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은태정이 무사히 인질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을 본 유세운은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표출했다.
“그때 분명히 느꼈을 텐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혈천오로의 강환도 그 뒤를 이어 뻗어오는 열명의 검사가 뿜어내는 경력도 이미 유세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용서는 없다! 은광천세!”
슈아악.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속도로 주변의 자연지기가 모여들었다. 이미 지척에 다다른 강환을 보며 유세운의 전신에서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번쩍.
폭발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대번에 주변 십여 장을 무의 공간으로 만든 유세운은 주저 없이 흑무기마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출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저번에는 비실대더니 심검에 들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군.”
혈극살대의 수급을 베던 출파가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거침없이 달려오는 출파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혈극살대원들을 마구 잡이로 베며 달려왔다. 유세운의 눈빛은 싸늘히 식었다.
“네놈은 오늘 곱게 죽을 생각도 하지 마라.”
유세운의 말을 들은 출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크하하하. 네놈의 목이나 걱정해라!”
은태정은 가볍게 한손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혈천문 내문의 고수들을 상대하며 묶여 있던 셋의 밧줄을 풀고 제압된 혈도를 풀어줬다.
핏빛 손을 가진 채 숨을 헐떡이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혈천문의 부문주격인 혈수성의(血手星義) 노격설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혈악구마(血岳九魔)와의 연수합격을 펼치고 있음에도 소년의 한손에서 펼쳐지는 무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벌써 혈악구마 중 셋이 죽어나갔다.
은태정은 혈수성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망발을.”
은태정의 말에 혈수성의 노격설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나이 이제 아흔 살이 되었다. 그런 자신에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런 미친!”
혈수성의 노격설의 혈수가 빠르게 뻗어왔다. 은태정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콰앙!
“커헉!”
노격설은 거침없이 뒤로 밀려나며 피를 토했다. 선혈을 내뿜는 노격설의 뒤로 혈악구마 아니 이제 혈악육마가 된 그들의 강환이 들이 닥쳤다.
은태정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깟 잔재주로 어르신을 재밌게 할 수 있겠느냐?”
귀찮다는 듯이 뻗은 은태정의 일권에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마치 물 안에 들어간 듯한 느낌.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경력에 혈악육마는 비명도 채 지르지 못했다.
은태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꺄악!”
황혜란이 다급히 저항했지만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거력이 담겨 있는 허공섭물이었다. 대번에 은태정에게 목을 잡힌 황혜란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태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며칠을 밤을 세워가며 달려왔다. 너의 처우는 내 제자에게 맡기마.”
은태정의 말에 백연혜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무광 은노선배님?”
“허허허. 제자의 연인이라더니 제법 똑똑하구나.”
그의 말에 혈수성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여태껏 지켜보던 혈령마왕 황정회도 황혜란이 잡히는 순간 출수 하려다 그 말에 멈춰 섰다. 은태정은 주변을 훑어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너는 건드려서는 안 될 아이를 건드렸다.”
“무슨…”
황정회의 대답을 듣지 않고 은태정은 인질로 잡혀 있던 일행도 모두 허공섭물로 띄우고는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허공답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은태정은 높이 날아올랐다. 황혜란이 잡혀 있어 화살도 쏠 수 없었다. 황정회의 당황한 시선은 유세운이 있는 전장으로 돌려졌다.
달려오는 출파를 보며 유세운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그깟 실력으로 감히 좌우호법을 노렸단 말이냐?”
“건방진 소리! 죽어라!”
이미 그들을 가로막던 이들은 모두 비켜났다. 마주 달려가던 출파의 장창이 허공을 격하며 내력을 방출했다.
“차핫! 무영섬뢰창(無影閃雷槍)!”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가 담긴 일수. 유세운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어깨를 디밀었다.
콰앙!
“크윽!”
와선형으로 발출된 진기에 밀린 출파의 말이 뒷걸음 질 쳤다. 유세운은 십 장의 거리를 대번에 줄이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유세운의 오른 발이 출파의 말 머리를 밟고 왼 발을 올려 찼다.
부웅.
“타핫!”
다급히 장창을 들어 발을 향해 찌르던 출파의 두 눈에 유세운의 발에 맺힌 강환이 보였다.
콰앙!
“크헉!”
뒤로 날아가는 출파의 눈에 자신의 애마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가볍게 밟은 유세운의 내력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크아악! 죽인다!”
유세운은 출파의 옆으로 달려오는 곰방대를 내뻗는 사내를 보았다. 그 또한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자. 도병우의 얘기로는 청운마왕이라는 비천십팔마왕중 한 명이라는 자가 보였다.
위험함을 느꼈는지 둘의 합격이 이루어졌다.
“차핫! 흑왕삼연격!”
“청뢰섬(靑雷閃)!”
전신을 옭아매는 출파의 기세와 그 뒤를 있는 흑색 강기를 머금은 장창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마저 푸른 강기에 둘러싸인 채 곰방대와 신검합일 이루며 섬전처럼 쏘아져 오는 청운마왕도 보였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심검에 이른 고수들의 연수합격. 둘이 미리 손을 맞춰 봤을 리 없음에도 피할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는 사람을 잘못 골랐어.”
유세운의 신형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출파의 기세쯤이야 전신에서 뿜어내는 자연지기로 가닥가닥 잘라내고 심장을 노리며 찔러 들어오는 곰방대의 끝을 향해 섬광마멸지를 펼쳤다.
유세운의 섬광마멸지가 청운마왕을 감싼 푸른 강기를 가르고 들어갔다. 대번에 곰방대가 반으로 갈라졌고 유세운은 달려가는 기세 그대로 청운마왕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곰방대를 가른 섬광마멸지에 오른쪽 어깨를 관통당한 채 목을 잡힌 청운마왕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진정 광검인가?’
유세운은 흑왕삼연격의 찔러오는 장창을 향해 일권을 내뻗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일렁이게 만드는 경력의 힘에 장창의 일격이 와해됐다. 이어지는 이격은 유세운의 손이 창대를 움켜쥐면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빠각.
유세운의 오른 발이 내뻗어져 출파의 오른 무릎을 부셔버렸다.
“크윽!”
유세운은 한걸음 다가가면서 진각을 내딛었다.
쿵.
주변의 땅이 울린다는 착각에 청운마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고 출파의 품으로 파고든 유세운의 왼손 주먹이 양 어깨를 강타했다.
빠각.
“커헉!”
신음성을 토하는 출파의 성한 왼쪽 다리를 유세운은 가볍게 다리를 들어 밟아버렸다.
콰직.
비명을 지르려는 출파의 입을 향해 유세운의 왼쪽 팔꿈치가 내리 꽂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출파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은 유세운은 청운마왕을 들어 올렸다.
“네놈이 청운마왕이냐?”
심검을 넘어선 그들에게는 제법 초식을 나누는 시간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검고 푸른빛이 번쩍이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청운마왕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광검의 경지가 이것이오?”
유세운은 청운마왕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것이 광검이다. 심검의 경지에서 자신의 초식에 몸을 맡기는 순간에도 너희를 요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유세운은 더 이상 청운마왕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발아래 깔린 출파를 향해서였다.
“먼저 가 있어라. 뒤따라 갈 자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출파를 밟은 발에 힘을 주는 순간 청운마왕의 전신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수라의 뜻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폭멸뢰(爆滅雷)!”
콰콰쾅.
청운마왕의 전신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푸른 강기의 덩어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주변 십장에 몰려있던 자들을 모두 죽음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 몰려있던 흑무기마대원 두 개의 부대와 혈극살대 전원이 한줌 핏물로 변했다.
은빛 강기로 몸을 보호한 유세운은 발밑에 깔린 출파의 시체를 보았다. 이미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유세운의 입에 잔혹해 보이는 미소가 어렸다.
“수라마교? 감히 내 복수를 이따위로 망쳐 놔?”
유세운의 시선은 주변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흑무기마대원들을 향했다. 출파를 향했던 복수심은 자신의 복수를 망쳐버린 청운마왕과 그가 있던 수라마교를 향해졌다. 유세운은 천천히 돌아서서 혈천문도 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흑무기마대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찰팍. 찰팍.
핏물로 가득한 대지에 유세운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혈천문의 정예들은 모두 좌우로 비켜났다. 그런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유세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세운의 시선은 단 위에 올라가 있는 중년 사내를 향했다. 척 보기에도 그가 이곳의 수장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걸음을 옮기던 유세운을 막는 자들이 보였다. 가슴에 새겨진 혈왕이라는 두 글자. 혈왕단의 고수들 팔십여 명이 유세운과 혈천문주 사이를 막았다.
“비켜라.”
유세운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지만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세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좌우호법의 복수는 수라마교에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감히 연혜를 잡아다가 공개 처형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너희의 문주는 살려 둘 수가 없다.”
혈수성의 노격설은 이미 유세운을 막을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소리쳤다.
“혈천문과 이미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존재다! 쳐라!”
혈왕단 팔십여 명의 무사와 혈수성의 노격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유세운은 피식 거렸다.
“건방지군! 은광천세!”
번쩍!
은광이 번쩍이고 유세운의 앞을 가로막던 혈왕단의 인물과 노격설은 사라졌다.
유세운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공포에 젖은 황정회에게 다가간 유세운은 그의 두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철마성에서야 현상금 문제여서 봉문 시켰지만 지금 네가 한 짓은 그보다 더해.”
유세운은 가볍게 발을 들어 황정회의 양 무릎을 밟아버렸다.
콰직.
“으윽!”
짧은 신음성만을 내며 쓰러지는 황정회의 단전에 발을 올린 유세운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명심해. 이제 강호상에 혈천문이라는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콰직.
“크아악!”
단전을 파괴되는 고통 앞에서는 황정회도 비명을 내질렀다. 유세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혈천문도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 귀에 다시는 혈천이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곳이 어디든 가서 모조리 죽여주마.”
유세운의 살기어린 목소리가 창천궁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유세운의 시선은 흑무기마대를 향했다.
“흑무기마대 또한 이곳에서 해체된다. 너희 또한 초원이든 어디든 다시 한번 모인다면 그곳에 내가 직접 가겠다.”
유세운의 말에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유세운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발을 굴러 서문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천여 명이 죽어나간 이곳의 피비린내에 유세운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록 자신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문에 모여 있던 창명백검수와 그들 사이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의 백연혜를 보는 순간 유세운은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려서는 유세운을 향해 백연혜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약속을 지킬 줄 알았어요.”
품에 안긴 백연혜의 체온을 느끼며 유세운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어느새 유세운의 두 눈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복수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유세운은 백연혜를 껴안으며 다시 한번 복수심을 불태웠다.
“미안해. 늦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백연혜의 작은 목소리가 유세운의 품 안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