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결전의 끝.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수라마교의 마인들을 바라보던 검마도주의 옥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야?”
수라마교주로 보이는 자가 없었다. 혈발에 혈미를 하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있기는 했지만 많이 잡아줘 봐야 비풍십이검주의 실력 밖에 되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지금 검마도를 무시하는 건가?”
검마도주는 작게 웃고는 내력을 담아 명령했다.
“비풍십이검주는 앞으로 나서라!”
“예!”
열두 명의 심검에 이른 죽립인들이 검을 품에 안고 나타났다. 모두 같은 기세로 전방에 다가오는 가장 선두의 비천십팔마왕들을 바라보았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예!”
대답과 함께 일제히 달려가는 비풍십이검주를 바라보는 단우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열두 명의 심검에 달한 고수들을 보는 순간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 시간을 최대한 끌어라!)
일시에 여덟 명의 비천십팔마왕에게 명을 내린 단우적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누구냐?”
“비풍십이검주라고 하오.”
단우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아 보이는 검사였다.
“좋다. 내가 본 교의 태상호법인 단우적이다.”
“좋은 승부 기대하겠소.”
비풍십이검주가 대번에 둘의 십 장이 넘는 간격을 줄이며 검을 뽑았다.
은태정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강환을 날리는 비천십팔마왕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어설픈 녀석들도 머리수가 되니까 짜증나는 군.”
은태정은 미끄러지듯 그들의 강환을 피하며 간간히 일권씩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가 내뻗는 일권의 경력에 다들 막지는 못하고 피하기 급급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수라천마대원들이 피떡이 되어갔다.
은태정은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어 유세운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자기가 가르치긴 했지만 이제 천년의 역사를 통틀어 두 개 밖에 안 되는 광검의 경지와의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내가 만든 무공인데 지는 것은 용서가 안 되지.”
유세운은 단우태와 마주서서는 함부로 공격을 나설 수가 없었다. 이미 무의 끝자락에 서 있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그렇게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유세운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공격에 나섰다.
“제길! 이거나 먹어라!”
유세운의 손에서 뻗어나간 섬광마멸지를 한손으로 막아낸 단우태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좋은 지법이구나.”
한때 수라권마(修羅拳魔)라고 불렸던 자신이다. 천마광휘를 함부로 펼칠 만한 성질의 것도 못 되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수라마교의 진형. 한번의 시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지 몰랐다.
유세운은 다가오는 수라권마의 일권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일권무적이라는 말을 못 들었냐?”
웃으면서 단우태의 일권을 상대하려던 유세운은 대번에 안색이 찌푸려졌다. 사방을 옥죄어오는 기세. 이것을 푸는 잠깐의 시간이 생명을 내주어야 할 시간임을 알았다.
쿵.
진각을 내딛은 유세운은 옥죄는 기세에 상관하지 않고 주먹을 내뻗었다. 단우태의 일권과 마주치려는 찰나 경력을 비스듬히 흘러내리며 팔꿈치로 공격을 했다.
쾅!
강력한 충격에 어깨가 흔들렸지만 그 일수로 자신을 옥죄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느꼈다. 자신을 옭아매면서 상대할 만한 여유는 없을 터였다.
“너도 광검. 나도 광검. 그런 잔재주는 안 통한다고!”
유세운의 신형이 반 보 앞으로 다가들었다. 주먹을 내뻗기에도 짧은 간격. 단우태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며 유세운의 팔꿈치와 무릎 공격이 연신 터져 나왔다.
“좋군!”
그 짧은 거리에서도 유세운의 공격을 막아내는 단우태를 보며 유세운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제길! 이 거리에서도 막아내다니!’
은태정은 차츰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여섯 명의 마왕들의 능력을 확실히 알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만 끝내자.”
멈춰서며 기세를 뿌리기 시작하자 다른 여섯 마왕도 멈칫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은태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자신들을 옭아맨다고 생각했다. 여섯 마왕 중 가장 강한 천이마왕이 소리쳤다.
“쳐라!”
같은 마왕끼리 이런 명령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지만 은태정의 기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모습에 불안한 표정을 짓던 마왕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차핫! 혈풍환(血風環)!”
혈마왕의 장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의 강환이 점점 거대해져 그의 전신을 덮어갔다.
“크크. 목령신강(木靈神?)!”
목령마왕의 전신에서는 목(木)의 기운이 뻗어 왔다. 특이하게 오행마제에서 비천십팔마왕으로 올라왔던 그의 전신이 나무처럼 갈라지며 그 사이로 뻗어오는 녹색의 강기가 보였다.
“은월삭(隱月?)!”
한 자루 장창을 들고 있던 은월마왕의 창이 흐릿하게 변했다. 강기의 기운이 서리면서 장창의 본 모습도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은월마왕의 장창이 빠르게 은태정을 향했다.
“쌍영편류(雙影鞭劉)!”
편복마왕의 양손에 들린 채찍이 호선을 그리며 꿈틀거렸다. 강기와 일체화 된 채찍은 이미 채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륜각(魔輪脚)!”
마왕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퇴법을 보이던 철각마왕의 발이 허공을 메워갔다. 그리고 그의 발이 머무는 자리에는 자그마한 강기의 륜이 맴돌고 있었다.
“천수엽(千手獵)!”
천이마왕의 손이 셀 수 없을 만큼 변화를 일으키며 은태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은태정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천하제일고수였고 팔각연환권이 왜 천하제일권법인지 잘 모르나 보군.”
은태정의 양 주먹과 팔꿈치, 양발과 무릎에는 은빛의 강기가 몇 겹을 둘러싸고 모였다. 눈부신 은빛의 강기들은 빠르게 와선형으로 회전하면서도 그 힘을 밖으로 뿜어내지 않았다.
혈마왕의 혈풍환과 빠르게 자신의 사혈을 노리고 덤비는 은월삭의 기운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은태정은 태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혈마왕의 전신을 가리고 쇠도 하던 혈풍환을 향해 일권을 내뻗은 은태정은 부드럽게 옆으로 미끄러져갔다. 이형환위의 묘리가 실린 무공이 시기를 잘 이용하자 마치 사라지는 듯 하여 은월삭의 기세가 잠시 주춤거렸다.
간단하게 팔꿈치로 은월삭을 펼치던 장창의 창대를 후려친 은태정은 뒤에서 밀려오는 마륜각을 향해 마주 발을 뻗었다.
콰쾅!
옆으로 흘리는 것이 아닌 정면충돌이라 그 여파는 상당했다. 경력의 여파를 이용해 배는 빨리 움직인 은태정은 목령신강을 내뿜고 있는 목령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렬하게 뻗어가는 녹색의 강기도 은태정의 가벼운 일 권에 흩어졌다. 그리고 흩어진 목령마왕의 강기 사이로 은태정의 무릎이 치고 올라왔다.
“커헉!”
일격에 허리가 꺾여졌다. 하지만 고목처럼 변한 자신의 몸은 이미 반 금강불괴에 가까웠다. 목령마왕은 주저 없이 은태정의 몸을 껴안았다.
잡힌 은태정을 향해 다른 다섯 마왕의 공세가 이어져왔다. 은태정은 피식 거렸다.
“제대로 걸렸는데?”
마치 갑주처럼 은색의 강기가 뻗어 나와 은태정을 감싸는 순간 목령마왕은 그를 껴안고 있던 팔이 부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은태정은 그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음을 느꼈다.
“차핫! 은광천세!”
번쩍.
일부러 자연지기를 조금만 담아 뻗은 은광천세였기에 당한 자는 은태정을 껴안고 있는 목령마왕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절기로 은태정의 은광천세를 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단지 은빛에 눈이 부시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주 잠깐의 눈부심이었지만 그 정도면 은태정에겐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은태정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면서 천이마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특별하게 보여주마. 팔각연환권의 묘리를 말이다.”
파파파팍.
그 잠깐의 순간동안 천이마왕은 수백 번의 주먹질에 다져졌다. 은태정은 단 세 번의 공격에 목숨이 다해진 것을 알았지만 여태껏 쌓였던 것을 푸는 과정에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마왕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죽어랏!”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자신들의 절기를 풀어냈다. 자신들의 기운에 수라천마대원들이 죽는 것 따위는 이미 신경 쓰지 않았다.
은태정은 천이마왕을 집어서 은월삭을 펼치는 은월마왕을 향해 집어던지고는 철각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극성에 이른 마륜각의 기세가 철벽처럼 은태정의 앞을 막았지만 일 권에 이은 팔꿈치 치기에 작은 틈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 은태정이 뛰어들었다.
파파파팍!
“크아아악!”
그나마 대비하고 있었던지 철각마왕은 비명이라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마왕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은태정은 이번에는 길게 손을 쓰지 않고 그의 몸을 잡아 혈마왕에게 던지고는 편복마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편복마왕의 쌍영편류가 은태정의 오른 발목과 왼쪽 손목을 잡으며 그의 얼굴에 안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헉헉! 이제 끝이다!”
하지만 그의 바램은 간단히 무산 되었다. 왼발을 들어 편복마왕의 채찍을 밟은 은태정은 빠른 속도로 채찍을 밟으며 다가왔다.
쿵.
게다가 밟는 걸음걸음이 진각이었다. 편복마왕은 자신의 채찍이 이렇게 질긴 것이 정말 이렇게 원통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품으로 다가온 은태정의 발이 자신의 복부에 박힐 때 조그만 녀석의 발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것에 절규하며 의식의 끊을 놓았다.
“제길!”
은태정은 멈춰 서서 여유 있게 은월마왕과 혈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하고서는 곧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은태정을 향해 달려왔다.
“혈풍환!”
“은월삭!”
은태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혈풍환의 기세를 와선파천지로 와해시키고 몸을 날리던 은태정의 인상이 살포시 구겨졌다.
“이 자식 들이!”
자신의 코앞으로 들이닥친 둘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외침이 있었다.
“수라의 뜻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폭멸뢰!”
콰콰콰쾅!
주변 이십여 장을 휘몰아치는 강기의 폭풍에 수라천마대와 혈천문의 후미가 쑥대밭이 되었다. 은태정은 자신을 감쌌던 은빛의 강기를 풀어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죽을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검마도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수라마교의 폭멸뢰라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의 혈맥에 자연지기를 담아 폭주시키는 기공이었다. 수라마교에서도 그 기술을 익힌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고급 기공이었다. 적어도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기에 심검에 들기 전에는 배워도 펼칠 수조차 없는 무공이었다.
그런 폭발의 와중에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자 그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은발의 소년을 발견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검마도주의 시선이 비풍십이검과 수라마교의 마왕들의 결전을 향했다. 수적으로 많은 자신들의 승리가 자명했다.
검마도주는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그럼 잠깐 놀아볼까?”
“아버님?”
영호천은 검마도주가 표홀히 날아올라 은빛의 머리를 한 소년을 향해 가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영호현의 시선도 그들을 향했다. 심검의 경지에 들었던 영호천이야 방금 전의 상황을 대충이나마 알았지만 영호현은 무언가 빛에 휩싸인 채 치열하게 움직이던 곳이 폭음과 함께 깨끗해지자 오히려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