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
표영이 깨어난 것은 거의 정오 무렵이 되어서였다. 사부 엽지혼이 어서 일어나라고 달달 볶아댔던 것이다.
“형, 저기 누가 쓰러져 있는 걸?”
“어, 저기 저 사람. 어젯밤부터 혼자 매달려 있더라고. 굉장히 심심했나 봐. 내가 손을 놓으라고 해도 계속 붙들고 있더라니까. 요즘은 체력 단련을 위해서 사람들이 부단히도 노력하는가 봐. 왜 저리 힘들게 사는지 원.”
“형, 깨우자.”
“응……?”
표영과 엽지혼은 어젯밤 독무행이 깊은 나락이라고 생각한 곳을 폴짝 하고 살며시 뛰어내렸다. 그 높이는 웬만한 아이들조차도 뛰어내리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높이일 뿐이었다.
“이봐, 일어나. 이제 집에 가야지. 일어나라니까.”
“우리 형이 빨리 일어나라잖아.”
둘이 마구 흔드는데 몸이 손길 닿은 대로 맥없이 무너지듯 돌아갔다. 비로소 얼굴을 확인한 둘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먹물 사나이다!”
엽지혼이 먹물 사나이라고 부른 이유는 독무행의 전신이 독기에 물들어 검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 사람 죽은 것은 아니겠지?”
표영은 슬금슬금 걸어가 독무행의 코가에 귀를 댔다.
“헉! 숨을 안 쉰다.”
가슴에 대봐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주, 죽었나본데… 으아악!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죽었다고. 어쩐지 어제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 같더라니… 으악∼!”
표영은 이제껏 살면서 죽은 사람을 처음 보는지라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동굴로 도망쳐 버렸다. 엽지혼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형∼ 같이 가야지.”
엽지혼도 발이 보이지 않게 표영의 뒤를 따라 동굴 쪽을 향해 달려갔다. 2장(약 6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엔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각오로 출사한 독무행의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동굴로 돌아온 표영은 전전긍긍했다.
묻어야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더욱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시체를 묻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시체를 처음 본 표영으로서는 잠깐이라도 만질 자신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잔머리를 열심히 굴린 후 엽지혼에게 말했다.
“저대로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서로 일을 나누어서 묻도록 하자. 난 힘이 세니까 땅을 팔게. 이 형이 힘센 것은 잘 알고 있지? 내가 땅을 다 판 후에 너는 쉬운 일을 하면 돼. 내가 파놓은 구덩이에 시체를 묻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표영은 엽지혼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밖으로 후닥닥 나가 버렸다. 엽지혼은 기겁을 하고 뒤따라가며 외쳤다.
“어어… 형, 난 무서운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러는 거야!”
표영은 들은 체 만 체 하고선 엽지혼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단 한 차례도 쳐다보지 않고 땅만 파 젖혔다.
약 반시진(1시간) 가량이 지나 큰 구덩이가 생겨났다. 표영은 손을 탈탈 털고 먼 산을 바라보며 엽지혼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난 동굴로 들어가 있을 테니 넌 마무리만 하면 돼. 이건 간단한 거라고. 알았지? 자기가 맡은 일은 책임을 지고 확실히 해야 하는 거야. 똑바로 잘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표영은 엽지혼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잠깐 동안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 가버릴 거야.”
그러고선 후다닥 동굴로 달려가 버렸다. 엽지혼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형이 떠나 버린다는 말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으응… 정말 무서운데…….”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혹시 시체 옆에서 기절해 있는 것은 아닐까. 거참, 되게 걱정되네.”
벌써 한 시진 가까이 지났는데도 전혀 돌아올 기색이 없자 표영은 슬슬 불안해졌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했던가.
“형, 나 왔어.”
의외로 밝은 목소리로 엽지혼이 들어섰다.
“근데 왜 그렇게 늦었어?”
“형 주려고 국을 끓이느라고.”
엽지혼의 손에는 구걸할 때 쓰던 그릇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언제 끓였는지 정말 국이 담겨져 있었다.
“일은 다 마무리하고 온 거야?”
“그럼,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하마터면 애 떨어질 뻔했다니까.”
“어이구, 애는 무슨… 근데 이건 무슨 국이야?”
“응, 도라지국이야.”
“도라지국? 야, 이거 냄새 죽이는데. 누가 준 거야?”
표영의 말마따나 향긋한 냄새가 동굴 가득 진동했다. 게다가 국물 색이 신비스럽게도 비취빛을 띠고 있어 묘한 감취를 느끼게 했다.
“형 줄려고 내가 끓인 거야, 많이 먹어.”
엽지혼은 먹다 남은 밥과 함께 표영에게 국을 건넸다.
“이야∼ 맛있겠는걸. 함께 먹어야지?”
“어어어… 근데 형, 난 오늘 속이 좋지 않아. 형이나 많이 먹어.”
엽지혼의 말투는 왠지 뭔가 감추는 듯했지만 표영은 국물의 향취에 흠뻑 취해 그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 국물을 떠서 한 모금 입에 넣었다. 입 안이 향긋해짐과 동시에 뱃속까지 시원해졌다.
“오호, 이거 정말 죽이는데…….”
“형, 정말 맛있어?”
“응, 끝내줘.”
마침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터라 시장기가 가득한 표영은 허겁지겁 국물을 다 마셨고 하얀 도라지까지 다 씹어 먹어 버렸다.
“이 도라지 아주 특이한걸. 굉장히 개운하고 시원해. 뱃속 창자까지 개운해지는 것 같아.”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그보다 더욱 큰 기운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표영으로서는 알지 못했다. 온몸에 청명한 기운이 돌면서 정신까지 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 도라지가 아주 몸에 잘 받나 봐. 갑자기 마구 뛰고 싶어지는데…….”
표영은 동굴을 나가 신나게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야호∼ 신난다.”
단전 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계속해서 일어나며 몸의 기운을 북돋았다.
‘왜 이렇게 힘이 솟지? 희한한 일이네.’
표영은 동굴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거의 반 시진 가량이나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전혀 호흡이 가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힘이 솟구친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정도였다.
다시 얼마를 달렸을까, 아까부터 아랫배 쪽이 묵직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은 같았다.
“잠깐 소변을 보도록 할까.”
바지춤을 내리고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소변이 나왔다. 오줌 빛깔은 평상시와는 달랐는데 짙은 회색빛을 띤 데다 전체적으로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줌을 누면 눌수록 더욱 몸은 개운해졌다. 물론 용변을 보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평상시의 그런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쏴아악…….
굵은 줄기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퍼부어졌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칠 줄을 몰랐다. 어느새 시간은 처음 오줌을 누기 시작한 지로부터 장장 일 식경(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길 일다경(15분) 정도가 더 지나게 되자 줄기는 서서히 그 세력이 약해지며 줄어들었다.
‘허허… 이거 몸에 있는 물이 다 빠져나온 건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개운해지는걸. 근데 왜 갑자기 힘이 솟구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소변은? 혹시 아까 먹은 게 도라지가 아니라 산삼이었나?’
표영은 흥건하게 젖어있는 물기를 보고 괴이히 여기며 동굴로 향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갑자기 아랫배 쪽에서 북을 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어, 이건 또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랫배 쪽에서 시작된 폭발적인 충격은 위로 아래로 팔과 다리로 이어지며 온몸을 격동시켰다. 그것은 내부의 충격이었고 내부의 폭발이었다. 그 기세로 인해 표영은 제자리에서 몸이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동작이었다. 더불어 얼굴색 또한 갑자기 노랗게 변하는가 하면 다시 주황색으로 번했다가 거기서 흑색으로 변했다가를 반복했다. 혈관 하나하나가 모조리 터져 버린 것 같고 몸이 두둥실 뜻과는 상관없이 떠오르자 표영은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표영 살려∼ 나 죽는다∼!”
표영의 비명 소리가 너무도 컸기에 그 소리는 동굴에 있던 엽지혼에게까지 들렸다. 그는 내심 불안해 있었던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으어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형, 정신 차려.”
엽지혼은 안절부절 못했다. 형이 붕 떠 있다가 다시 땅으로 내리꽂히고 또 솟아오르고를 반복하고 있었으니 어찌 그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필시 자신이 끓여준 국을 먹은 것 때문이라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잘못했어. 아까 그건 먹는 것이 아니었나봐. 미안해, 형.”
하지만 표영은 이미 눈 흰자위만 드러낸 채 온몸을 뒤틀며 발악을 할 뿐이었다.
“우어어어…….”
괴상한 소리를 지른 후 표영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미안해. 형, 죽으면 안 돼. 내가 잘못했단 말이야. 엉엉… 난 그냥 재밌으라고 한 거였는데… 어엉…….”
그럼 과연 표영은 왜 이런 현상을 겪게 된 것일까? 그 답은 엽지혼이 끓여준 국에 있었다. 그것은 사실 도라지국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던 것이다. 기실 그는 표영이 혼자 돌아가 버리자 두려운 마음으로 독무행을 묻었다. 그런데 시체를 묻으려 하자 몸이 흔들리며 문득 독무행의 품에서 괴이한 약초와 붉게 생긴 작은 보자기가 삐죽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약초는 천년하수오였고 보자기 안에 든 것은 묵각혈망의 내단이었다. 엽지혼은 순간 장난기가 동했다. 자기에게 어려운 일을 시킨 형을 골려줘야겠다 생각한 그는 하수오와 내단을 넣어 국을 끓인 것이다.
천년하수오와 묵각혈망의 내단의 공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한사람이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복용했다는 사실을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일이 속출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공을 익힌 자에겐 큰 재물이나 황금보다 더욱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표영의 몸에 나타난 세 가지 현상은 바로 하수오와 내단 때문이었다.
일단 천근하수오를 복용하게 되면 첫째로 몸에 기운이 북돋우어진다. 그로써 복용자는 어딘가를 달리고 싶어진다든지 몸을 마구 움직이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표영이 미친 듯이 달리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몸 안에 쌓인 노폐물들이 체외로 배출되게 된다. 사람의 몸 안에는 수많은 불순물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제거할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천년하수오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표영이 소변을 장시간에 걸쳐 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탁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공능은 기혈을 타통시키는 데 있다. 탁기가 사라진 몸 안에 천년하수오의 맑고 강한 기운이 돌며 막혀 있는 임맥과 독맥을 타통시킨다. 임맥과 독맥이 타통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타통 되었다고 해서 내공이 몸에 쌓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의 모든 통로가 열린 상태라 내공을 쌓게 될 시 그 진전은 일반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된다.
표영의 몸이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함은 막힌 기혈이 뚫리며 임맥과 독맥이 타통 되는 현상이었다. 이로서 표영의 기혈은 온전히 뚫렸고 무림인들이 꿈에라도 바라는 생사현관을 타통하게 된 것이다.
표영이 얻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묵각혈망의 내단 또한 먹지 않았던가. 임맥과 독맥이 타통되는 중에 표영의 얼굴색이 노랗게 되었다가 붉게 되고, 검어졌다 창백해졌다 한 것은 하수오와 내단의 힘이 융화되어 세상의 모든 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만독불침의 경지, 결국 천마지체 독무행이 얻어야 할 모든 힘은 고스란히 만성지체 표영에게로 옮겨온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힘을 얻은 만성지체 표영의 앞날엔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