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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빨리 빨리 안 걸어?”
싸늘하게 들리는 유세운의 말에 같이 말을 타고 가던 광오문도들은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아악! 너 같으면 며칠씩이나 말이랑 같이 달릴 수 있겠냐!”
아직도 진이 빠지지 않았는지 대찬 목소리의 황혜란을 보며 모두들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보다 못한 백연혜가 유세운에게 다가갔다.
“운 오라버니. 그래도…”
“아니! 이 일 만큼은 안돼!”
유세운은 단호하게 백연혜의 말을 끊고 말안장에 묶여 있는 황헤란의 채찍을 잡아당겼다.
“아아악!”
창운산장을 향해 이동하는 일주일 째 자신의 채찍에 양손을 묶인 채 끌려오던 황혜란이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넘어진다고 유세운이 말을 멈출리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황혜란은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유세운에게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고는 손을 채찍에 묶여 다시 끌려가고 있었다. 이미 양쪽 손목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유세운을 끝도 없이 저주하면서도 황혜란은 다시는 자신의 채찍을 교룡의 가죽으로 된 거는 안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유세운은 옆에서 말을 몰아오던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
도병우는 유세운의 물음에 흠칫 놀랐다. 황혜란을 보며 문주의 잔인함을 느끼다가 그의 질문에 놀란 것이었다.
“정보를 흘렸으니 아마도 창운산장으로 올 것 같습니다.”
유세운은 은태정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부님.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흥! 네가 열심히 뛰어야지.”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에게서 좋은 말을 듣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은태정이 있으니 수라마교를 대충이라도 상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의문의 청혈림에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던 단우태에게 단우적이 다가왔다.
“교주님.”
“무슨 일이오?”
단우태는 자신의 휴식을 방해받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수라의 동굴에 자신을 집어넣은 것도 아버지였다. 단우적의 야망에 자신이 희생된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불쑥불쑥 들어 예전같이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단우적은 천천히 보고를 올렸다.
“일권무적 유세운이라는 자의 행방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찾는 것은 그자의 행방이 아니잖소. 우리가 찾는 것은 숨어버린 사천의 정파 무리들이 아니오?”
단우적은 단우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유세운이라는 자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정파 무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우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단우적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얻은 정보요?”
“광오문에 심어 놓았던 첩자에게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단우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연락이 끊겨서 죽은 것 같다고 보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예상과 다르게 다시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단우태는 혈왕고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치유법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기한을 몇 주나 지나 살아 있는 자가 있다는 것에 무언가 의혹의 냄새를 맡았다.
단우적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흑무기마대가 완전히 해체 되었습니다.”
“뭔 소리요?”
단우적도 이번 보고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천궁에서 있던 공개 처형 날. 일권무적 유세운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잡으려고 올라온 흑무기마대장과 청운마왕이 그의 손에 죽고 흑무기마대는 그 자리에서 해체 되었답니다.”
“흑무기마대장과 청운마왕이 유세운의 손에 죽었다고?”
심검의 고수가 둘이다. 더욱이 청운마왕이라면 심검에서도 높은 경지를 이룩했던 자. 그런 둘이 당했다는 말에 잠시 당황했다. 단우적의 말이 이어졌다.
“그곳에 있던 혈천문도 들의 말을 통하면 그자도 광검에 이르렀답니다.”
단우적의 말에 단우태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검마도의 일원 이었다고 말하는 거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지금 장난 하자는 거요? 천륜광검이 동시대에 두 명이나 이룰 수 있을 만큼 쉬운 거요?”
자신이 수라의 뜻을 이으려 얼마나 피나는 고생을 했는데 검마도의 천륜광검을 익힌 자는 동시대에 둘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 검마도주의 향방에도 잔뜩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자신의 상대로 전혀 부족함이 없을 자였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곳에서 광검의 경지에 이룬 자가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천륜광검을 익힌 자가 둘이나 된다는 말인가?
“무광 은태정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무광 은태정이라면 자신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자다. 전대의 천하제일고수. 하지만 그도 고작 심검의 경지에 밖에 들지 못했던 자다. 단우태는 인상을 찌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가 정파 무림인이 숨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소?”
“예.”
“그렇다면 만나보면 알겠지. 전 병력에게 명령하시오.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단우적의 뒷모습을 보면서 단우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천마광휘를 의외로 일찍 실험해 볼 상대를 만날 것 같아 약간의 흥분이 일었다.
육백 년에 걸쳐 강호의 마인들을 지배하던 철마성. 철마성의 태상성주가 기거하던 태상각에서 차를 마시던 옥빛의 머리를 한 검마도주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느냐.”
“예. 아버님.”
고검을 한 자루 허리에 차고 있는 영호천을 보며 검마도주는 흡족해 했다.
“내 비풍십이검주에게 얘기는 들었다만 정말 너의 성취가 예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구나.”
“아버님의 대공 성취에 비하면 보잘것없습니다.”
영호천의 말에 검마도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걱정 말거라. 너의 자질이라면 분명 천륜광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곧 천하를 너에게 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
“예.”
“물러가도 좋다.”
“그럼 쉬십시오.”
영호천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태상각을 빠져 나왔다. 철마성에는 이미 검마도의 고수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밖으로 걸어 나온 영호천은 자신을 이곳으로 돌아오게 한 인물을 보았다. 머리를 내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동생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아!”
와락! 껴안는 영호천의 등을 두드리며 영호현은 입을 열었다.
“형님.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십니다. 아니 이제 완전한 심검의 경지에 드셨으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군요.”
영호현의 말에 영호천은 웃음을 지으며 그저 등을 두드려 줄 따름이었다. 영호천은 잠시 영호현에게서 몸을 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로 가리고 있지만 흉터가 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지는 않으냐?”
영호천의 물음에 영호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상처 입은 얼굴을 만졌다.
“이것 말입니까?”
“그래.”
“하하하. 당시에 입었던 아픔에 비하면 지금의 것이야 모기가 문 것처럼 가볍지요.”
영호천의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당시의 아픔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갔다. 영호천은 웃으며 영호현과 같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너를 찾아 강호를 이 년이 넘게 헤맸다.”
“형님한테 만이라도 연락을 할 것을 그랬군요.”
“그러게 말이다. 너 내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었지?”
“하하하. 그럼 천하제일고수로 소문 난 낭인천주를 모를 수야 없지요.”
영호현의 웃음에 영호천은 씁쓸히 웃었다.
“천하제일고수는 무슨… 내가 강호에 나가 있을 때 만난 일권무적 유세운이 나보다 더 강할 것 같았다.”
영호현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유세운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하하하. 당연하지. 웃는 모습이 너를 닮아 처음부터 많이 친해졌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광검의 경지를 밟는 듯 하더니 주화입마를 당해서 치료한다고 떠났었다.”
“광검의 경지를요?”
영호현의 물음에 영호천은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했었지. 북천방주를 단번에 해치운 그 빛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그렇군요. 저도 유세운이라는 자를 만나 보았었습니다.”
“그래?”
영호현은 영호천의 물음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식객으로 있던 곳이 광오문이었거든요.”
“뭐야?”
어이없다는 듯이 물어오는 영호천에게 영호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이랑 알고 지내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알았어도 연락도 안했을 거면서 말은 그렇게 하는구나. 하하하.”
영호현은 정말 사심 없이 좋아하는 영호천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숙소로 걸어가던 그들의 앞을 비풍십이검주가 막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도주님이 찾으십니다.”
영호천과 영호현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만났던 아버지가 왜 자신들을 찾는지 알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창운산장에 도착한 유세운은 뜻밖의 소식에 인상을 찌푸렸다.
“영호형님이 안계시다고?”
낭인천의 단량과 서중을 보며 유세운이 하는 말에 그들은 당황했다. 자신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느날 불쑥 사라진 영호천을 그들이 어떻게 한 것도 아니지만 유세운의 기세를 받으며 당황하고 있었다.
단량과 서중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놀라워했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기세였다. 괜스레 말 한마디 잘못 꺼내면 그대로 심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상상도 했다.
유세운은 돌아오자마자 영호천을 찾았다. 백연혜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창명백검수만 보낸 그에게 화가 나 있어 같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백선후보다 영호천을 만나는 것이 급했다. 도병우에게 듣기로 수라마교에 있는 심검의 고수만 열여섯에 전 수라성주도 심검에 들었다고 했으니 열일곱 명이다. 게다가 광검에 이르렀을 교주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록 이쪽에 광검에 이른 고수가 둘이 있다지만 고수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심검에 든 영호천에게 기대를 했지만 그 또한 자리에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난 영호천이 얄밉게 까지 느껴졌다.
“사부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유세운의 물음에 은태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얼 그리 고민하는 거냐?”
“아니 그럼 고민 안하게 생겼습니까!”
유세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은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내가 천마광휘를 상대해 준다니까 그러네.”
“아악! 그거야 사부가 바라던 숙원이니 그렇다 쳐도 저 혼자 심검의 고수 열일곱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입니까?”
유세운의 말에 같이 자리해 있던 단량과 서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심검의 고수 열일곱이라니. 예전 유세운이 심검에 이르러 혼자서 하고 다닌 만행을 생각하건데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심검의 고수가 그렇게 많습니까?”
서중의 물음에 유세운은 그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지금 그것 때문에 이 걱정 아니냐!”
유세운은 괜히 정보를 흘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찾아가서 하나씩 암살하는 편이 훨씬 안전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은태정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떻게 될 거다. 아니면 그들이 올 때까지 심검의 고수를 만들던지.”
“아니 심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집니까! 그 정도의 고수를 어떻게 만들어요!”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유세운을 향해 결국 은태정은 주먹을 휘둘렀다.
빠악!
“크윽!”
아무리 같은 광검에 들었다지만 흥분해 있는 유세운이 은태정의 손길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저기 있지 않냐!”
은태정이 가리키는 곳에 있던 곽부설과 육우령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자신들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는 유세운의 얼굴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