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8장 (2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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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부님,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그냥 사부님께서 차고 다니십시오. 제가 볼 땐 사부님같이 훌륭하신 분이야말로 이 목걸이의 주인이 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요. 예로부터 귀한 것일수록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인격이 고매하신 사부님께서 차고 다니십시오.”

그 말에 엽지혼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마주 쥐고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뚜드득.

뼛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말.

“할 거냐, 말 거냐.”

표영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

뚜드득- 뚜드득-

답변을 재촉하는 뼛소리에 표영이 잽싸게 말했다.

“아하하… 아하하… 사부님도 참, 제가 언제 안 한다고 했나요. 자, 어서 주세요.”

표영은 낚아채듯 건곤패를 뺏어 목에 걸었다.

“야∼ 이거 폼나는데요.”

엽지혼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좋지? 그래, 내가 보기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하하하하.”

표영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사부님,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표영은 시체가 묻힌 무덤 쪽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체님! 시체님! 저는 정말 잘못없습니다. 이건 제가 가지려고 했던 게 아니라구요. 예로부터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이 있으니 늙으신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시체님을 아는 사람이 달라고 하면 그땐 드릴 테니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마세요. 시체님의 죽음은 제가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데요, 알았죠?”

차가운 땅에 묻힌 재수없는 천마지체 마교 교주 독무행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마음이 어떠할까. 아마도 무덤을 뚫고 나와 방성대곡을 하였으리라. 가까스로 얻은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젠 마교 교주의 절대적 상징인 건곤패까지 고스란히 바친 꼴이 되었고.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인가. 훗날 이 일로 앞으로 독무행과 조우하기로 예언되어 있는 이들조차 엉뚱한 주인을 쫓게 될 터이니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결국 마교의 오뇌자 신기천의 예언은 하나는 빗나가고 또 다른 하나는 정확한 성취를 이루고 말았다.

제2장 자연과의 일체

표영은 동굴 앞쪽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무가 아닌 떨어지는 잎사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는 가을. 생기발랄하던 나뭇잎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쓸쓸히 근본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땅으로 내려앉았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지 않던가. 젊음이 다해 노화가 일면 피부는 힘을 잃고 머리는 하나둘 빠져나간다. 모든 생명체는 결국 그 힘을 다할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갈색의 옷으로 갈아입은 잎사귀들은 맥없이 공중을 비산하며 마지막 몸짓을 보이다가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그 앞에서 표영은 마치 무아지경에라도 든 양 미동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표영의 머릿속에 무공의 구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바람이 일어 잎사귀를 격동하듯 온몸에 일주하는 기(氣)를 바람처럼 일으켜 혈을 자극한다. 또한 나를 대적하는 상대의 기도와 그의 움직임을 느끼며 몸을 흐르게 한다. 발을 뗌에 있어 허공을 밟듯 하되 단전에서 강한 기운을 이끌어 충문혈과 혈해, 양구혈을 지나게 한다. 일단 그곳에서 힘을 다시 회오리쳐 족심혈과 용천혈로 뿌리면 몸은 바람을 탄 낙엽처럼 움직일 것이다…….”

이것은 경공술 낙엽부영의 구결이다. 본격적인 무공 수련이 시작된 것이다.

마교 재건의 희망 천마지체 독무행의 죽음,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표영이 기연을 얻게 된 후 엽지혼은 무공을 전수하길 서둘렀다.

그가 이처럼 조급해진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자신의 몸이 점차 악화되어 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하루하루 죽음의 사자가 다가오고 있어 아무리 길게 잡아도 4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과 마음엔 어느덧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선 죽기 전에 표영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또한 그의 마지막 바람은 이질적으로 변해 버린 개방을 제자가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서두름의 두 번째 이유는 예상치 못했던 제자의 기연 때문이었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먼 굳이 서두를 필요까진 없었다. 원래는 일단 무공구결을 온전히 깨우치게 하고서 세상에 나가 비천신공(卑賤神功)을 연마케 하고자 함이었다. 개방의 무공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비천신공이 근본 바탕이 되어야만 했다. 비천신공은 비천한 환경과 고난의 길을 통해 내공이 진보해 가기에 거지 생활을 하면서 차츰 신공이 진보해 간다. 그 후엔 신공의 진전을 따라 그 후엔 하나씩 무공을 터득하면 된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제자는 이미 내공 방면에 있어서 어쭙잖은 고수들보다 훨씬 뛰어난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즉, 굳이 비천신공의 성취를 본 후에 수련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천신공이 앞으로에 있어서 전혀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개방의 여러 무공들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비천신공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앞으로의 내공의 방향은 비천신공으로 유지하고 키워 나가야만 한다.

어쨌든 그는 이 두 가지 이유를 통해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 전 제자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표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고집을 꺾지 않았다.

“너는 앞으로 3개월 안에 5할 정도의 성취를 내게 보이도록 해라. 그 기간 동안은 일체 다른 것을 생각지 말고 오로지 무공을 연마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무공 연마를 위해 낮에는 내 몸의 수혈을 짚어놓아라. 단지 식사 때만 잠깐 깨워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수혈을 짚어야 한다. 연약한 마음을 품고 연마를 게을리 했다간 내가 밤에 깨어났을 때 가만두지 않겠다.”

표영은 사부의 말을 수용하기 힘들었지만 엽지혼의 마음은 확고하게 굳어져 있어 흔들림이 없었다.

“진정 네가 날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루 속히 네가 훌륭한 무인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앞으로 익히게 될 개방의 무공들은 모두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근본 마음에 닿아 있다. 그 속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대자연의 숨결이 묻어 있다. 개방의 무공은 구결을 암기하고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氣)란 보이지 않는 힘이기에 마음이 기와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허나 네가 무공을 연마하는 중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칫 심마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숨결은 감당하기 힘들게 다가오므로 승화시킬지언정 그 속에 휩싸이지 않도록 해라. 마음을 모질게 먹고 부단히 나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엽지혼의 간곡함으로 인해 표영은 낙엽부영이라는 경공을 익히려 떨어지는 잎사귀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한번씩 불 때면 잎사귀들은 우수수 지면으로 떨어졌다.

이렇듯 낙엽을 바라보고 있은 지 10일째가 되자 처음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 눈에 익숙히 잡히기 시작했다.

사부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구결을 떠올리며 낙엽의 슬픔과 낙엽의 눈물을 보아라. 그리고 그 속에서 낙엽이 어떻게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에 순응해 가는지를 느껴야 할 것이다.”

표영은 처음엔 낙엽의 슬픔이라든지 눈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생각했다.

‘사람이나 짐승도 아닌 한낱 나뭇잎사귀 따위가 무슨 생각을 하겠으며 눈물까지 흘리겠는가.’

하지만 열흘이 된 지금에 있어서는 사부의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낙엽의 소리나 그 눈물은 보지 못했지만 아련히 다가오는 낙엽의 쓸쓸함을 보게 된 것이다. 한번 마음이 움직이자 더할 수 없이 구결과 자연이 하나로 일치되었다. 순간 표영의 눈이 번쩍함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그 몸 동작은 마치 하나의 잎사귀라도 된 양 표홀하고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절반의 깨달음으로 시전하는 것이었으나 그 움직임에는 가벼움 속에 힘이 있고 표홀함 속에 신기막측한 변화가 깃들어 있었다.

낙엽부영이 펄쳐진 것이다. 낙엽부영의 착안은 잎사귀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잎사귀에는 안쪽에 세밀한 선이 있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잎사귀는 꺾였다가 솟아오르고, 혹은 내리꽂히는 수만 가지 변화를 가진다. 그러하기에 낙엽부영의 경공이 극에 다다를 시엔 시전자는 모든 위치와 공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이치로 낙엽부영에는 특별한 보로(步路:발걸음의 길)라는 것이 없었다.

대개 어느 문파의 경공술이든 발의 움직임의 기본적인 틀이 있고 그 속에서 사방(四方)과 팔방(八方)으로 변화를 이루어 익히게 된다. 하지만 낙엽부영에는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잎사귀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듯이 낙엽부영도 상황과 여건에 따라 예측 불허한 움직임을 구사하는 것이다. 틀이 존재하고 그 틀 위에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깨뜨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틀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낙엽부영의 위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허나 위력적인만큼 그것을 익히는 과정에서는 극도의 정신력이 필요했다. 개방의 무공 거의 전부가 이런 자연의 이치와 삶의 이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심지(心址:마음의 터)가 얼마나 견고한지, 정신 세계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성취가 달라졌다.

비천신공(卑賤神功)의 중요성이 또한 여기에 있었다. 비천한 삶 속에서야말로 마음의 그릇이 커질 것이며 어떤 어려운 난관도 대수롭지 않게 대처할 정신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표영에겐 위험의 요소가 많았다. 낙엽부영 속에서도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지라 아직 여린 표영이 심마에 빠질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표영이 놀라운 기연으로 임독맥이 타동되고 강한 힘이 몸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정신적 그릇마저 커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마음의 그릇이 바다처럼 커지는 날에는 그 움직임을 막을 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오늘 무엇을 보았느냐?”

밤이 되어 깨어난 엽지혼이 조용히 물었다.

“낙엽의 쓸쓸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하하, 좋다, 좋아. 낙엽부영의 공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네가 진정 낙엽부영의 큰 힘을 느끼게 되는 날은 낙엽의 눈물을 보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네, 사부님.”

표영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연마하기 전의 말투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자연의 숨결에 접근해 무상함의 일면을 본 탓이었다. 게다가 그로 인해 사부의 모습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표영의 마음에 느껴진 까닭이기도 했다. 이것은 주화입마 중 심마의 초기 단계였다. 가만히 대답한 표영은 이어지는 뒷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직 낙엽의 눈물을 보지 못했지만 사부님의 눈물은 보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사부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허나 엽지혼은 어린 제자가 10일 만에 5할의 경지에 이른 것을 보고 그저 기쁘기만 했다.

“내일부터는 풍운보와 걸인만취, 그리고 연쌍비를 연마하도록 해라.”

자신의 아픔은 뒤로한 채 엽지혼은 그저 제자의 성취가 기쁘기만 했다.

‘내가 낙엽부영의 5할을 달성하기까지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열흘 만에 그 과정을 달성하다니, 단순히 영약을 복용하였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동안 고생하며 비천하게 살아온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오성이 지극히 뛰어나지 않은가. 하하하, 하늘이시여,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미소를 띤 후 내일부터 연마할 풍운보 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풍운보.

풍운보는 보법으로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몰려가는가. 바람을 움켜쥘 수 없듯 풍운보를 시전하는 자를 잡을 수는 없음이다. 또한 구름은 어떠한가. 흩어지고 모아지며 짙어지고 옅어지며 그 형체를 수없이 바꿔가니 가히 종잡을 수 없다. 구름을 따라 바람을 쫓으며 그 흔적을 발견해야 한다. 비천신공을 연마하여 궁극에 이르게 되는 날 바람의 소리와 구름의 변화를 듣게 될 것이다. 그날은 풍운보를 완성하는 날이 될 것이며, 그 소리와 변화를 맞이한 순간 구결과 내기(內氣)는 하나를 이루고 몸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생은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 무엇을 잡으려 함이 얼마나 헛됨인가. 결국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을 뿐. 세상에 얽매임 없는 삶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찾을 수 있음이다.”

그 울림을 듣는 순간 표영은 풍운보의 구결이 몸에 녹아지며 신형을 한줄기 바람처럼 날렸다.

걸인만취.

“사람이 술을 마심이 지나치면 본연의 마음을 잃고 개가 된다. 악인들은 그런 개와 같이 노망에 빠져 모두를 자신과 같이 취하게 만들고자 한다. 허나 정녕 자신은 취해 있음을 알지 못하지. 걸인만취의 움직임을 통해 그런 악인들이 취하였음을 느끼게 하고 어지럽게 하여 그들의 심령이 흔들리게 할 것이다.”

연쌍비.

“제비가 물을 차고 날아오르듯 유연하고 자유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그 날렵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이니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그들의 자유를 느껴라. 걸인의 삶은 새와 같아서 그 오고 감이 실로 풍요롭기만 하다.”

표영이 풍운보와 걸인만취, 그리고 연쌍비를 터득함에 걸린 시일은 채 30여 일을 지나지 않았다. 하나를 알게 되자 깨달음은 절로 마음에서 일어 어려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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