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89화 (189/194)

(189)

백선후는 유세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의 냉담한 모습에 차마 웃으며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 덕에 회의실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화로에 타오르는 불길도 왠지 힘을 잃어 가는 듯 했다.

유세운은 잠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면면히 살펴보았다. 일궁 이문의 현 문주 밑 가장 주축이 되는 실력자들이었다. 지금 현 무림에 남아있는 강환 이상의 고수는 다 모여 있는 듯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심검의 고수를 제외하고 생각할 문제였다.

은태정의 손에 죽여도 좋으니 심검에만 도달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육우령과 곽부설의 안부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부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들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심검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유세운은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수라마교의 부활을.”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모여 있는 거 아니겠소.”

천룡문주 천룡신권(天龍神拳) 헌원백의 말에 유세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숨어있다는 말이 맞겠죠.”

유세운의 말에 헌원백이 불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세운은 헌원백의 분노하는 모습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유세운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아직 못 들으신 겁니까? 수라마교의 전력은 광검의 고수 한 명에 심검의 고수 열일곱이라는 것 말입니다.”

유세운의 한마디는 좌중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우는 것과 같았다.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지금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온단 말인가?”

유세운은 여기서 결국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정보를 흘렸으니까요.”

“지금 제 정신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헌원백을 향해 유세운의 시선이 향해졌다. 헌원백은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길 한번 받았을 뿐인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말은 마치 이곳에 숨어 있으면 무엇인가 수라도 나온다는 말처럼 들리는 군요.”

유세운의 말에 좌중은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유세운은 문상 초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심검 이상의 고수들은 광오문에서 막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면 그 피해를 감당하기 힘들겠지만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지금 모인 병력의 짜임새 있는 운용은 문상님이 해주시죠.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유세운은 그렇게만 말하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이곳에 있어봐야 아무 해결책도 나오지 않았다. 가서 사부와 함께 육우령과 곽부설을 닦달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세운아.”

유세운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동철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곡차나 한잔 할까?”

유세운의 말에 동철은 밝게 웃음을 지었다. 동철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세운은 곧 낯익은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까치집을 한 복상이 웃으며 유세운을 반겼다.

“하하하. 안녕하시오.”

저번의 만남에서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던 복상이었지만 유세운은 별 상관없이 동철과 죽엽청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안주 따위는 필요 없었다.

“네가 돌아오다니 아직 우리의 운이 다한 건 아닌 가봐.”

동철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이번 일은 나도 솔직히 장담하기 어려워서.”

유세운의 말에 복상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회의장에서 한 말 정말이오?”

유세운은 복상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럼 그런 회의장에서 농담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

유세운의 물음에 복상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느꼈다. 방금 전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남아있는 강호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었으니까. 유세운은 남아있던 죽엽청을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께.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서.”

“응.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유세운은 동철을 향해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은태정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던 유세운은 자신의 앞을 막는 여인을 보고 의아해했다.

“무슨 일입니까?”

“고맙다는 말을 드리려고요.”

청의문주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고맙다는 거죠?”

조예림은 유세운의 물음에 그저 얼굴을 붉히면서 작게 말했다.

“유문주님 덕에 유공자가 무사히 돌아왔으니까요.”

유세운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조예림을 바라보다가 언뜻 스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거라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세운은 조예림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지금은 일이 바빠서.”

“예.”

옆으로 비켜서는 조예림을 지나치면서 유세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대단한데? 언제 저렇게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 거지?”

두두두두.

마차 안에 누워있던 단우태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혈륜마 황형산의 얼굴에는 살기만이 풀풀 날렸다. 오른 팔이 있어야 할 곳이 가볍게 펄럭이고 있었지만 심검에 이른 그의 기세는 꽤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혈천문의 전 문도가 같이 하겠소.”

단우태는 솔직히 이런 제의 자체가 귀찮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 쪽에 광검에 이른 고수도 있다고 하니 수라마교 대신 선공을 취하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혈천문에게 선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알겠소.”

마차의 문이 덜컹거리고는 혈륜마 황형산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단우태는 마차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비록 황형산이 저렇게 말을 하고는 갔지만 지금의 혈천문은 외문의 무인들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문의 고수는 하나 남김없이 이번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혈천문의 외인의 무사들이라면 정파 쓰레기들과 어울릴 만 하겠지.”

단우태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남았지?”

“삼 일이면 충분히 도착 할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단우적의 말에 단우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삼 일이라…”

“뭐?”

유세운은 자신을 찾아왔다며 강남의 군소방파 무인들 오백 명의 대표로 온 뇌종문의 정무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정무는 긴장으로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검마도의 무인들이 모두 이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세운은 자기도 모르게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육우령과 곽부설을 거의 반죽음 상태로 몰고 가던 은태정도 정무의 말에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검마도의 전력이야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일단 광검에 이른 고수 한 명이 있는 것만으로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까?”

유세운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수라마교의 열일곱 명의 심검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광검에 이른 사부 은태정과 수라마교주와의 일전도 문제였다. 사부가 숙원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아직 겨루어 보지 않았으니 그들의 승부도 점칠 수 없는 이 때에 검마도가 움직이다니.

철마성을 단 둘이서 와해시킨 것만 봐도 쉽지 않은 상대들이다. 그런 그들마저 이곳으로 온다는 이야기에 유세운은 결국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악! 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유세운은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광검을 이루고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것은 없을 줄 알았더니 일은 산 너머 산이었다. 유세운이 눈을 감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하자 정무도 곧 돌아갔고 육우령과 곽부설의 수련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저들이라도 어서 심검에 들어야 무언가를 계획해 볼만했다.

유세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백연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운 오라버니.”

“괜찮아.”

웃음을 지어 보이던 유세운은 백연혜의 다음 말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혈천문도 들이 모두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해요.”

“무슨 소리야? 그 때 분명히 해체하라고 했는데.”

“그게 태상문주인 혈륜마 황형산이 돌아와서 그들을 다시 규합한 것 같아요.”

“황형산?”

되묻던 유세운은 황형산에게 사로잡혔었다는 백연혜의 말을 기억해내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잘 됐네.”

기뻐하는 유세운을 보며 백연혜는 씁쓸히 웃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해도 상대해야 될 적은 계속 늘어만 가고 있었다. 유세운은 백연혜를 살며시 안아주며 속삭였다.

“아무 걱정 하지마. 내가 다 해결할게.”

“미안해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서.”

백연혜의 말에 유세운은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도병우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유세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불러서는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못 들었어?”

도병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제가 제대로 들었나 해서 물어 본 겁니다.”

“응. 제대로 들었어. 무슨 수 좀 내봐.”

도병우는 태연히 말하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니 지금 이곳으로 오는 병력만 해도 혈천문에 수라마교에 검마도의 무리들까지 오고 있었다. 검마도의 전력은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를 내라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며?”

“적을 모르지 않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도병우를 바라보는 유세운의 시선은 싸늘했다.

“백전 구십구승을 목표로 작전을 좀 짜봐.”

“어디 전력이 비슷해야 그나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너 계속 소리 지를래? 가뜩이나 문제가 많아서 짜증나 죽겠는데.”

유세운은 말 뿐이 아니라 기세도 같이 일으켜 더 이상 도병우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세운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쳇! 누가 한꺼번에 몰릴 줄 알았나.”

도병우는 유세운의 말에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오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십니까?”

도병우의 물음에 유세운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 늦어도 삼 일이면 도착한다고 하던데?”

“크으윽!”

도병우는 가슴을 움켜쥐며 방에서 나갔다. 유세운은 묵묵히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처럼 가서 들쑤셔 놀 수도 없고.”

예전 동무벽과 관백을 데리고 북천방을 습격하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입맛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광검에 이르렀다. 괜히 갔다가 부딪치게 되면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많았다. 유세운은 도병우에게 맡겼으니 상관없겠지란 생각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번에 몰려오는 듯 했다.

하룻밤 야숙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검마도주는 영호천과 영호현을 불렀다. 검마도주는 영호현을 보고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크흐흐. 간악한 수라마교의 녀석들이 우리랑 같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구나.”

영호현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오백 년 전에 검마도에 있었던 참사의 가장 주된 선동자가 수라마교의 인물들이었다. 광검에 이르는 경지의 무공이 다시 나오는 것을 두려워 해 다른 육대세력을 선동했다는 것은 검마도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지금 검마도주 또한 정파의 무리를 쳐야 할 지 수라마교의 인물들을 쳐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영호현은 고민을 하더니 곧 결정을 내렸다.

“가만두면 어차피 수라마교와 정파의 남은 인물들이 싸우게 돼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정파에서 수라마교의 힘을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당연하지. 수라마교의 부활은 천마광휘의 등장과 같으니.”

영호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수라마교와 정파의 무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그 때 공격을 하도록 하지요.”

“무슨 말이냐?”

“어차피 심검 이상의 고수의 숫자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저들이 정파를 공격하기 위해선 그들도 앞으로 나서야 하겠지요. 그 때 뒤를 노리는 겁니다.”

“흐흐흐. 하긴 수라마교주의 목만 취하면 나머지는 일도 아니니까.”

검마도주의 말을 들으며 영호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밥값이 되었는지 모르겠소. 어디까지나 당신이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말이오.’

영호현은 살아있을지도 모를 유세운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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