로 세 명을 지목했다.
“너! 너! 너! 너희들은 반 시진 안으로 늑대 한 마리를 잡아오도록 한다.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알겠나?”
앞줄의 세 명은 이 두령 미효문과 오 두령 노강, 그리고 칠 두령 백충이었다.
“네. 한 마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속히 갔다 오도록.”
세 명은 발에 불이라도 붙은 듯 달려갔다. 그들의 모습에 흐뭇함을 느끼고 표영은 남은 시간 동안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 모든 산적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기 남아 있는 너희들은 늑대를 잡아올 동안 고향을 생각하며 시(詩) 한 편씩을 짓도록 한다. 시의 내용은 고향과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다. 만약 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 발견되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표영은 산적들의 마음을 다그치기 위해서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번 나무는 아까 허리가 두 동강난 나무보다는 작은 것이었다. 산적들은 또 나무를 부러뜨리려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졸이며 바라보았다.
“잘 봐라. 나무가 인사하는 것을 보여주겠다. 고향에 가거든 이렇게 부모님께 절을 드려야 할 것이다.”
표영은 타구봉법의 인(引)자결을 이용해 나무 앞쪽에서 타구봉을 끌어당겼다. 봉은 나무에 닿지도 않은 상태였다. 놀랍게도 굵은 나무 기둥은 활처럼 표영 쪽으로 굽어졌다. 거기서 다시 전(轉)자결을 이용해 봉을 한 바퀴 회전시킨 후 쭉 밀었다. 그러자 나무는 한차례 휘청하더니만 반대 방향으로 출렁하고 젖혀졌다. 나무의 제일 위쪽이 땅에 닿아 있는 채로 꽉 구부러진 형상이 된 것이다.
표영이 봉을 한차례 떨치자 나무는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산적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무가 절을 한다길래 무슨 소린가 했는데 정말로 꾸벅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전혀 나무에 손이나 봉을 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그들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모두는 자칫 까불다간 허리가 저렇게 역으로 휘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황망히 놀라고 있던 중 최고두령 양축이 황급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다그쳤다.
“자, 어서 시(詩)를 쓰자!”
그 말에 산적들은 서둘러 일정한 간격을 벌리고 손으로 땅바닥에 글자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훌륭하다. 다 쓰거든 돌아가면서 이쪽 끝에서부터 낭독하도록. 나는 잠시 안에 들어가서 준비할 것이 있으니 열심히들 해야 한다.”
표영의 말에 모든 산적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편히 쉬십시오. 두목님.”
처음에 등장할 때의 거지새끼라는 호칭에서 두목이란 호칭으로 삽시간에 승격되어 버린 것이다. 산적들은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힌지라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마냥 시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껏 머리에 털 나고 한 번도 시를 써보지 않았던 산적들에겐 이보다 더한 고문이 없었지만 맞아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표영은 산적들의 부지런한 모습을 뒤로하고 두목의 거처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웃통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늑대를 잡아올 동안 약을 만들어볼까. 하하하.”
표영은 자신이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힌 방법이라 기분이 좋아져 껄껄거렸다.
“알약을 만드니만큼 멋진 이름을 지어야겠다. 음, 뭐가 좋을까. 나쁜 녀석들을 선하게 되돌리는 것이니 회선환(回善丸)이라 해야겠구나. 회선환. 하하, 좋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