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걸어가는 백마 위에는 옥빛의 머리를 휘날리는 사내가 타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같이 말을 몰고 있는 영호현은 머리를 내려 흉터진 곳을 가리고 있었다.
옥빛의 머리를 한 사내의 손이 들렸다. 멈춰서는 육백여 명의 죽립인들. 검마도주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너 혼자 오는 거냐?”
검마도주의 물음에 관도를 따라 다가오던 죽립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호천을 만났던 비풍십이검주의 말에 검마도주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자네를 보낸 거 아닌가.”
검마도주의 물음에 비풍십이검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소도주님이 심검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상처 없이 모셔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비풍십이검주의 말에 검마도주는 기분 좋게 웃었다.
“크하하하. 역시 그 녀석은 크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비풍십이검주라면 검마도에서도 자신 다음가는 무사. 심검의 끝에 서 있는 자였다. 검마도주는 흡족한 얼굴로 명했다.
“지금 우리는 철마성으로 가는 중이니 따라오게.”
“예.”
비풍십이검주의 애마가 앞으로 걸어 나왔고 그는 흑마 위에 올라타고는 검마도주의 왼쪽으로 가서 말을 몰았다. 영호현은 말없이 비풍십이검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다음 가는 실력자이면서 의외로 자신들에게 잘 해 주던 자였다. 비풍십이검주는 영호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양관척이라는 자의 집이 흑무기마대에게 쑥대밭이 되었답니다.)
(뭐야?)
당황하여 되묻는 영호현을 향해 비풍십이검주는 씁쓸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수라마교의 도움이 있었던 듯 합니다)
(수…수라마교!)
영호현의 두 눈이 악양이 있는 곳을 향하며 빛났다. 영호현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유세운은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도병우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뭐하는 거냐?”
유세운은 아까부터 할 말이 있다고 불러 놓고는 부복하고서 말 한마디 없는 도병우를 내려보았다. 도병우는 결국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래? 뭐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태연히 대답하고 손에 강환을 만든 유세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부복하고 있는 도병우를 보고는 피식 거렸다.
“장난 하지 말고 왜 그러는 지 말해.”
“저 때문입니다.”
“뭐가?”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결국 입을 열었다.
“동호법과 관호법이 죽은 것은 저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세운은 아직도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도병우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수라마교의 첩자였습니다.”
“뭐?”
유세운은 지금 도병우가 상당히 질 나쁜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곁에 수라마교의 첩자가 있었다니. 유세운의 전신에서 광검에 이른 자의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말해라.”
유세운의 말을 들은 도병우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용병단주로 있을 때 비천십팔마왕 중 천이마왕에게 당해서 혈왕고를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보 책이었죠.”
“혈왕고가 뭐냐?”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차분히 대답했다.
“독충의 일종으로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머리 쪽으로 기어 올라가 집을 짓고 삽니다. 하지만 일정 주기로 파환단이라는 약을 복용하면 거기서 나오는 독을 먹느라 다른 해를 입히지 않는 독충입니다.”
“그래서?”
유세운의 목소리는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자연지기와 동화되어 가는 유세운의 목소리 하나에 주변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어갔다.
도병우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느날 저에게 천이마왕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문주님의 곁에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호오. 그래서 내 앞에 용병단을 이끌고 나타났었던 거냐?”
“예. 그렇게 해서 문주님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설마 천풍쌍기가 곁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천풍쌍기가 왜?”
도병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이 강호에서 은거하기 전에는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비록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흐음. 그래서?”
“그 뒤로 꾸준히 수라마교에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저희의 행로와 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이죠.”
“하하하. 그래 계속 말해봐.”
어느새 유세운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주변을 살기가 뒤덮어 가고 있었다. 도병우는 초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를 올렸을 때가 저희가 악양으로 출발 할 때였습니다.”
도병우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이미 유세운은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그동안 우리 곁에서 잘도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결국 그 덕에 좌우호법이 죽었고 말야. 응?”
유세운의 두 눈에는 동무벽의 너털웃음과 관백의 아찔한 미소가 아른 거렸다. 쥐어진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도병우는 얼굴이 파랗게 변하면서도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유세운은 도병우를 구석에 집어 던지고는 물었다.
“좋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뭐냐?”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숨을 들이마시며 답했다.
“켁켁. 관백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서 저에게 문주님을 부탁한 순간 결심했던 일입니다.”
“무슨 소리냐? 관호법이 알고 있었다고?”
“예.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비밀통로로 빠져 나가는 저에게 문주님을 부탁했습니다.”
“혈왕고에 당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거냐?”
도병우는 무릎을 꿇고 답했다.
“관백의 목숨이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마지막까지 문주님을 걱정하며 배신자인 저에게 부탁하는 의기였습니다. 그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목숨을 걸었습니다.”
“흥! 이제와서 목숨을 건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이냐?”
유세운의 차가운 반응에도 도병우는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문주님 손에 제 목숨을 맡기는 것입니다.”
유세운은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포석이 깔려있었다지만 그 또한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자였다. 철마성에 들어갈 때도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모습이나 북천방을 막을 때 고군분투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유세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너도 이제 곧 죽을 목숨이 아니냐.”
“혈왕고는 만수화의님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만수화의의 치료해보고 싶은 욕망이 이루어낸 결과였지만 지금 도병우의 몸에는 한 줌의 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세운은 도병우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너를 믿지 못한다.”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소리쳤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유세운은 도병우를 두고 목옥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혼자 있고 싶다.”
말을 마친 유세운은 도병우를 두고 목옥 밖으로 나왔다. 다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떨어져 수련들을 하고 있었다. 유세운은 원령을 만들어 냈던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의 한 가운데 있는 작은 공터에서 유세운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자신이 수련 도중 자연지기가 발출 되면서 생긴 그루터기였다. 유세운은 그루터기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봐. 관호법.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말을 했다면 아마 동무벽의 손에 도병우는 죽었을 거였다. 대신 두 호법은 무사할 수 있었을 터였다.
“바보 같아. 모두 같이 웃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알았다면 도병우를 과연 살려두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아마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백은 그런 그를 옆에 두고 지켜보았겠지.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에 은빛의 강환을 만들어냈다.
“관호법. 자네가 살려준 목숨이라 이거지.”
유세운의 양손에 모였던 강환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원령을 만들어 내듯 동무벽과 관백의 모습을 만들어 갔다. 유세운은 사람의 형체를 만들던 강기를 보며 피식 거렸다.
“그렇게 가까웠는데도 지금 자네 둘의 얼굴이 뚜렷이 떠오르지 않네.”
유세운은 강기로 모인 자연지기를 다시 되돌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자네가 살려준 목숨을 내가 거둘 수는 없지.”
유세운은 뒤를 돌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령이 대나무 위에서 위태롭게 보법을 수련하는 모습과 불을 피우면서 그 주위에서 땀을 흘리며 장법을 수련하는 양관척의 모습도 보였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곽부설은 아직도 연못에서 물고기들을 잡고 있을 터였다.
“모두 모여 봐.”
유세운의 내력이 담긴 말에 광오문도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달려왔다. 유세운은 말없이 그들 하나하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는 잃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유세운은 목옥에서 나오지 않은 도병우도 불렀다.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가 감격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유세운은 그런 도병우를 보고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니 좋아 하지마.”
유세운은 만수화의와 은태정도 나와서 보는 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저 이제 강호로 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나가야지. 이곳 연못의 물고기도 씨가 말라가는데 안 갈려 그랬냐?”
식구가 늘어서 먹는 양도 많아지다 보니 연못의 물고기도 많은 수가 줄었다. 그렇다고 저렇게 까지 말할 건 없는데라고 유세운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저랑 같이 나가시죠.”
“뭐? 무슨 헛소리냐?”
은태정의 반발에 유세운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의 숙원이지 않습니까. 그걸 제자의 손에 맡겨서야 어디 잠이라도 주무시겠습니까?”
천마광휘와 천륜광검과 겨루어 보고 싶다던 은태정의 숙원을 말하는 유세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진해졌다. 은태정은 그런 유세운을 보며 이를 갈았다.
“쳇! 알았다.”
은태정의 대답에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자신의 몸은 하나고 지켜야 될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은태정이 곁에 있다면 얘기는 달랐다.
만수화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나갈 생각이 없네. 이 나이에 돌아다니면 몸에 안 좋아.”
“뭐? 너 지금 내가 나가는데 여기 눌러 앉겠다는 속셈이냐?”
은태정의 말에 만수화의는 손사래를 쳤다.
“아 그러면 저도 반로환동 시켜주시면 저도 가겠습니다. 요즘은 가뜩이나 뼈마디가 쑤시는데 어디를 나간단 말입니까?”
만수화의의 말에 은태정이 손을 들어올리는 찰나 유세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만수화의님에게는 이곳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진부인과 곽부절은 이번에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이번에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젊은이가 뭘 좀 아는군.”
만수화의의 말에 은태정의 전신에서는 광검에 이른 기세가 피어올랐다.
“흐흐흐. 뭘 그리 좋아하는 거냐?”
“허허허. 아닙니다.”
은태정은 만수화의에게 곽부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 동안 저 아이의 육감을 깨워 놔. 그렇지 않으면 그 늙어 쓸모없는 뼈다귀들 내가 아주 자근자근 부셔주마.”
“엥? 왜 이러십니까? 전 의원이지 무인이 아닙니다.”
빠악!
“크헉!”
은태정은 주저 없이 손을 날리고는 말을 이었다.
“시끄러워. 의술을 익히는 놈이 육감도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
“아니 천하제일의를 뭘로 보는 겁니까!”
“그러니까 책임져라.”
“쳇! 알겠습니다. 대신에 황금 일만 냥입니다.”
대답하는 만수화의를 향해 은태정은 주먹 가득 은빛 강기를 만들고 말했다.
“흐흐흐. 뭐라고?”
“농담입니다. 허허허.”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만수화의를 보고 유세운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유세운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가자. 피에는 피로써 갚아 줘야 하는 법.”
유세운의 시선이 광오문도들을 하나하나 훑어 나갔다.
“흑무기마대라는 이름은 이제 다시는 강호에 거론 되지 않을 것이다.”
“예!”
양관척과 육우령의 두 눈에서도 살기가 뻗어 나왔다. 곽부설의 갈무리 된 살기도 오늘은 예외였다. 유세운의 시선이 은태정을 향했다.
“사부님.”
“왜?”
“저희 좀 밖으로 내 보내 주세요.”
진세로 둘러싸인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은태정은 한 숨을 내쉬며 허공섭물을 발휘해 그들을 들어 올렸다.
“조심해라. 꿈틀대다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