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
제2장 천의 소공공
조언참과 표만석 내외는 탁자에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조언참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표만석 내외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고작 변비로 먼 길을 고생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허허, 그리 난처한 기색 지을 필요 없습니다.”
조 의원은 두 부부의 표정을 보고 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안주인 화연실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표만석은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조 의원님, 혹시 게으름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조언참도 청안동자 표영의 게으름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으나 이건 병이 아니므로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험험… 저 또한 여러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딱히 ‘이것이다’라는 것을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단지 추측하건대 흰자위가 청광으로 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했지요.”
“점점 나이가 들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 문젭니다. 창피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아이는 식사를 할 때도 밥그릇 옆에 있는 반찬만 먹을 뿐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먹질 않습니다. 게다가 한번 잠들면 하루 내내는 기본이고 이틀간을 깨어나지 않을 정도랍니다.”
“허허.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장주께선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아직은 어리니 더 두고 봐야겠지요.”
“아닙니다. 이건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껏 세상에 나오지 않은 괴이한 병이 아닐는지요?”
“음…….”
조언참은 눈을 감고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실제 그가 표영의 게으름에 대해 들었던 내용은 지금 표 장주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한 내용들이었던 터라 심각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연신 수염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얼었다.
“혹시 장주께서는 천의(天醫) 소공공(蘇孔公)님이라는 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천의(天醫)라구요?”
놀라 반문하는 표 장주에게 조언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천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답니다. 감히 말하건대 후한(後漢) 말의 화타와 비견될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런 분이 계셨더란 말입니까? 그럼 조 의원님께서는 그분의 제자시로군요?”
“허허…… 제가 그분의 제자가 될 복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전 그런 큰 복은 받지 못했지요, 단지 1년에 한번 정도 저를 찾아오셔서 한마디씩 해주고 가신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열흘 뒤가 바로 그분을 뵙게 되는 날이지요.”
표만석은 얼굴 가득 기대된다는 듯 표정으로 대신 물었다.
“제가 그분에 대해 말씀드림은 혹시나 그분이라면 아영(兒永)의 눈에 나타난 청광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장담은 할 수 없으니 장주께서는 너무 기대하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조 의원님.”
표만석은 고마움에 조 의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 달 안에 아무 연락이 없다면 천의께서 오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표만석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대문 밖에서 천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귀한 손님이 오시게 되면 가복들이 마중을 나가지만 소공공을 그렇게 맞이할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보름째 되던 이른 아침이었다. 이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초초하게 기다리던 표만석의 눈에 저만치 양털같이 새하얀 백의장삼을 입은 동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올수록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보통 아이 열서너 살 정도의 키. 동안의 얼굴에 학의 깃털 같은 백발…….
하지만 기이한 모습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틀림없는 천의 소공공임이 분명했다. 그 외모는 조 의원이 말해 준 그대로의 용모였던 것이다.
“그분은 백의장삼을 즐겨 입으시고, 단신의 몸에 입술 왼쪽으로 작은 점이 있답니다. 머리는 백발이시지만 얼굴은 동안(童顔)이라 어린아이라 착각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혹여 보통 어린아이로 착각하여 귀한 분을 소홀히 모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 의원님의 말이 없었다면 자칫 큰 실수를 할 뻔했구나.’
표만석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었다.
“천의께서 직접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시다니 집안의 큰 복입니다.”
“이곳이 청안동자의 집인가?”
그는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물었다. 무심(無心)한 표정과 눈동자였으나 목소리는 10대 후반 소년의 것이었다. 비록 그 목소리가 어리게 들려진다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이 오시길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허허.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 자, 들어가세.”
이미 대문 안쪽에서 상황을 듣고 있던 가복 봉운과 월성이 서둘러 모든 이들에게 소공공의 도착을 알렸고 그 순간부터 장원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표만석이 천의께서 당도하시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미리 지시를 해놓은 때문이었다.
소공공은 간단히 차를 마신 후 표영의 거처로 이동해 그를 살피게 되었다. 표영은 말할 것도 없이 잠에 빠진 상태였다.
표영을 바라보던 소공공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리고 점점 입이 벌어지며 한동안 다물 줄을 몰랐다. 그 광경에 표만석과 어느새 살짝 들어온 부인 화연실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어 마음을 졸였다.
“어허허…… 어허허…….”
괴이쩍은 웃음소리에 놀라 표만석이 물었다.
“대인, 무슨……?”
표만석의 질문은 소공공이 손을 들어 막음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소공공은 조용히 눈을 감고 진맥에 들어갔다.
“음…….”
뒤쪽에서는 묻지도 앉지도 못하고 두 부부가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어허허…… 어허허…….”
다시 한 번 괴이쩍은 웃음을 날린 소공공은 검지를 뻗어 표영의 미간을 눌렀다. 그러자 표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청광이 눈 주위로 푸르스름하게 번졌다.
“어허허… 만성지체(晩成肢體)였어. 만성지체.”
그가 다시 미간을 짚자 표영의 눈이 감겼다.
“자, 나가서 이야기하세.”
소공공은 탁자에 앉아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자넨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들어봤나?”
대기만성이란 말을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공손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 아들은 대기만성의 극(極)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몸이야. 허허허, 말하자면 만성지체인 셈이지.”
표만석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대인. 만성지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세상에서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지체인데, 쉽게 말해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게으른 몸이라고 할 수 있지. 허허……. 아무렴, 중원을 통틀어 이보다 더 게으른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보면 될 게야. 평생을 느림과 잠 속에 파묻혀 지내게 될 것이야.”
표만석과 화연실 부부로서는 하늘이 노래지는 순간이었다.
“어르신. 정녕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르신이라면 뭔가 대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책이라…….”
소공공이 말을 잇지 않자 표만석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의술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하늘이 정한 이치이기에 타인의 힘을 통해 깨뜨릴 수는 없는 것이거든.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서려 있음을 느낀 표만석의 귀가 번쩍 뜨였다.
“대체 어떤 방법입니까? 뭐든지 해보겠습니다.”
“음…… 글쎄, 너무 힘든 길이라서…….”
“말씀만 하십시오.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라 할지라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허허허, 끔찍이도 아들을 아끼는군.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해결책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가 될 걸세. 특히 아이 엄마가 지극히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그리고 자네도 그렇고.”
소공공은 동자의 얼굴과 묘하게 어울리는 백발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들을 위하는 일인데 저희들의 관심과 애정이 장애가 되다뇨.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부디 길을 알려주십시오.”
표만석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어떤 난관도 각오가 돼 있음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좋아, 자네 뜻이 그렇다면 말해 주지. 실제 만성지체를 타고난 아이는 천고의 기재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라고 할 수 있네.”
그 말에 표만석의 얼굴이 기쁨으로 일렁거렸다. 자식이 기재요, 천재라니 어느 부모가 있어 이 말에 기뻐하지 않을 것인가.
“정말이십니까?”
“허허허, 미리부터 좋아할 것은 없네.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천재이긴 하나 몸이 만성지체를 타고난 것을 잊지 말게. 문제는 이 아이가 머리를 사용하질 않는다는 점이야. 돼지 목에 진주가 걸린 셈이랄 수 있지. 죽는 날까지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게야. 두뇌의 뛰어남이 만성지체라는 특이체질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고 보면 돼.”
기쁨도 잠시 표만석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쓰지 못할 머리라면 아무리 뛰어난 머리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후우…….”
긴 한숨 소리에 소공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네, 저 아이는 마치 달리기를 잘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 밧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고, 혹은 가난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부잣집의 여유로움에 취해 그 정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할 수 있어. 그래서 방법은 한 가지, 만성지체의 참 힘을 얻기 위해서는 틀을 깨야 해. 세상에서 가장 천하디 천한 생활 속에 고생해 가며 몸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네. 노숙자가 되든 거지가 되든, 뭐 그런 부류의 삶으로 말일세.”
“허걱!”
표만석은 소공공의 마지막 해결책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거지, 노숙자, 부랑자…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소공공은 표만석의 표정을 보고 그가 결코 따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허허, 만성지체는 하늘의 복을 타고난 건 분명하네. 그러니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고생시킬 필요가 없네. 하지만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려거든 모질게 마음먹는 게 좋을 걸세. 아이가 천한 길을 가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심령이 깨어나 세상을 놀래킬 인물이 될 수도 있지. 또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게으름을 피울 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 절로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을 게야. 어때, 할 수 있겠나?”
소공공의 말에 아까까지 호언장담했던 표만석은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곁에 말없이 앉아 있던 화 부인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일생을 게으름 속에 살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저민 것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으니 하늘에 빌어보는 수밖에. 자, 그럼 난 아이를 한 번 더 본 후 길을 나서야겠네. 내 생애 만성지체를 보게 된 건 나로
서도 영광이니까.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