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두두두두두.
거침없이 달리는 흑색의 기마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일천기의 기마가 지나간 대지에는 뿌연 먼지구름 만이 홀로 남았다.
선두에서 달리던 출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정보 확실한 거냐?”
“아마 그럴걸?”
태연히 답하는 청운마왕의 얼굴을 바라보던 출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위 정보라면 너라도 용서 없다.”
“헛소리 하지 말고 말이나 몰아.”
청운마왕은 달리는 기마 위에서도 여유롭게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 창천궁이 있는 무산까지는 이제 반시진이면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들이 벌이는 공개 처형 따위야 관심이 없지만 그곳으로 일권무적 유세운이 온다는 정보가 다시 온 것은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았지?’
광오문에 심어 놓았던 도병우라는 첩자가 다시 보고를 올렸다는 말에 서둘러 출발했지만 생각해보니 혈왕고에 당해도 이미 당했을 시간이었다. 청운마왕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변수는 없다. 나타나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청운마왕은 잃어버린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출파를 바라보았다. 장창을 비켜들고 달리는 그의 두 눈에는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이곳으로 출발한 십 일 가까이 저렇게 살기를 내뿜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익.
“마지막으로 마시는 용정차의 맛이 어때?”
문을 열고 들어서는 황혜란을 보며 백연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말한 공개처형의 시간이 고작 한 시진 밖에 남지 않았다. 유태청과 유주란은 결국 그곳에 가야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연혜의 태연한 모습에 황혜란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나중에는 살려달라고 눈물 흘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다 나는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황혜란은 변하지 않는 백연혜의 얼굴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무슨 말이죠?”
황혜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무산에 창천궁의 무리로 보이는 이들이 숨어 있다고 하더군.”
황혜란의 말에 백연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곳에 온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황혜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게다가 인원도 한 백여 명 밖에 안 된다고 하더군.”
황혜란의 말에 백연혜의 머릿속에는 여운의 이름이 떠올랐다. 어쩌면 오라버니도 같이 왔을지 몰랐다. 안절부절 못하는 백연혜를 보며 황혜란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정확히 누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오에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몸이랑 따로 떨어져 있겠지만 말이지.”
“그런…”
말을 잇지 못하는 백연혜를 두고 나가는 황혜란의 말이 방안에 울렸다.
“마지막으로 마시는 거니 남기지 말아.”
높이 뜬 해가 점점 정남에 이르러 가는 모습을 보며 출파는 청운마왕을 쏘아보았다. 하나 남은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 어떻게 된 거냐?”
남문 앞에 도착해서 정오가 되기를 기다리던 출파가 결국 참지 못하고 청운마왕을 쏘아보았다. 출파의 말에 청운마왕은 여유 있게 곰방대를 빨았다.
“아직 정오가 된 것도 아니잖은가?”
“그래봤자 일각 밖에 남지 않았어!”
청운마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무슨 소린가? 일각이면 어설픈 고수 백 명의 목을 베고도 남을 시간이거늘.”
“지금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거냐?”
출파의 장창에 강기가 어리는 모습을 보고 청운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던 청운마왕과 출파의 귀로 제 일 부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이 있습니다.”
특별한 상황이 오면 반드시 보고하라고 한 덕에 그들의 시선은 제 일 부대장을 향했다. 출파는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은발에 은색 눈썹을 한 사내가 보였다.
“뭐하는 놈이냐?”
유세운은 일천의 기마 사이로 나오는 출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불같이 일어나는 살기를 참았다. 어차피 죽게 될 놈이었다.
“왼쪽 눈알은 어디다 두고 온 거냐?”
유세운의 물음에 출파의 안색이 금세 붉게 변했다.
“뭐야? 죽고 싶은 거냐!”
출파의 뒤에 서 있던 청운마왕이 안색이 미미하게 떨렸다. 머리색과 눈썹의 색이 바뀌는 것은 광검에 이른 자들에게나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수라마교의 교주도 혈발에 혈미를 하고 있으니 그리 틀리지 않은 말 같았다.
유세운은 출파를 보며 한자 한자 씹어 뱉듯 말했다.
“내가 바로 광오문의 문주 유세운이다.”
유세운의 말에 출파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크하하하. 머리색을 바꾸고 와서 잠시 못 알아 봤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찢어 죽여주마!”
출파의 장창이 높이 들렸다 유세운을 가리켰다.
“쳐라!”
유세운은 출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를 잡는다면 한번 붙어 줄 수도 있다.”
유세운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창천궁의 남문을 향해 달렸다. 출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도망을 가 봤자다. 눈앞에 보인 이상 놓칠 성 싶으냐!”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무리들을 보며 유세운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잠깐의 시간만 끌어주면 되었다. 유세운은 달려가다 남문을 지키고 있는 혈천문의 무사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등에 커다란 혈겸을 매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혈겸천사대…”
유세운은 혈겸천사대를 보자 절로 동무벽과 관백이 떠올랐다. 유세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선파천지를 쏘아댔다.
콰콰쾅.
“크아악!”
“켁!”
비명 소리들과 함께 폭사(爆死)되듯 죽어나가는 흑무기마대원들을 보며 출파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유세운은 거침없이 달려가며 양손에 강환을 만들어냈다. 강렬한 은빛의 강환을 혈겸천사대를 향해 집어 던지며 유세운의 손은 다시 뒤를 향해 와선파천지를 펼쳤다.
콰콰쾅!
“크아악!”
앞뒤로 들려오는 비명소리. 유세운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출파의 옆에서 말을 달리던 청운마왕은 불안한 생각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진세를 발동한 채 달리는 흑무기마대원들을 보지도 않고 격살시키는 능력은 자신이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제길! 몸을 빼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출파의 옆에서 달리고 있던 그에게 다른 결정은 내릴 수 없었다. 청운마왕은 한숨을 내쉬고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
“어쩔 수 없군.”
달려가던 유세운의 손에서 강기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갔다. 은빛의 안개가 깔리듯 뻗어가는 강기 앞에 혈겸천사대 인물들은 다급히 피했다. 피하지 못한 자들은 대번에 목숨을 잃었다.
콰앙!
창천궁의 거대한 남문이 산산조각 나며 안으로 날아갔다. 유세운은 거침없이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내성의 문까지 겹겹이 포진해 있는 혈천문의 무인들이 보였다. 유세운은 잠시 걸음을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출파의 독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확연히 보였다. 유세운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광오문주 유세운이다.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유세운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창천궁의 구석구석 까지 퍼져 나갔다.
공개 처형을 위해 만든 단 위에 묶여 있는 백연혜와 유태청, 유주란의 얼굴에 희망이 싹 틀 때 그 옆에서 황혜란이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고 있군. 이곳으로 오는 동안 두 눈으로 확실히 보게 해주지. 눈앞에서 가족과 연인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봐라. 호호호.”
황혜란은 손수 검을 들고 내성의 문을 열라고 명했다.
“문을 열어라! 확실히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예!”
끼이익.
창천궁 내성으로 이어지는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유세운은 그 사이로 보이는 백연혜와 유태청, 유주란을 보았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됐다. 나머지는 사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분명히 경고했다.”
유세운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혈겸천사대의 인물들이 들이 닥치는 유세운을 향해 다급히 혈겸을 휘둘렀지만 간단한 손짓 한번에 모두들 죽어 나갔다.
콰쾅.
“비켜라! 멍청한 것들!”
유세운이 뚫고 지나간 길을 따라 오던 흑무기마대는 앞을 가로막는 혈겸천사대 인물들까지 주저 없이 베며 들어왔다. 간간히 뒤로 내젓는 유세운의 지풍에 흑무기마대원들 만이 죽어 나갔다.
“크아악! 저 자식을 죽여라!”
출파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혈겸천사대의 인물들의 수급을 거침없이 날리면서 앞으로 말을 달렸다. 유세운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혈천문의 무인들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유세운의 눈빛에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다. 동무벽과 관백을 잃으면서 확실히 가슴에 인정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적에겐 죽음을 내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하앗!”
유세운의 입에서 기합성과 함께 뻗어가는 은빛의 강기에 혈겸천사대는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피하지 못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유세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황혜란은 입가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것 같으냐?”
황혜란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에 유세운은 피식 거렸다.
“분명히 말해 두마. 거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저번처럼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뭐야! 그게 가볍다고? 웃기지마. 이것들을 모두 죽인 다음에 너를 채찍에 묶어 몇날 며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 주겠어!”
악에 바친 황혜란의 저주에도 유세운은 태연히 몸을 움직여 착실히 혈천문의 무인들을 척살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막아서던 인물들이 혈겸천사대가 아닌 혈극살대로 바뀌면서 간간히 강기를 뿌리는 적들을 만나 다가오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았다.
백연혜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냥 물러나세요!”
수많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 속에서 유세운이 들을리 없었지만 백연혜는 하염없이 소리를 질렀다.
유세운은 그 순간 백연혜를 돌아보고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연혜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렸다. 저 미소를 다시 보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서도 유세운의 미소가 가슴에 그려졌다.
앞으로 나아가던 유세운은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노인들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상대했던 혈천오로와 그들의 뒤를 이어 몸을 날리는 열명의 검사들을 보고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다짜고짜 혈천문의 무인들을 베던 흑무기마대도 혈극살대의 분노어린 공격에 주춤해 있는 상태였다.
해가 남쪽 하늘 높이 솟아 정오가 됐음을 알렸다.
황혜란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그려졌다.
“호호호호. 유가 애송아! 어쩌면 좋을까? 정오가 돼 버렸어. 너는 이들을 구할 수 없겠구나.”
혈천오로의 강환과 그 뒤를 이어 날아가는 혈영십검(血影十劍)의 검진에서 뿜어지는 경력을 보며 황혜란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황혜란은 강환과 검진의 경력 사이에서 자신을 보고 웃음을 짓는 유세운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당황하며 중얼거리는 황혜란의 머리 위로 한줄기 은빛 섬광이 내리 꽂히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꺄악!”
대번에 들고 있던 장검이 산산조각 나며 그 파편에 상처를 입은 황혜란이 비틀거리는 사이 단 위로 은빛 머리를 휘날리는 소년이 내려섰다.
은태정은 자신을 향하는 혈천문의 내문 고수들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죽여!”
비명처럼 외치는 황혜란의 명을 따라 혈왕단의 고수 열명이 비호처럼 날아올랐다. 하지만 은태정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백연혜를 바라보았다.
“네가 제자의 연인이냐?”
“예?”
당황해 묻는 백연혜는 은태정의 손짓 한번에 터져 나가는 혈왕단의 고수들의 혈우(血雨)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