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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개방에 들어오려거든
얼마쯤 갔을까?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식사를 한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라 뱃가죽과 위장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연신 밥 달라며 요란스런 농성 소리가 들려왔다. 표영이 농성 소리에 굴복해 어디 밥 얻어먹을 만한 곳이 없나 하고 기웃거릴 때였다. 얼마 가지 않아 눈앞에 학운장이라 쓰인 근사한 이름의 큰 장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음, 학운장이라…… 이름이 아주 좋은걸. 오늘부터는 철저히 거지 생활을 하며 몸에 익숙해지도록 해야겠어. 그래야만 개방에 들어가기도 쉬울 테니 말이야.”
표영은 숨을 고르며 길게 외쳤다.
“밥 좀 주세요∼. 여기 거지가 왔습니다∼. 밥 좀 주세요∼. 저는 거지거든요∼”
한참 동안 거지니까 밥을 달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치며 외쳐 보았지만 아무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 거지라니까요∼. 밥 좀 주세요∼.”
목소리가 작아서인가 싶어 더욱 큰 소리로 계속해서 외쳐 보았지만 여전히 어떤 반응도 얻지 못하자 표영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나? 이거 처음부터 성공하지 못한데서야 체면이 깎이는 일 아닌가. 음… 어쩌면 구걸하는 방법이 잘못된 건지도 몰라. 그렇지, 아무래도 목소리만 내서는 효과가 별로일 거야. 구걸을 하더라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이겠지. 흐흐흐… 역시 난 똑똑하단 말씀이야.’
표영은 생각을 고쳐먹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워워…… 둥실둥실…… 밥 주세요…… 워워…… 밥 주세요. 둥실둥실…… 나는 거지라네. 워워…… 처음이라 서툴지만 그래도 난 거지라네…… 덩실덩실…… 울라울라…….”
어깨를 들썩거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한참 동안 노래와 함께 ‘워워’, ‘덩실덩실’을 외쳤다. 하지만 여전히 대문은 열릴 기미조차 없었다. 장장 일 식경(30분) 정도 온몸을 흔들어대자 피곤이 몰려들었다.
“음…… 좀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자. 옛말에 이르길 칠기팔전이라고 하지 않던가? 응? 칠팔전기인가? 칠전팔기(七戰八起)인가? 헷갈리네. 칠기팔전이 맞을 거야. 하하하, 어찌 됐든 일단 쉬자.”
학문에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표영은 칠전팔기를 칠기팔전으로 제멋대로 고쳐 버린 후에 대문 앞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버렸다. 표영이 잠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앞에 청의 무복을 입은 무사 둘이 나타났다.
“어라. 이거 웬 떨거지야.”
“학운장을 대체 뭘로 보기에 거지 녀석이 겁도 없이 대문 앞에 퍼질러 자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학운장의 무사로 악강과 신풍이었다.
학운 장주를 비롯해 모든 식솔들이 청운 지역의 청향 장주 부친의 고희잔치에 참석차 떠난 터라 둘은 잠시 주변을 경계하며 둘러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뒤쪽에서 살피고 있을 때 괴이한 거지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하니 학운장의 대문 앞에서 떼를 쓰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녀석 혼 좀 내줘야겠군. 야, 이 거지야. 어서 일어나.”
“자는 척해도 소용없다. 이 어르신이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마.”
악강과 신풍이 이처럼 낯선 거지에게 모질게 구는 이유는 한 달 전에 벌어진 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란, 한 스님이 학운장으로 시주를 받으러 왔다며 찾아왔기에 공손히 대접하고 쌀을 퍼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도둑이 들어 학운장의 무사들이 대거 달려들어 잡고 보니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낮에 시주를 왔던 중년 스님이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거지나 스님, 혹은 도사들이 도와달라고 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악강이 표영의 머리를 밟으며 발로 마구 흔들었다. 딱딱한 바닥과 머리가 거칠게 마찰을 일으키며 조만간 불꽃이라도 일 것 같았지만 표영은 끄떡도 없었다.
“어쭈, 이거 봐라. 오냐, 끝까지 자는 척하겠다 이거렷다.”
원래 사람이란 묘하게도 상대가 반항을 한다 싶으면 더욱 난폭해지는 법이다. 둘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달려들어 무차별적인 발길질을 퍼부었다.
퍼퍽- 퍼퍽- 퍼퍼퍼퍽-.
“혼 좀 나봐라, 이놈!”
“죽어라, 이 나쁜 놈아. 죽어!!”
연속적으로 가슴과 등이며 얼굴까지 타격을 가했지만 그때까지도 젊은 거지는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신풍은 ‘어쭈, 이것 보게나’라는 말과 함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회심의 발길질을 가슴에 날렸다. 이번에는 꽤나 힘을 준 터라 표영은 휘이익 날아 벽에 ‘퍽’ 하고 부딪혔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힘도 없는 짚단이 허우적거리며 날아가 튕겨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표영은 등판에 큰 충격을 받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워워…….”
곧이어 표영은 비명인지 잠꼬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지른 후 허공을 향해 손발을 휘젓다가 ‘음냐…… 음냐…….’ 하며 몸을 몇 번 뒤척이더니 이내 죽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벌건 대낮에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악강과 신풍이 고개를 돌려보니 송충이 눈썹에 호랑이 눈을 가진 거구의 40대 초반의 사내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둘은 그를 보자 마음이 뜨끔하여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장 포두님이시로군요. 헤헤헤…… 이 거지 녀석이 대문 앞에서 워낙에 소란을 피우기에 조용히 말로 가라고 했더니만 전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저희에게 죽일 듯이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래 저희들도 가만히 있…….”
악강의 장황한 설명은 포두 장추의 고함치듯 외치는 말에 의해 중단되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내 눈이 그리도 허술하게 보였더란 말이렷다! 내 아까 전에 이곳을 지날 때 젊은 거지가 불쌍하게 자고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멀리서 너희들이 다짜고짜 사람을 업신여김을 보았는데도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하다니, 관(官)에 끌려가 뭇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나!”
호랑이 눈을 부라리며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에 악강과 신풍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실은 포두님을 기만하고자 함이 아니라 요사이 동정을 구하는 듯하면서 뒤로는 패악을 끼치는 무리들이 있어 저희가 과민한 반응을 보인 듯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관내의 치한을 담당하는 장추 포두의 지위나 무공이 대단한 줄을 알고 있었기에 둘은 자신들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죄송한 표정과 불쌍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장 포두가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싫어함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 거지 친구의 몸에 이상이 있을 시엔 용서치 않겠다.”
장 포두는 여전히 자고 있는 표영이 크게 다친 것은 아닌가 하고 맥을 짚어보았다.
“음… 크게 이상은 없는 것 같군.”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눈을 열고 살펴보았다.
“어헉!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큰일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악강과 신풍도 거지의 눈동자 주변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것을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저희는 눈을 때린 적은 없습니다만…….”
장 포두는 둘을 매섭게 노려보며 다급히 말했다.
“몸에 이상이 생겼기에 눈이 저리 된 것이 아니겠느냐. 당장 아이를 업어 안으로 데려가도록 하라.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생명을 보장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악강과 신풍은 거지 녀석이 죽게 되면 살인죄를 쓰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씨… 몇 대 때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위중한 걸 보면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은 거지였을 텐데 우리가 뒤집어쓰게 생겼구나.’
신풍은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으로 표영을 등에 업어 장원 안의 자신들의 거처로 옮겼다. 침상에 눕혀진 표영에게 세 명은 추나요법 등으로 전신을 주물렀다.
“죽어선 안 되네. 제발 깨어나 줘.”
“정신 차리게나…… 정신 차려. 죽으면 안 돼.”
악강과 신풍은 죽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 본 뜻은 생략된 상태였다. 그들의 바람은 거지가 깨어나 ‘어, 저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아 오늘내일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깨끗이 죽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원(願)과는 달리 거지는 깨어날 기색이 없었고 장 포두의 성난 외침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영약을 가져오도록 하라!”
장 포두는 학운장의 가세가 크고 무사들이 많기에 필시 영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저, 그게…….”
악강과 신풍은 3개월 전 장주로부터 특별히 포상의 대가로 받은 기환단(寄幻丹)을 몸에 지니고 있던 터였다. 자신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를 대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장 포두가 잡아먹을 듯 노호를 터뜨리자 품에서 기환단을 꺼냈다.
‘이씨, 이게 어떤 건데…… 흐흑…….’
‘흐미, 차라리 진작 먹을 것을…… 어이구 아까워라……. 정신을 맑게 하고 내공을 북돋는 데 탁월한 효능을 지닌 것이건만 보잘것없는 거지가 먹게 될 줄이야.’
기환단이 기사회생의 영약은 아니었지만 그들로서는 보물과 같이 여기고 있던 것이라 그 안타까움이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저, 이거 절반만 드리면 안 될까요?”
“이것들을 그냥 콱!”
장 포두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거칠게 손을 뻗어 기환단을 빼앗은 후 표영의 입에 넣어주었다.
표영은 그때까지도 꿈을 꾸고 있었다. 처음 꿈은 갑작스레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지며 머리며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얻어맞았다. 그러다 장면이 급작스럽게 바뀌더니 우박은 사라지고 하늘에서 아리따운 선녀들이 내려왔다.
선녀들은 한복의 꽃과 같이 아름다웠는데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온몸을 주물러 주는 것이 아닌가. 우박에 맞았던 통증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 표영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선녀들은 주무르기를 다 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천도복숭아 두 개를 꺼내 입에 넣어주었다. 복숭아는 향긋하고 청명하여 목으로 넘어가자마자 머리와 몸을 시원하게 했다. 그러면서 표영은 서서히 꿈에서 벗어나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아직까지 눈이…….”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눈동자 주위에 여전히 청광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장 포두는 안타까워했다. 혹시나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게 다섯 손가락을 펼치며 물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이게 몇 개인 줄 알아보겠나?”
“하하하, 아저씨도 참. 다섯 개잖아요. 제가 공부를 게을리 했기로서니 그 정도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시나 보죠? 하하하?”
장 포두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나? 자네 눈의 눈동자 주위가 파랗게 변했지 뭔가. 내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표영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눈은 태어난 지 1년 정도 됐을 때부터 줄곧 이랬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에 약강과 신풍은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기환단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씨… 원래부터 그랬다는데 장 포두님은 괜히 우리만 가지고 난리야…….’
하지만 장 포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친구가 마음이 참으로 넓구나. 자기를 때린 사람들을 변호해 주기 위해 이런 거짓말까지 하다니.’
그는 목이 메인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없나? 말해 보게.”
그때 시기도 적절하게 표영의 배에서 우레와 같은 꼬르륵 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 지금 배가 고픈 게로군.”
장 포두는 악강과 신풍을 향해 매섭게 말했다.
“뭣들 하느냐, 생명의 은인에게 어서 식사를 내오지 않고. 이 친구가 잘못되었다면 너흰 모두 참수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곤 다시 표영에게로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물었다.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아이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참… 이러면 안 되는데… 하하하… 만두로 하죠 뭐, 하하하…….”
“어서 만두를 가져와라.”
표영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 참으로 세상은 따뜻한 곳이구나. 거지도 제법 할 만한걸. 하하하.’
표영은 감숙성까지 가는 동안 크게 어려움 없이 거지 생활에 적응해 갔다.
어느 집에서건 춤과 함께 펼쳐 내는 놀라운 철면피적인 말들로 인해 누구든지 밥을 퍼주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띌 정도로 구걸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이 정도라면 개방에 들어가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듯싶었다.
‘감숙성의 장령이라고 했지.’
표영은 녹의를 입고 집에서 함께 나왔던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보통 사람 같으면 두 달 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표영 나름대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한 덕분에 장령 지방에 이르게 될 때까지는 고작 1년이라는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만성지체를 타고난 표영은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다. 가는 동안 가끔씩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리움이 밀려들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드렸던 기도의 내용이 명백하게 떠올라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해주었다.
‘하루 속히 훌륭한 거지가 되도록 하자. 어머니께서는 내가 거지가 되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기원하지 않으셨던가. 개방이여, 기다려라. 이 표영 나리께서 나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