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93화 (193/194)

(193)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던 단우태는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거둔 자연지기라면 천마광휘를 극성으로 펼치고도 남을만 했다. 그런데도 유세운은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자연지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결국 단우태가 물어보자 유세운은 전신에 충만해가는 자연지기를 느끼면서 답했다.

“뭐하긴 결판을 내자며?”

유세운은 멈추지 않고 자연지기를 계속해서 받아들였다. 불안해진 단우태의 전신에서 마기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단우태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 까지 하며 욕을 했다.

“이런 비겁한 자식! 준비 중인 상대를 공격하다니!”

“시끄러워! 천마광휘!”

슈아아악.

순간 장내의 모든 병장기의 소리도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향해 모였다. 키가 이십 장을 넘어 보이는 거대한 핏빛 수라의 형상에 모든 이들이 주춤거리며 장내에서 멀어졌다.

핏빛 수라의 형상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본 유세운이 일갈을 터트렸다.

“모두 물러나! 은광천세!”

굳이 유세운이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는 수라천마대와 정파 무림의 정예들이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광검에 이른 은광천세는 이십 장에 달하는 수라의 형상을 집어 삼켰다. 하지만 천마광휘는 은광천세를 가르고 유세운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단우태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고작 이 정도를 펼치려고 그렇게 많은 자연지기를 거두었냐? 하하하하.”

웃고 있는 단우태를 향해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눈을 가리는 정도 밖에 안 되지.”

심검의 고수라면 이 한번의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지만 광검에 이른 그들의 호신강기를 뚫지는 못했다. 유세운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라의 형상을 보며 비장의 한 수를 펼쳤다.

“생기려면 이 정도는 생겨야지! 은령현신(銀靈現身)!”

유세운의 외침을 따라 그와 똑같이 생긴 원령이 튀어나왔다. 유세운이 자연지기를 많이 거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상당한 자연지기를 필요로 해서 그것을 펼치기 위해 시간을 끌었었다.

단우태는 유세운이 자신만한 크기의 강기를 만들어내자 피식 거렸다. 자신의 수라는 이십여 장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건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게 다가 아니지! 팔각연환세(八角連環勢)!”

유세운과 같은 모습의 원령이 수라를 향해 팔각연환권을 풀었다. 한번 한번의 권을 풀 때마다 점점 원령의 기운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곳에 몰려있던 자연지기가 원령의 팔각연환권을 따라 풀어져 나왔다.

“뭐…뭐냐?”

지금까지 몰렸던 자연지기를 순차적으로 뿜어내는 팔각연환세의 공세에 수라의 형상이 갈가리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단우태는 극심한 내상을 입어갔다.

“크헉!”

팔각연환세가 끝나는 순간 은광천세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천마광휘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세운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있는 단우태에게 다가갔다.

단우태는 유세운을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단우태는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수라의 동굴에 갇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자신과의 싸움. 간신히 그것을 이겨내고 천마광휘를 얻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조사의 유지를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정신없이 수라마교를 일으켰다. 다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수라에 얽매여 살아왔던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가? 이렇게라도 수라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이?”

유세운은 이미 단우태의 상황이 어떤 영약으로도 살릴 수 없음을 알았다. 유세운은 그의 머리를 받쳐주면서 은태정을 가리켰다.

“잘 봐. 그렇게 억울하진 않을 거야.”

“쿨럭! 무슨 소리냐?”

피를 토하면서도 유세운의 말에 집중하던 단우태를 향해 유세운이 작게 속삭였다.

“저자가 검마도주 같은데 천륜광검이 꺾이는 모습도 봐야 덜 억울 할 거 아냐.”

“크큭, 쿨럭. 그건 …그렇군.”

은태정은 물론 검마도주 또한 그 말을 전부 들었다. 검마도주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영호천이 이끌던 검마도의 검사들이 수라마교의 적청쌍마단을 거의 해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마도주는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은태정은 심검의 고수 여섯을 상대한 상황이었다. 예전 같지 않을 터 그리고 광검의 경지끼리의 싸움을 벌인 유세운도 멀쩡하다고 보기는 무리였다.

검마도주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그려졌다.

“크흐흐. 그렇다면 너희 둘을 모두 내가 죽여주마.”

검마도주의 말에 은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바보냐?”

잠시 동안 유세운과 단우태의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은태정과 검마도주는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마도주도 단단히 준비했다.

양손에 들린 두 개의 옥빛 륜이 빠르게 돌면서 어떤 것이라도 베어냈다. 폭음조차 없이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옥빛의 륜을 보면서 은태정은 고민했다.

미친 듯이 무공을 탐하던 시절의 경험이 있는 자신이 섬에서 죽어라 검만 판 상대의 륜에 당할 리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하기만 해대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유세운이 해주고 있었다.

“에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대신 싸워드려요?”

지 할일 끝났다고 사부를 약 올리는 꼴이 가서 한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검마도주의 방해로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은태정은 다시 양 주먹과 팔꿈치, 양발과 무릎에 은빛의 강기를 일으켰다. 와선형으로 회전하는 은빛의 강기를 보고 검마도주도 긴장했다.

카가가각.

검마도주의 륜과 은태정의 주먹에 맺힌 강기가 부딪치는 순간 사람들의 귀를 긁는 소음이 들려왔다. 은태정은 뒤로 물러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펼치고 있는 강기는 여덟 개였고 검마도주가 가지고 있는 것은 두 개였다. 애초에 승부는 났다고 생각했다.

“흠! 제법이군.”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검마도주의 주변에 떠오르는 옥빛의 륜을 보며 은태정은 이를 갈았다. 그 수가 물경 이십을 헤아렸다.

검마도의 무사들을 이끌던 영호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던 수라마교의 마인들은 모두 죽었다. 비천십팔마왕의 죽음 이후로는 별다른 반항조차 해보지 못한 게 그들의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비풍십이검 중 살아남은 자는 넷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저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천주님.”

영호천의 앞에는 낭인천의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 수도 많이 줄어 있었다. 모두 피에 흠뻑 젖은 채 수라천마대를 전멸시키고 마주쳤다.

수라마교인들을 사이에 두고 진격했으니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영호천은 이들을 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아버지 검마도주의 뜻이었을 뿐이었다.

단량은 자신의 초췌한 눈을 들어 영호천을 쏘아보았다. 수라마교인들을 공격한 것을 보면 자신의 편임에 확실하지만 그것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검마도 또한 철마성을 무너뜨리고 강호에 야욕을 드러냈음에 확신을 가졌다.

“천주님. 지금 저희의 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까?”

단량의 물음에 서중의 눈도 빛났다. 유세운의 곁으로 다가가는 육우령과 곽부설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확연히 심검에 든 그들이다. 자신들로서는 상대하기 버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호천은 이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국 영호천은 자신의 고검을 한번 털어내고는 검집에 꽂아 넣었다.

“나는 자네들을 베고 싶은 마음이 없네.”

영호천의 말에 검마도의 검사들은 당황했고 낭인천과 정파의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풍십이검 중 살아남은 자가 다가왔다.

“소도주님. 그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에 따랐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그건 설령 아버지가 이곳에 있는 모든 고수를 꺾는다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나와도 검을 섞으셔야 할 거다.”

영호천의 말에 비풍십이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영호현은 영호천의 옆으로 다가와 아버지인 검마도주를 바라보았다.

“살아만 남으셔도 다행이겠죠.”

“그렇게 되길 빌어야겠지.”

모든 싸움이 멈추고 자신과 검마도주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을 본 은태정은 더욱 화가 났다. 광대도 아니고 이 무슨 낯 뜨거운 일이란 말인가.

은태정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검마도주는 이기어검으로 옥빛의 륜을 날리다 은태정의 행동에 멈춰 섰다.

“단번에 끝내자.”

은태정의 말에 검마도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태정의 팔각연환권에 밀려 제대로 자연지기를 모으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을 터였다.

“크크크. 그렇다면 피하지 않겠다.”

검마도주는 자연지기를 거침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은태정은 그런 검마도주를 보다가 자신도 자연지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광검에 이른 경지의 무공이다 보니 단 한번이라도 그 여파는 가볍지 않을 터였다. 방금 전 유세운과 단우태의 대결에서도 그 여파는 이십 장을 넘어섰었다.

은태정은 자연지기를 모으며 이상한 현상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자연지기들이 투과해 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없이 포근한 느낌에 은태정은 싸우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눈을 감았다. 전신을 감싸 도는 자연지기와 자신의 존재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검마도주는 자신의 전력을 다한 옥빛의 륜을 만들어 하늘 높이 쳐들었다. 반경 십장에 달하는 거대한 옥빛의 륜이 주변에 바람을 일으키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은태정은 옥빛의 륜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전신이 흔들리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자연지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검마도주의 전신에 모인 자연지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모인 자연지기의 힘을 재 보던 은태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연지기란 자연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 그 힘이 한 곳에 비약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본 은태정은 기분이 나빠졌다.

은태정은 바람에 전신이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던 모든 이들의 경악 속에 가장 경악한 것은 유세운이었다.

“제길! 사부가 왜 저렇게 됐지?”

눈을 감고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던 은태정의 머리와 눈썹이 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물이 빠지듯 은빛의 머리카락의 색깔이 변하는 모습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유세운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불안을 느끼는 자로는 마주한 검마도주도 있었다.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존재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검마도주는 그토록 강대한 기운을 내뿜던 은태정의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자 저도 모르게 불길했다.

“무슨 짓이냐!”

검마도주의 외침에도 눈을 감고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오는 은태정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일반 소년처럼 걸어오는 은태정의 보폭이 크지도 않았건만 검마도주는 그 한걸음 한걸음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쉽게 당할 줄 아냐! 천륜광검!”

그동안 모았던 자연지기까지 모두 옥빛의 륜에 담았다.

슈류류륭.

근처의 바람마저 빨려 들어갈 만큼 빠르게 선회하는 옥빛의 륜을 보며 검마도주는 안심했다. 이정도로 천륜광검을 극성으로 펼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힘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백연혜가 유세운의 팔을 잡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저것 막아야 하지 않나요?”

“뭐를 막아?”

유세운의 퉁명스런 대답에 백연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선회하는 옥빛의 륜을 가리켰다.

“아니면 같이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네요?”

유세운은 백연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제길! 아 이건 연혜보고 한 말이 아냐. 저거 던져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예?”

유세운의 말에 주변에 모여 있던 모든 광오문도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다 죽어 가던 단우태 조차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펼친 천마광휘에 버금가는 기세가 느껴졌다. 그런 그것이 아무 소용없을 거라니.

유세운은 은태정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사부 머리색깔 보이지.”

“어머? 언제 흑발로 변하셨죠?”

유세운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히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제길! 사부가 아무래도 무상진기를 극성으로 깨우친 것 같아.”

“무상진기요?”

백연혜의 물음에 유세운은 울적한 기분을 달래며 다시 검마도주와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광오문이 있게한 절기지.”

유세운의 말에 좌중의 시선은 모두 은태정을 향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유세운의 말을 되뇌며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검마도주는 도저히 은태정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신법을 지닌 자가 저렇듯 터벅이며 다가오다니. 마치 자신이 무언가 한 수를 가지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하며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검마도주의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손이 은태정을 향해 내려졌다.

“죽어 버렷!”

슈아악.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나가는 천륜광검을 보며 유세운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은태정의 감긴 눈이 떠졌다. 현기가 스치는 눈에 천륜광검의 거대한 위용이 비춰졌다. 은태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연은 자연인 채로 있어야 돼.”

번쩍.

눈부신 광채가 눈을 어지럽혀 모두들 눈을 감았지만 유세운만은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 죽어가던 단우태도 죽을힘을 다해 그 장면을 두 눈에 담았다.

천륜광검에 은태정의 손이 닿자 그것은 점점 흐려지더니 곧 미풍으로 변해버렸다. 다시 자연지기로 돌려버린 은태정은 훌쩍 날아올랐다.

“저것 봐! 지금까지 천천히 걷던 건 다 거짓이라니까.”

유세운의 말처럼 은태정은 지금까지 보여주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빠르게 검마도주의 앞에 내려섰다. 은태정은 검마도주를 올려보며 그의 단전을 가볍게 찔렀다.

“크아악!”

검마도주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천륜광검을 미풍처럼 바꿔버리질 않나. 그리고 단 한번의 손짓으로 자신이 여태껏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검마도주의 머리에 가볍게 알밤을 놓은 은태정이 투덜거렸다.

“그러게 애초에 어르신에게 이렇게 공손했으면 이러지은 않았을 거 아냐.”

은태정의 말에 검마도주는 피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은태정의 시선은 자신의 사랑스런 제자를 향했다.

검은 흑발에 검은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는 생각에 유세운은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사부의 그늘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길다고 속으로 욕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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