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9장 (3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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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3장 고진의 이야기

엽지혼은 제자의 가히 놀랄 만한 성취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비록 절반의 성취만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이룬 기간을 미루어보았을 때 나머지 5할을 이룸은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빠른 성취에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으니 그것은 요 근래 더욱 심화된 심마에 대한 우려였다.

“영아, 너는 아직까지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냐?”

“…….”

표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공을 수련하면서부터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졌는데 지금은 그 정도가 심해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개방의 무공은 그저 손과 발을 놀림이 아니라 마음과 몸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그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사부에 대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엽지혼으로서는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사람은 태어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나와 그리고 나 이전의 세대, 그보다 먼 오래전부터 계속된 일로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과거 진의 시황제는 자신의 권세(權勢)와 영화(榮華)를 영원토록 누리기 위해 죽음을 벗어나려 했으나 천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했던 그도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만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또 죽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에선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내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

엽지혼은 조용한 음색으로 다독거리듯이 말을 이어갔다.

“…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하늘은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란 바로 너다. 이제껏 나는 충분히 살았다.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았다. 아침에 찬연히 솟아오르는 햇살의 아름다움도, 산천의 풍요로움도, 바다의 장중함도 보았다. 그리고 이제 저물어가는 서쪽 하늘의 황혼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내 삶을 정리하면 된다. 지금에 있어 미련은 없다. 물론 네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많은 미련을 간직한 채 아쉬움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을 테지. 그런데… 나의 희망인 네놈은 바보같이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다. 정녕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게 만들려고 하는 수작인 게지. 나는 네가 무공을 훌륭히 익혀 세상을 이롭게 하길 바라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잠시 말을 멈춘 엽지혼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놈은 그 마지막 소망마저 부숴 버리려고 하고 있다. 연약한 마음으로 심마(心魔)에 사로잡히는 게 정녕 네놈의 원하는 바더냐? 어떠냐, 너는 심마에 사로잡혀 주화입마를 당하고 나는 속병을 앓고 빨리 죽으면 되겠느냐. 어서 대답해 보거라, 이놈아.”

마지막 말은 짐짓 성낸 듯한 말투였지만 그 속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건 표영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숨에 우울해진 마음을 떨쳐 내지는 못했다. 엽지혼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못난 놈 같으니라구.”

지금까지의 무공 성취만 보자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면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구도자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의 마음이다. 엽지혼은 그저 마음이 답답하여 다시 긴 한숨을 토했다. 표영은 땅이 꺼질 듯한 탄식 소리에 죄송한 마음이 일어 머리를 숙였다.

“제자 어리석은 마음으로 사부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엽지혼은 그런 점잖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을 날려 머리통을 갈기며 쏴붙였다.

“이런, 바보 같으니…….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 바른 말을 했더란 말이냐. 고작 경공을 조금 터득했기로서니 성인군자라도 되었단 말이더냐. 난 성인군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럴 거면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10년 전에 먹은 만둣국이 넘어올 것 같구나.”

표영은 사부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어색한 웃음이 되어 나타날 뿐이었다.

“허허, 녀석.”

엽지혼은 오늘 마음에 응어리를 풀어주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제자의 몸에 나타날지 모르는지라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이듯 마땅히 사부에게도 부모를 대함과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효를 예를 들어 말해 주마. 효(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행하는 효가 있고, 또 하나는 부모가 기뻐하는 효가 있다. 이 중 참된 효는 무엇이겠느냐? 과거 효자로 이름난 사람 중에 고진(孤眞)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진은 부모를 섬김이 지극해 그 소문이 온 사방에 자자했다. 그 소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한 소문을 들은 사람 중에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조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경은 자신은 나름대로 효를 행한다고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기뻐하시지 않자 의문을 품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고진이라는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대체 그는 어떻게 하기에 그토록 효행이 깊다고 이름이 높은지 궁금해졌다. 조경은 고진이라는 효자가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보고자 몰래 살펴보기로 했다. 조경이 몰래 숨어 지켜볼 때 고진이라는 효자가 나뭇짐을 가득 해오더니 마당에 지게를 내려놓는 게 보였다. 그 소리가 들렀음인지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나이 든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온 소리를 듣고 기쁜 얼굴로 아들을 반겼다. 나이 든 어머니는 물동이에 물을 떠오더니 마루 쪽으로 아들의 손을 이끌고선 아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겨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진이라는 효자의 행동이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거리낌 없이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몰래 훔쳐보던 조경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제까지 효자라고 소문난 것은 모두 헛된 이름뿐이었구나!’하며 탄식한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두 모자가 뭐가 그리 좋은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는 돌아서려다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가 하고 이야기만 듣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대화의 내용은 이런 말들이었다. ‘어머니, 오늘은 나무를 하러갔는데 뱀을 보았지 뭡니까?’, ‘뭐라고? 뱀을 보았다니……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그 뱀이라는 녀석이 저를 물기라도 할 듯이 혀를 내밀며 다가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큰 소리로 말했죠. ‘에끼, 이놈아. 우리 어머니께서 어떤 분이신 줄 아느냐. 너 같은 뱀 천 마리 정도는 거뜬히 잡아다 회를 뜰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다. 그런 분의 아들인 나를 감히 네가 해치려 하다니,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랬더니 글쎄 그 뱀이라는 녀석이 잔뜩 겁을 먹지 뭐겠어요. 그리고선 녀석은 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저에게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훌륭하신 어머니를 두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선 돌아가는 거예요. 하하하’, ‘하하하, 이 녀석 알고 보니 늙은 어미를 놀린 게로구나’. 어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하고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듣고 있던 조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때 문득 깨달음이 일었고 눈을 들어 두 모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눈에 아까까지 불효막심해 보이던 고진이 태산처럼 크게 보이게 되었다.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정한 효는 자신이 ‘이렇게 이렇게’ 부모님께 잘했다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부모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했을 때 비로소 참된 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이제껏 자신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좋은 옷을 입혀드리는 것, 용돈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경은 크게 깨우침을 얻음과 함께 부끄러움도 느꼈지. 그리고 고진이라는 효자의 집을 향해 큰절을 올리며 속으로 말했다. ‘이 세상 어떤 학문보다도 더 큰 가르침을 오늘 받고 갑니다’ 그가 절을 올린 것은 깨달음에 대한 더 없는 감사의 표시였다. 그 훗날 조경은 온 주변에 효자로 소문이 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

긴 엽지혼의 말을 듣고 표영은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깊이 생각에 잠기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엽지혼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나를 염려하고 있다만 그것은 사실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뿐이다. 알겠느냐?”

표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환해졌다. 무상함에 젖어 우울하기만 했던 마음이 풀리고 얽히고 설킨 내면의 갈등이 한 가닥 한 가닥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네, 사부님.”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갑자기 헤헤거리기가 민망해진 표영은 얼굴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모습에 엽지혼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웃었다.

“에라이, 이 덜떨어진 녀석아. 하하하.”

“하하하.”

경공 수련이 마쳐진 후 이어진 것은 권법과 장법 수련이었다. 권법은 파옥권과 취팔선권이 있었으며 장법에는 강룡십팔장이 있었다. 권법과 장법을 익히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 바탕을 이룸이 모두 보법의 움직임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옥권을 시전함에 있어서는 풍운보가 기본이 되었으며 취팔선권은 걸인만취와 어우러져 펄쳐졌다. 또한 강룡십팔장은 낙엽부영과 함께했을 때 그 힘이 배가되었다. 파옥권과 취팔선권은 권법이면서도 묵직한 움직임 대신 간결하고 표홀한 움직임이 특징이었고 강룡십팔장은 강맹한 힘이 주를 이루었다.

엽지혼은 파옥권과 강룡십팔장 등에 대해 그 요체를 설명해 주었다.

“파옥권은 옥을 깨뜨리는 주먹이라는 뜻이다. 옥은 고귀함을 나타내는 바 그러한 옥을 깨뜨린다는 말은 고귀함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는 간교한 위선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겉모습만 보고 옥의 화려함을 두른 채 그 내면을 갖추지 못했다 할 수 있다. 너는 걸인으로서 사사로움에 매이지 않는 눈을 가지도록 하고 위선자와 진정 고귀한 자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악을 깊이 갈무리하고 있는 자들은 더욱더 완벽하게 자신을 포장하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고귀한 자들은 도리어 소탈한 삶을 원한다. 그런 이치는 자연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 극독을 품고 있는 독버섯은 그 빛깔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뱀 중에서도 유난히 알록달록한 것들은 맹독을 지닌 것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 좋은 버섯이나 산삼 등은 그 모양이 어떠하냐, 되려 평범하고 소박하여 자칫 지나치기 쉽지 않더냐? 너는 단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됨이 없이 하고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보는 눈이 높아질수록 파옥권의 힘도 점점 상승하게 될 것이다.”

“강룡십팔장은 강맹함을 주로 하는 바 그 힘의 근원은 순수함에 있다. 바다를 생각해 보렴. 바다의 힘은 어떠하냐, 그 힘과 견줄 만한 것을 찾기란 매우 힘들지 않더냐. 하지만 바다는 파괴력만 가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바다는 강과 내에서 흘러 들어오는 여러 가지 더러운 것과 불순물들까지라도 다 수용한 후 그것을 정화시킨다. 그리곤 아무런 불만과 불평도 없지. 그처럼 순수함과 포용력을 지녔을 때 진정한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순수함 속에서만이 강맹한 힘은 발생할 수 있다. 너는 항상 마음을 정갈케 하고 바다 같은 포용력과 순수함을 가지도록 해라. 그럼으로써 강룡십팔장의 진정한 위력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단 표영은 파옥권에 대한 요체를 얻기 위해서 산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련에 힘썼다. 여러 가지 꽃과 버섯, 그리고 독을 지닌 식물과 뱀들을 살폈다. 그러면서 사부의 가르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의 몸에 좋고 영양이 풍부한 것들은 모두 하나같이 수수함과 소탈한 모양을 지녔음을 보았다. 그러나 해로운 것들은 거짓된 꾸밈으로 화려한 채색을 두르고 있었으나 그 속엔 유혹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작은 깨달음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매우 큰 것이어서 표영에게 걸인의 삶에 대한 긍지와 묘한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표영이 산을 뒤지며 살핀 지 오 일이 되었을 때였다. 산책하듯 여러 사물과 풍경을 살피는 중 어느 한 부분에 이르자 기묘한 느낌이 몸에 전달되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생명력을 발산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허나 그곳엔 마치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듯 전혀 생기발랄한 모습은 느낄 수 없었다.

‘이상한걸,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마 파옥권에 대한 깨우침을 얻기 전이라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것은 미세했다. 하지만 요사이 정(正)과 사(邪)의 형상을 살피며 점점 감각이 깨어가고 있던 터라 그 부조화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화려함 속에 흑백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듯해 죽은 시체를 보는 것 같은걸.’

느낌이 섬뜩했지만 그와 더불어 호기심도 크게 일었다. 기척을 줄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니 가까이 갈수록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어느 정도 이르자 풀숲 속에 작은 흙 밭이 보였는데 흙이 여느 흙과는 달리 푸석푸석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조그만 구멍이 있었다. 죽은 듯한 기운은 저 구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표영의 감각이 알려왔다.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건가?’

혹시 괴상한 괴물일지도 모르는지라 표영은 얼른 도망갈 준비를 갖춘 후 주시했다. 일 식경(30분)정도가 지났을까. 구멍에서 괴이하게 생긴 것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모양은 표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전체적인 형상이 새우와 비슷하게 보였지만 그보다 더 정교하고 딱딱해 보였다. 네 개의 다리로 땅을 딛고 있었으며 땅에 닿지 않는 또 다른 여섯 개 정도 되는 발이 옆으로 나 있었다. 그리고 꼬리도 있어 마치 침처럼 생겼는데 등 쪽으로 길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건 등판의 색깔이었다. 등에 난 다섯 마디의 판마다 각기 다른 다섯 가지 색깔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황색, 청색, 적색, 백색, 녹색으로 어우러진 것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제까지 죽은 듯 보였던 이곳의 환경은 저놈 때문이로구나. 저토록 화려하니 얼마나 대단한 맹독을 지니고 있을까. 괜히 화를 당하기 전에 떠나도록 하자.’

밤이 되어 엽지혼은 표영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섯 가지 색을 몸에 지니고 있었더란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주변이 죽어 있는 듯 생기를 띠지 않고 있어서 가까이 가봤더니 그 괴상한 놈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그 근방은 마치 한 꺼풀 어두운 그림자가 덧씌어진 것 같더라니까요.”

“음… 네가 본 것은 전갈이라는 놈이다. 그것도 보통 놈이 아닌 오극전갈이라는 놈이지. 허허, 그런 놈이 이리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엽지혼도 오극전갈에 대해서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한 터였다. 단지 어릴 적 사부로부터 독물에 대해 배울 때 잠깐 들어보았을 뿐이었다.

“사부님,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렇다.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무서운 독물이야. 분명 네가 주변을 그리 인식한 것은 오극전갈이 주변의 지기(地氣)를 모두 흡수하고 있는 까닭일 게다. 그러니 자연 그 주변이 생기가 없어진 게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문득 엽지혼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그런 자연적인 조화를 느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구나. 허허, 녀석.’

“그놈이 그렇게 대단하면 우리가 가서 잡을까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제자의 말에 엽지혼은 허탈한 웃음을 날렸다.

“허허허… 이놈아, 그놈이 너 같은 녀석에게 ‘잡숴주십시오’ 하고 목을 내밀 것 같으냐? 침 한 방에 네놈의 몸이 녹아버릴 것이다.”

“허걱!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

“앞으로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아라, 알겠지?”

그러나 사실 엽지혼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표영이 이미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렀음이다. 비록 오극전갈이 천하삼대독물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고 해도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의 조화로 보호받고 있는 표영의 몸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정작 표영조차도 모르고 있는 일이었다.

권법과 장법을 지나 계속해서 수련은 계속되었다. 그것들은 지법인 식탐지(食貪指)와 금나수법인 구반수(狗般手), 각법인 회구각(回狗脚) 등이었다. 많은 것들을 익혀 나간 후 거의 끝에 이르게 되자 표영은 음공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무공이 있다면 단연코 그것은 음공(音功)이랄 수 있다. 이제껏 말했지만 자연의 힘이야말로 거대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힘이니라. 그중의 으뜸이 바로 음(音)이다. 옛말에 이르기로도 음(音)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있다 했다. 그렇기에 음을 다스릴 줄 알게 되는 날은 모든 무공이 극에 달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음공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 굳이 수고스럽게 손과 발을 놀릴 필요조차 없다. 말 한 마디와 노래 한 가락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산과 들, 바다는 고요한 듯하지만 그 속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느냐. 그 음들은 언뜻 불규칙적이게 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의 몸도 그와 같다. 조용히 있는 듯하나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 몸 또한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기에 음공이 절정에 이르면 그저 균형을 깨뜨리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흐트러뜨리고 주화입마시킬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마음조차 변화시킬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 이르길 천음조화라고 부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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