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붉게 물든 대지를 스쳤다.
청의문의 대문 앞을 걷는 노인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곳에 온통 범벅이 된 핏물은 대지에 스며들어 토양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이곳에 내린 핏물은 청의문과 창천궁, 천룡문의 무사들의 것이리라.
고개를 든 노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청의문에 걸린 수라마교의 깃발이었다. 수라의 얼굴을 그린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지켜보던 노인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청의문을 지키던 마인 둘이 노인을 보고 앞을 막았다.
“지금 이곳이 어디라고 오는 것이냐?”
“이곳이 수라마교가 맞는가?”
노인의 물음에 마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곳이 수라마교인 줄 알고 찾아왔다는 거냐?”
노인은 마인들의 얼굴을 보고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한 놈만 살려둬도 되겠지.”
“뭐야?”
노인의 말에 발끈하던 마인 둘 중 하나의 수급이 대번에 날아갔다. 다른 마인은 당황한 얼굴로 노인과 쓰러지는 마인을 바라보았다.
“뭐…뭐냐?”
노인은 당황하는 마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서 전하 거라. 혈천문의 혈륜마 황형산이 찾아 왔다고.”
“네놈이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인의 울부짖음에 잠시 고민하던 황형산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퍼억.
“크악!”
“보고를 올리는데 오른팔은 필요 없겠지.”
황형산의 눈빛을 본 마인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황형산은 뒷짐을 진 채 사라진 청의문 현판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다들 그렇게 갔는가?”
마인이 뛰어 들어가고 반각도 되기 전에 수라마교의 수라천마대원들이 튀어나와 황형산을 포위했다. 황형산은 말없이 뒷짐을 진 채 서있었다.
수라천마대원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안으로 혈발에 혈미를 가진 단우태가 걸어 나왔다.
“네가 황형산이냐?”
단우태의 말에 황형산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이르기 힘들다던 심검에 들기 위한 폐관수련이 다 헛된 시간 같았다. 자신의 손자뻘인 단우태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은 이미 심검의 그것이 아니었다.
“수라마교주요?”
단우태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건방지군.”
황형산은 단우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매가 단우태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의 지기였던 단우강을 닮아 있었다. 황형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할아버지를 닮았군.”
단우태는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황형산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어렸을 적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 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수련 중에 들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단우태의 물음에 황형산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수라마교의 부활을 축하드리오.”
황형산의 포권을 취하며 말하는 모습에 단우태는 어이가 없었다. 대뜸 와서 문지기로 있던 마인의 목숨을 거두어가고 오른 팔을 거둔 주제에 지금 와서 축하드린다니. 단우태의 얼굴에서 냉기가 풀풀 날렸다.
“무슨 뜻이냐?”
황형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미 수라마교가 부활했으니 혈천문은 그 뜻을 같이 하겠소.”
“귀의하겠다는 뜻이냐?”
단우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황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단우태에게 뒤에 시립해 있던 단우적의 전음이 들렸다.
(이것으로 천하 통일의 시간이 더욱 가까워 진 것 같습니다.)
단우태는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여유 있게 웃음을 짓고 있는 황형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쥐어진 주먹에는 어느새 자연지기가 가득 모였다.
“좋다. 하지만 뜻을 같이 한다 해도 능력은 시험 받아봐야겠지.”
단우태의 주먹이 뻗어가자 그의 주먹에 모였던 자연지기가 그물처럼 퍼져나갔다. 황형산의 안색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설마 했지만 수라마교의 부활은 진실이었다. 천마광휘를 깨달은 자 만이 수라마교를 부활시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차핫!”
황형산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품에서 두 개의 혈륜(血輪)을 꺼내들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혈륜을 차례로 던지고 그 뒤를 따라가며 전력을 다해 진기를 뿜어냈다.
콰쾅.
굉음과 함께 두 개의 혈륜이 자연지기로 이루어진 그물의 한 귀퉁이를 찢어냈다. 황형산의 신형이 그 안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스걱.
“크윽!”
그렇다고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좁은 틈으로 나가던 중 오른 팔을 잘려나갔다. 단우태는 바닥에 내려선 황형산을 보며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뜻을 같이 한다고 하면 오른 팔이 없어도 상관없겠지.”
단우태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뜻은 같이 해주마. 돌아가라.”
청의문 안으로 사라지는 단우태를 보며 황형산은 팔에 입은 상처를 지혈했다.
“흐흐흐. 역시 범부에 견자 없다는 말이 사실이군. 조부를 닮았구나.”
형산을 벗어나 조금 남쪽에 자리 잡은 남악(南岳).
남악의 전화루(傳花樓)에 들어선 광오문도들은 이층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유세운과 은태정을 향했다. 은은히 빛나는 은발을 하고 있는 사내와 소년을 보고 다들 작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러게 죽립이라도 하나 사서 쓰자니까요.”
“웃기지 마라. 하늘에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무엇 하나 겁나는 것 없는데 왜 그렇게 한 단 말이냐.”
은태정의 태연한 말에 유세운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대로 악양까지 올라가서 흑무기마대의 목줄을 틀어쥐어야 했으니 이곳에서는 잠시 말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만 구하면 되는 거였다.
유세운은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형산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저기…”
들어오면서 분명히 점원에게 먹을 것과 술을 내오라고 시킨 걸로 기억하는 유세운의 고개가 돌려졌다. 자신들에게 와서 말을 거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린 유세운의 시선에 짙은 회의를 입고 등에 도를 한 자루씩 맨 사내들이 보였다. 가장 선두에는 스물을 갓 넘긴 듯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유세운이 의아해 하며 물어보려는 찰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응? 당신은…”
“유대협. 저 기억 하시겠습니까?”
포권을 취하는 사내를 보고 유세운은 처음 강호에 나와 드잡이 질을 한 기억이 났다.
“아! 그 뇌종문의…”
“예. 정무라고 합니다.”
화산파의 녀석과 겨루다 패했던 사내였다. 유세운은 그의 옆에 있는 사내를 보고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뇌종문의 문주요?”
“예. 뇌종문의 현 문주인 정우각입니다.”
포권을 취하는 사내를 보며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일단 앉으시죠.”
유세운의 인사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정무가 유세운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유대협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정무의 물음에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왜요?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그보다 어떻게 된 거에요? 철마성에서 나온 건가요?”
“철마성은 이미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정무의 말에 유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 소문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죠?”
“저희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지금 철마성은 검마도라는 곳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검마도?”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체 그런 무인들이 여태껏 어떻게 강호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었는지 의문이 가는 고수들입니다.”
“그래요?”
“소문에 의하면 검마도주와 다른 한 명의 죽립인이 철마성을 와해시켰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정무의 말에 유세운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아마도 광검에 든 자 일 것 같았다. 유세운의 시선이 은태정을 향했다. 두 눈 가득 투지를 일으키고 있는 모습에 유세운은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휴. 그건 그렇고 혹시 흑무기마대에 대한 소식도 들었나요?”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들이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지금 악양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악양에 있다라…”
유세운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다면 그들을 찾기가 쉬워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정무는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보다 이곳에 있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응? 아까도 그러더니 무슨 일 있어요?”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이 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주라니? 뭐가요?”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셨습니까?”
“뭔지 말해야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유세운의 말에 정무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 주 후에 유가장의 장주와 산검낭자 유주란, 그리고 창천궁의 소공녀인 창검낭화 백연혜 소저의 공개 처형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느새 유세운의 손이 정무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유세운이 출수하는 것을 보지 못한 뇌종문의 일행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들렸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죠. 누구누구가 공개 처형을 당한다고요?”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간신히 대답을 했다.
“창천궁을 쳐서 장악한 혈천문에서 유가장의 식구와 창검낭화 백연혜 소저를 처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유세운은 정무의 말에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싸늘한 미소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 했다.
“혈천문이라고?”
“예. 이제 이 주 남았습니다.”
유세운은 정무를 내려주며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군요. 그런데 혈천문에서 왜 그들을 공개처형 한답니까?”
“아마도 창천궁의 숨은 정예들을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숨은 정예들?”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북천방을 막으러 갔던 무인들 사 천 명의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혈천문에서는 목안의 가시 같겠지요.”
“그들이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시는 군요. 수라마교가 부활해서 지금 남아있던 청의문과 천룡문, 창천궁의 정예들을 모두 죽이고 청의문이 있던 곳을 차지했습니다.”
“뭐?”
당황한 유세운의 물음에 정무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수라마교의 부활 때문에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유세운은 말없이 정무와 정우각을 돌아보다가 물었다.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소.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거요?”
유세운의 물음에 정우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철마성에서 나온 군소방파의 사람들을 연합해서 검마도의 무사들에 대항할 세력을 조직 중에 있습니다.”
정우각의 말에 유세운은 피식 거렸다.
“포기하는게 좋을 거요.”
“무슨 말입니까? 유대협.”
“검마도의 도주라는 자 아마 광검에 든 인물일 거요.”
유세운의 말에 정우각을 비롯한 뇌종문도의 얼굴들에 경악이 어렸다.
“하지만 광검이라면 천년을 통틀어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던 경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알고 숨죽이고 있으시오. 그럼 저희는 이만.”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은태정이 멀뚱히 바라보자 유세운이 다른 일행들에게 말했다.
“일단 나가자.”
“예.”
광오문도들을 이끌고 나온 유세운은 도병우를 돌아보았다.
“도군사.”
“예.”
“수라마교에 연락해.”
“예?”
되묻는 도병우를 향해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창천궁으로 간다고 알려. 어쩌면 흑무기마대도 올지 모르겠군.”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세운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혈천문 감히 누굴 처형해?”
빠악!
“윽! 왜 그러십니까!”
방심하다 뒤통수를 맞은 유세운이 투덜거리자 은태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쪽은 동쪽이야 이놈아. 지금 혈천문이 창천궁에 있으면 저기 북서쪽을 바라봐야지.”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