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
‘저, 저런 개새끼를 봤나.’
“사, 살려주세요. 헉헉… 제발 살려주세요.”
이번에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죽을 각오로 말했다.
“흐흐흐… 잘하네. 아주 좋은데… 한 번 더 해봐.”
‘헉! 이 새끼가 진짜로…….’
속으로는 욕을 해도 겉으로 표시 낼 순 없었다.
“헉헉… 살려주세요. 헉헉… 힘이 다해갑니다.”
간신히 손을 붙들고 있는 상태인지라 자꾸만 말을 하게 되자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어찌하랴, 살아야 이 모욕을 되돌려 줄 것이 아닌가.
‘이 자식아, 내 몸이 회복되면 그때 너를 생으로 씹어 먹어 주마.’
“좋아 알았다고. 자, 내가 구해줄게. 내 말만 들으면 살 수 있어, 알았지?”
“네, 뭐… 뭐든지 드, 듣겠습니다. 헉헉…….”
“하하, 착하구나. 넌 나 믿어 못 믿어?”
‘내가 널 언제 봤다고 믿을 수 있냐, 이 개새끼야.’
하지만 입은 다른 말을 뱉어냈다.
“미, 믿습니다. 헉헉… 오! 제가 어떻게 말해야… 헉헉… 제 마음을 보여드릴 수… 헉헉… 있을까요. 믿습니다, 헉헉… 믿습니다…….”
표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절벽 위를 뒷짐을 진 채 왔다 갔다 했다.
“좋았어. 믿는 거야. 서로를 신뢰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거든.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서로 의지하고, 믿고, 살펴주는 것이 필요해…….”
표영의 말은 상황에 안 맞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표영 자신으로서도 어떻게 이렇게 멋진 말들이 나올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고 길게 토해내고 있었다. 주된 내용은 바른 생활과 신뢰, 인간관계 회복 등등… 좋은 내용은 다 들어 있다 할 수 있었다.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개자식아.’
백의인의 마음은 바짝 타 들어갔지만 여전히 표영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손짓발짓해 가며 걱정 어린 행동으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믿음이고 신뢰야. 마음의 건강 없이 육체의 건강을 기대하기 힘들단 말씀이지. 서로 신뢰하는 생활, 서로 베푸는 생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영위해 나가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아,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하게 변할까.”
표영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감탄이 되는지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백의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연신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헉헉… 옳습니다.”
“흐흐흐… 좋았어. 자, 내가 이제 살길을 알려줄게. 준비됐어?”
“네… 헉헉… 아까부터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흐흐… 그랬었나? 좋아,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잡고 있는 손을 놔버려. 마음 편하게 먹고 놓으면 돼. 알겠어? 그럼 살 수 있어.”
“네?”
“손을 놓으라고. 그냥 놓으면 되는 거야. 믿어야 한다니까. 믿음!! 내가 줄곧 이야기했잖아.”
백의인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인내를 가지고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했던 그였다.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유분수지 어린놈이 해도 해도 너무했다.
“헉헉… 야 새끼야∼!”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연신 욕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에 머저리 같은 놈아! 지금 장난하나! 헉헉…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끌어 올려주지 못해… 헉헉.”
표영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라, 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 거참, 살길을 알려줘도 저 모양이네. 그럼 좋아 알아서 하라고. 아, 이제 나는 잠이나 자야 되겠다. 안녕, 잘 있어.”
다급해진 것은 백의인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헉헉… 자다니? 야, 인마, 나 좀 살려줘. 헉헉……. 제발 잠자면 안 돼. 야, 싸가지 없는… 헉헉… 놈의 자식아, 살려주란 말이야∼!”
처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미 표영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드르렁… 드르렁…….”
“야 새끼야∼!”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원대한 꿈을 품고 전 중원을 호령할 날이 가까이 왔건만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고통 속에 깊이 탄식했다.
여기서 잠깐 그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이 백의인은 과연 누구이기에 이처럼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그의 이름은 독무행. 신분은 놀랍게도 현 마교 교주(魔敎敎主)다.
마교가 몰락한 지 어언 200년. 이런 마교에 있어 유일한 희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마지체에 대한 전설이었다. 200년 전 마교의 최고의 지혜자인 오뇌자(五腦子) 신기천(申奇天)은 훗날 마교의 부흥을 이렇게 예언했다.
“지금 마교는 몰락하지만 200년 후 세상에는 천마지체(天魔之體)가 나타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마교는 예전과는 비할 바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며 무림은 숨을 죽일 것이다.”
지금 매달려 있는 독무행이 바로 전설의 천마지체이며 마교 부흥의 핵심이다. 200년 전에 천선부(天仙府)와 무림맹에 의해 마교가 몰락한 후 마교의 입장에선 구세주인 셈이다.
그는 운명의 안배를 따라 21살 때 기연을 얻었다. 그곳은 마교의 진산절예가 숨겨진 산서성(山西城) 화련산(華蓮山)의 응벽동(應璧洞).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바로 200년 전에 예언된 마교의 후예임과 천마지체임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던 악의 근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5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마교의 독랄한 무공을 수련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련 단계만을 남겨두게 되었을 때 사천성의 목마산에 있는 천년하수오를 취하러 길을 떠났다. 천마신공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성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성의 제어는 천년하수오만이 효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은 하수오를 복용 후 한 시진 안에 응벽동에 안에 있는 흑수담(黑水潭) 안에서 운기행공을 하게 되면 마성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껏 마교의 쇠락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외부적 요인으로 몰락했다기보다는 지도자가 마성에 젖어 수하들을 죽이는가 하면 스스로 주화 입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독무행의 걸음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응벽동의 안배는 매우 치밀했기에 이미 천년하수오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것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특히나 그것이 매우 귀한 것을 얻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영약이나 기초(奇草)가 있는 곳엔 반드시 수호하는 짐승이나 괴물이 지키고 있기 마련이다. 대개 그런 괴물들은 영약들과 미묘한 상생 작용을 이루는데 겁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영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천년하수오 근처에는 묵각혈망이 있었다. 이 묵각혈망은 검은 뿔을 다섯 개 달고 핏빛 몸체를 가진 오백 년 묵은 이무기로 그 독의 지독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독무행은 묵각혈망과 혈투를 벌었고 어렵사리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묵각혈망도 속절없이 죽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독기를 독무행에게 뿌리고 죽어간 것이다.
독무행은 당시 독을 당하고도 몸에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록 그가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독기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묵각혈망의 독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무행은 알지 못했다. 독무행의 내공의 힘에 의해 잠시 억눌려 있었던 것인데 빠른 신법으로 달릴 때 내공이 약해지는 틈을 타 순식간에 몸에 퍼져 버린 것이다.
그 지점이 바로 이곳 절벽 근처였다. 갑작스런 발작으로 몸에 균형을 잃은 그는 천만 다행히도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뻗어난 나뭇가지를 붙든 것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독기가 전신에 퍼지며 심장을 파고들자 마지막 힘을 발휘해 심장을 보호하느라 다른 곳에 힘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히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역류하는 기혈을 간신히 추스르고 그는 구조를 요청했지만 사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속으로 ‘역시 천마지체를 타고난 내가 죽을 리가 없지 않느냐!’며 자부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둘 다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인은 웃다가 기절을 하지 않나, 어린놈은 손을 놓으라고 하지 않나 하나같이 괴이한 놈들이었다.
‘아, 정말 내가 이렇게 죽어간다는 말인가. 나는 천마지체가 아니냔 말이다.’
그는 마교의 예언을 이루는 인물이기에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나 그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마교의 최고의 지혜자 오뇌자(五腦子) 신기천(申奇天)의 또 다른 예언이 있음이었다. 신기천은 일차 예언을 했지만 그 뒤의 변수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그 변수는 그저 그의 마음속에 갈무리해 두었을 뿐인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혹시, 어쩌면, 만에 하나, 끄응… 천마지체와 상극을 이루는 만성지체(晩成肢體)가 강호로 나와 활동을 하게 된다면 천지묘용으로 인해 둘이 만나게 되는 날 모든 것이 괴이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신기천이 이 내용을 이야기 하지 않음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만성지체의 특성상 그 게으름으로 인해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불신감(不信感)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능성이 없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여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나 버리고 말았다. 표영이 바로 그 만성지체가 아니던가. 천마지체독무행이 지쳐 가는 몸으로 거친 숨을 쉬고 있을 때 위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손을 놓으란 말이야. 왜 말을 듣지 않는 거냐고. 냠냠…….”
표영의 잠꼬대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 독무행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미친놈아∼ 사람을 살려놓고 봐야 할 것 아니냐. 헉헉…….”
독무행 그가 목숨을 건진다면 수많은 강호인들이 죽어나갈 것이니 살신성인(殺身成人)의 정신으로 죽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지만 그는 살려고 발버둥 쳤다.
“우욱…….”
심기가 편치 못한 탓일까. 기혈이 거세게 역류하며 온몸이 수만 개의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죽는 건가. 마교 천하를 이루어야 하건만… 어떻게 예언이 빗나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독무행의 몸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심장을 보호하고 있던 기운마저 옅어지고 서서히 그 독기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참으로 찰나가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지나며 먼동이 터왔다. 그리고 독무행의 온몸은 먹물처럼 새카맣게 물들었고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다.
‘으윽… 마교의 신화여, 이렇게 끝이 나는가!’
그는 분노와 체념이 뒤범벅이 된 마음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걱!”
독무행은 경악성과 함께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으… 이런 제기랄,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그가 이처럼 놀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독무행이 매달린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라기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지면과 독무행의 발은 고작두 자(60센티) 정도의 간격밖에는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엽지혼과 표영이 처음에 보고 크게 웃었던 것도 왜 매달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 표영이 손을 놓으라고 한 것도 다 독무행을 위한 말이었다. 만일 그냥 손을 놓았더라면 밤새 힘을 빼지 않아도 될 것이었고 마성을 제어하는 것이야 어찌 되든 일단 천년하수오를 복용하여 독기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만도 힘에 겨워했던 그였기에 지금껏 천년하수오는 건드리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속이 뒤집어지며 자신에 대해 울화가 치밀었다.
“으윽… 믿었어야 했는데… 내가 왜 믿지 못했을까. 왜, 왜, 왜……!”
그는 신음성을 토해내며 손을 놓았다. 이미 독기는 심장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땅에 철퍼덕 널브러져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천마지체의 최후는 이렇듯 허무하게 이루어졌다. 만성지체인 표영을 만나게 됨은 그의 불운의 시작이며 끝이 되었다.
표영은 만성지체에다가 천계의 모략으로 강호로 나온 터라 어떤 불행도 행운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