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복수의 시작.
호북성 무산의 창천궁의 내궁과 외궁 사이에 있는 마을. 창천궁 무사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만 이미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자신들 가족을 죽인 혈천문의 무사들을 저주하면서.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사 층짜리 주루인 창천루의 삼층 구석에 앉은 네 명의 무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미 창천루의 손님은 거의 발을 끊었다. 사람도 거의 없어 삼층 구석에 앉은 이들은 조용히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벌써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유청운의 말에 백연문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까지 병력이 남아있다니 예상외군요.”
혈천문의 본거지를 버린 것인지 이곳에 전 혈천문의 정예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위지평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군요. 저희가 가진 병력이 백 명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저들의 병력이 이천이 넘는데다가 내문의 고수들도 모여 있는 듯 합니다.”
창천루의 루주의 도움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들리는 정보 하나하나 모두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정보들이었다.
백연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흑무기마대가 이쪽으로 움직였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흑무기마대라면 악양에 모여 있지 않았습니까?”
유청운의 물음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떻게 이쪽으로 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백연문의 말에 위지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별 수 없습니다. 내일 정오에 일을 치른다고 했으니 그때가 아마 가장 빈틈이 많을 겁니다. 그때 공격하는 수밖에요.”
“그래야 겠죠.”
모인 네 명의 눈에는 죽음을 결심한 눈빛들이 빛났다. 이미 청명백검수는 모두 무산의 골짜기에 숨어있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았고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었으니 정면 승부를 해야 될 것 같았다.
“주인장!”
일층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좌중은 얼어붙었다. 혈천문이 차지한 이곳에서 저렇게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이가 낯익은 목소리라니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머리에 가득 먼지를 뒤집어 쓴 유세운과 은태정은 옷을 털며 투덜거렸다.
“아! 정말 이거 못해먹을 짓이네.”
“도와주기로 하셨으면 제대로 도와주셔야죠!”
은태정은 자신의 말에 타박을 하는 유세운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자의 가족과 연인을 위해 손을 쓰는 사부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이렇게 도와주다 보면 사부의 숙원도 풀게 될 거라니까요.”
유세운의 너스레에 은태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 그건 그렇고 여기 주인장은 왜 빨리 안와!”
소리 지르는 은태정을 보고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 거렸다. 자신이 길을 모르는 관계로 은태정과 함께 쉬지도 않고 경공을 펼쳐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일단 목이라도 축일 생각으로 성까지 잠입을 했는데 아직 아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사방에 깔린 혈천문의 무사들을 보며 한바탕 할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참았다.
“세운이냐?”
유세운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계단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어? 형?”
유세운은 자신을 보고 있는 유청운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사천의 정예 무사들은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그에 속한 형이 이곳에 어찌 있단 말인가? 유청운은 유세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와 껴안았다.
“세운아.”
“큭! 형 왜이래요. 잠깐만 나 지금 먼지투성이에요!”
유세운의 비명에 가까운 말에도 유청운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삼층에서 내려오던 백연문과 위지남매도 유세운을 보고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유세운은 손을 흔들어 주다가 형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이러고 있지 말고 제 사부님께 인사나 하세요.”
“응? 사부님?”
유청운은 하늘이 돕는다고 느끼며 눈물을 흘리다가 유세운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옆에는 고개를 살며시 들고 있는 은발의 소년 밖에 없어 당황했다.
“사부님이 어디 계시니?”
“크크. 여기 있잖아요.”
유청운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은태정을 가리키는 유세운의 말에 좌중은 모두 놀란 얼굴을 지었다.
“무광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포권을 취하며 당황하는 일행을 보고 은태정은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한번에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들. 흥!”
“에이! 왜 그래요. 일단 올라가서 목이나 좀 축이도록 하죠.”
유세운의 말에 좌중은 다시 삼층의 구석 자리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 창천루의 루주가 다가와 죽엽청을 건넸다.
“무광 노선배님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허허. 자네도 무림인인가?”
은태정의 물음에 창천루주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에 잠깐 무예를 익혔었을 뿐입니다.”
은태정은 피식 웃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 당황한 시선으로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이미 백오십을 훌쩍 넘었을 전설적인 무인이 이제 열두 세살 정도의 소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으니 그 정신적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세운은 죽엽청을 은태정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반노환동해서 그래요. 너무 놀라지들 말아요.”
“헉! 반노환동?”
다들 경악하는 사이 위지청이 유세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오빠 이제는 괜찮아요?”
위지청의 물음에 유세운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답했다.
“그럼 괜찮지. 무슨 일 있을까봐?”
“헤헤. 다행이네요.”
유세운은 백연문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렇게 오시다니 대체 얼마나 온 겁니까?”
혈천문에서 세 명을 구출하려면 최소 이천의 병력은 와야 했다. 하지만 유세운의 물음에 백연문은 안색을 굳혔다.
“창명백검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유세운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지금 수라마교의 부활 때문에 조부님과 청의문과 천룡문의 태상문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들의 유지를 이어 받아 지금 모두 창운산장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백 명으로 이곳에 왔다면 죽으러 왔다는 말인가요?”
유세운의 물음에 유청운이 대신 답했다.
“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태혜검도 이곳에 자리 하지 못했다.”
유청운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이라면 정협련의 부련주에 선발대에서도 낭인천말고 정도문파들의 수장을 맡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창천궁에서는 백연혜가 관련된 일이 아닌가.
유세운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스럽군요.”
은태정은 그런 유세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문의 수좌라는 자리가 그런 거다. 너무 마음쓰지 말아라.”
“아니요! 전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유세운의 대답에 은태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운은 앞에 놓인 죽엽청을 들이 마시고는 백연문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정오에 처형을 시작한다고 해서 그때에 맞춰 저들을 칠 생각이었습니다.”
“창명백검수로요?”
유세운의 냉소적인 물음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세운은 한숨을 푹 쉬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혹시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구출하는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그게 별궁이라고만 알려져 있지. 정확히 어디에 구금되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연문의 대답에 유세운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뇌옥에 가둬놓지 않았으니 그리 심한 대우는 받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백연문은 걱정스레 말을 이었다.
“그보다 지금 이곳으로 흑무기마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크흐흐. 당연히 그래야죠.”
웃음을 짓는 유세운의 분위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예전에 기세를 내뿜을 때와 같은 박력이 느껴졌다. 유세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을 뿐이었으면서도 말이다.
유세운은 백연문을 향해 물었다.
“그들이 정확히 언제쯤 도착하는지 아시오?”
“아마 내일 아침쯤 도착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창명백검수도 필요 없겠군요.”
유세운의 말에 백연문과 좌중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은태정을 한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모든 싸움은 저 혼자 합니다. 아직 광오문도 들이 다 오지 못해서 이번에는 광오문에서 저만 싸우도록 하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당황하여 소리치는 유청운을 향해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 더 손이 많이 가니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리고 처형장에 모인 인질의 구출은 사부님이 알아서 해줄 겁니다.”
유세운의 말에 좌중의 시선은 모두 은태정을 향했다. 이천의 정예 사이에 있는 인질을 어찌 구출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세운은 자리에 일어나며 창천루주를 찾았다.
“루주님 방 두 개만 내주시죠. 일단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유세운의 말인지라 창천루주는 서둘러 점소이들에게 방을 준비하라고 했다. 위지청이 유세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아무리 오빠라도 이번에는 무리야. 철마성 때처럼 태상성주와의 담판이 아냐.”
유세운은 위지청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번에는 저번 철마성 때처럼 고분고분 물러나줄 생각이 없다. 모조리 다 해치워 버리겠어.”
유세운의 두 눈에 나오는 싸늘한 살기에 위지청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세운은 은태정을 보며 물었다.
“안 씻으십니까?”
“먼저 씻어라.”
“그럼 먼저 씻고 나오겠습니다.”
유세운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은태정은 좌중의 황당하다는 시선을 받았다. 은태정은 가볍게 죽엽청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미 세운이는 광검에 도달했느니라.”
“예?”
“헉! 광검이라뇨?”
은태정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마른기침을 해댔다. 광검이라는 경지는 천 년 동안 단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경지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꿈의 경지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가. 그 중에 심검에만 들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유세운이 예전처럼 돌아와 심검의 경지로 돌아온 것만 해도 이들에겐 충분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광검이라면 그 경지를 보고 싶은 것 또한 무인들의 열망이었다.
은태정은 무인들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피식 거렸다. 자신도 저렇게 무에 열망하던 때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보다 내일 그들을 구출하면 어디로 옮기면 되냐?”
은태정의 말에 좌중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무사히 구출해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못해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백연문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지금 병력이 모두 무산의 골짜기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내일 정오에 맞춰서 서문 쪽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은태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흑무기마대란 놈들이 온다면 남문 쪽으로 올 테니 그것이 좋을 듯 하군.”
은태정은 죽엽청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는 좌중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세운이랑 같이 이 주 동안 쉬지도 않고 경공을 펼쳤더니 온통 먼지투성이니 나도 좀 씻고 쉬어야겠네.”
“예.”
은태정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고는 창천루주가 열어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모두들 내일 보세.”
은태정의 뒷모습을 보던 백연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을 오면서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다행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히 해볼 만 하겠군요.”
위지평과 유청운의 말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일이 기다려지는 군요.”
백연문은 이 소식을 어서 창명백검수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유청운만이 유세운과 할 말이 있다며 남았고 다른 일행은 모두 창명백검수가 숨어있는 골짜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