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깨달음, 재출도
영호천은 하늘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단량과 서중이 보였다. 단량은 초췌한 눈을 들어 자신을 향해 물었다.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얼 말인가?”
단량은 낭인천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부터 불안했던 실체를 깨달았다. 강호의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강해지고 싶은 자들. 그것만을 위한 수련자들이었지만 영호천에 이끌려 결국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오게 돼 버렸다. 죽은 듯이 숨어 지내는 것도 마음에 맞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일전을 치르자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숨을 죽이고 있는다는 것은 생각 외로 짜증나는 일이었다.
단량은 영호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이대로 있으실 생각입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서중의 투덜거림에 단량은 초췌한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서중은 단량이 쏘아보는 것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단량은 영호천을 돌아보았다.
“낭인천은 정파인들과 같이 움직이시는 겁니까?”
단량의 물음에 서중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수라마교에 투신이라도 할려고?”
“죽고 싶은 거냐?”
결국에 단량은 참지 못하고 서중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영호천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게. 정파인들과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지금은 수라마교라는 적을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때이네.”
영호천의 말에 단량은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중은 영호천을 향해 물었다.
“저도 답답하긴 합니다.”
“알고 있네. 조금만 기다려 보게나.”
영호천도 지금 낭인천의 무사들이 이곳 산장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영호천은 웃음을 지으며 서중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군.”
“알겠습니다.”
서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영호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냐?”
작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 영호천의 전신에서 태산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소도주님. 도주님께서 출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예.”
영호천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뒤에서 있는 죽립인은 품에 한 자루 검을 안고 있었다. 영호천은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비풍십이검주(飛風十二劍主). 자네가 오다니 의외군.”
“도주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비풍십이검주를 향해 영호천은 코웃음을 쳤다.
“하하. 그래서 자네 정도라면 나를 데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단 말인가?”
비풍십이검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따라오시지 않겠다면 죄송하지만…”
“하하하. 이거 정말 우습군. 아버지는 나를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자네를 보내면 끌려서라도 갈 정도로 밖에?”
말을 마친 영호천의 전신에서는 뚜렷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검을 뽑지도 않았건만 이미 상대의 목을 한 자루 검으로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비풍십이검주는 가만히 서서 영호천의 기세를 받아들였다.
비풍십이검주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동안 놀라운 성취가 있으셨군요.”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영호천의 살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비풍십이검주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소도주님의 뜻은 도주님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가봐라.”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비풍십이검주는 돌아서다가 문득 생각난 듯 걸음을 멈췄다.
“아! 그리고 소도주님도 돌아오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영호천의 물음에 비풍십이검주는 신형을 흐릿하게 만들며 대답했다.
“영호현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되묻는 영호천은 이미 비풍십이검주가 이곳을 벗어났음을 알았다. 영호천은 가쁜 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하아. 하아. 역시 비풍십이검주로군.”
영호천은 비풍십이검주가 자신을 상처 없이 데려갈 확신이 서지 않아 돌아섰음을 알았다. 전력을 다한 기세에도 그는 흔들림없었다.
영호천은 벽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찌 해야 하는가? 유소제. 자네는 정말 그들에게 당한 건가? 동생도 돌아왔다니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도 없다네.”
유세운에게 끌린 것도 어디까지나 동생을 닮아서였다. 동생이 돌아와서 검마도로 돌아왔다면 가봐야만 했다. 영호천은 오늘따라 입맛이 썼다.
콰콰콰콰.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물줄기를 맞으며 정좌하고 있던 유세운의 머릿속으로는 온통 은태정의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연과 하나가 되라는 말.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유세운은 속으로 계속 욕을 하면서도 막상 경지를 이룬 은태정의 말인지라 토를 달지도 못했다. 산 증인이었기에 유세운은 묵묵히 폭포의 물줄기를 맞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상진기를 운용하던 유세운은 운기조차 서서히 멈추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상진기의 운용조차도 어떻게 보면 자연을 거스르는 것 같았다.
유세운은 엉덩이 밑에 놓인 바위의 차가움을 느끼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나는 바위다! 바위다! 바위다!’
자기 스스로 바위가 되었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유세운은 결국 금세 포기했다.
‘젠장!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유세운은 눈을 감은 채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 중에 잡념이라니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유세운은 묵묵히 다시 수련에 전념했다.
등위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마치 자신을 물속에 담가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떨어지는 속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느껴지는 걸까?’
아무리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해도 강처럼 도도히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폭포수에 맞고 있으면서도 꼭 강물에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물은 항상 같은 모양이 아니지. 비록 이렇게 폭포로 변해 떨어진다고 해도 강물과 같은 물. 모든 것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 거지.’
유세운은 본질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자연지기라는 것도 무상진기를 거친다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굳이 무상진기로 자연지기를 담을 수 있는 내가 이런 수련을 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나?’
유세운은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은태정의 말에 속으로 열심히 욕을 하면서도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나는 자연지기를 담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배출하지 않고 느껴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군.’
유세운은 그렇게 생각이 들자마자 자연지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전신을 휘감는 자연지기의 충만한 힘을 느끼던 유세운은 점점 더 자신의 내면으로 빠져 들었다.
처음 그가 무상진기를 깨달았을 때처럼 그의 내면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지기를 바라보던 유세운의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생각났다.
의기상인.
마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 마음먹은 것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 유세운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것 또한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닌가!’
유세운은 점점 더 많은 양의 자연지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은광천세를 몇 번이라도 시전할 양이었다. 자신을 닮은 강기의 모습을 만들어도 몇 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유세운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끊임없이 넓어지는 자신의 내면으로 자연지기를 한없이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저게 뭐죠?”
입을 쩌억 벌린 채 바라보던 곽부절을 향해 육우령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모르겠군.”
그들은 지금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세운을 주위로 감싸고 있는 거대한 은빛의 광구. 하지만 그것은 은광천세처럼 파괴적이지 않았다. 커다란 공이 호흡을 하듯 두근거리는 광구는 점점 커져 갔다. 이미 반경 이십 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곽부절은 놀란 얼굴로 은태정을 향해 물었다.
“태상문주님. 지금 저희가 보고 있는 저것은 뭐죠?”
곽부절은 은태정이라면 아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은태정이 매질을 멈췄기에 눈을 가린 천을 올리다 발견한 것이니까.
은태정은 피식 거렸다. 물론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다. 주변의 자연지기를 무한정 빨아들이는 유세운의 모습이었다. 은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거 말이냐? 세운이가 광검에 들어가고 있는 증거다.”
“예?”
은태정의 말에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태정을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광검에 들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눈앞에서 광검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무림에 역사로 남을 순간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은 은빛의 광구에서 떨어질지 몰랐다.
폭포수 전체를 휘감는 은빛의 광구를 보며 은태정은 작게 키득거렸다.
“큭큭. 결국 네놈도 그 경지에 들어섰구나.”
물론 은태정도 유세운이 처음 강기로 자신의 모양을 만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다. 광검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라지만 원령(元靈)을 만들어 내다니 전혀 의외였다. 도인들이나 익히는 기술이다. 자신의 원령을 만들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꺼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과거에는 있었다. 물론 그래놓고 그 경지에 든 자들은 없었지만. 분명 유세운도 전혀 엉뚱한 생각으로 만든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아마 광검에 이르면 은광천세가 아닌 저 원령을 이용한 무공이 펼쳐질 것 같았다.
은태정의 생각이 끝날 때 쯤 폭포를 삼켜버렸던 은빛의 광채가 급속도로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는 유세운이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번쩍.
마치 마지막으로 꺼지는 불꽃 마냥 번쩍인 은빛의 광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유세운이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었다. 유세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콰콰콰콰.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듯 폭포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세운은 전신을 적시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엉뚱한 생각을 하다 얻은 것이기는 했지만 누가 뭐래도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건 폭포수였다. 유세운은 사뿐히 날아올랐다. 허공답보처럼 자연지기를 밟을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물이 흐르듯 유세운의 신형은 미끄러져 광오문도들이 지켜보는 곳에 도달했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은태정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혼자 미소를 짓던 은태정은 유세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머리가 세서 어쩌냐?”
“엑?”
유세운은 다급히 걸음을 옮겨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은태정처럼 머리와 눈썹이 은은한 은빛의 광채를 뿌리는 사내가 비춰졌다.
“으아악! 젠장! 이게 다 사부가 무상진기를 이렇게 만들어서 그래요!”
“뭐야? 이 놈이!”
은태정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유세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은태정의 주먹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세운은 슬쩍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피했다.
“어쭈! 피해?”
“하하하. 보이는 것을 피하지 못하면 바보지요. 하하하.”
유세운의 웃음에 은태정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뭐래도 이미 유세운도 자신과 같은 광검의 경지에 도달했다. 은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번에 만든 것. 다시 한번 만들어 봐라.”
“그거요?”
유세운은 은태정의 말에 자신과 같은 크기로 만들었던 강기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자연지기를 빌어 만든 은빛의 강기 덩어리는 자신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헉!”
“분신술?”
광오문도들의 경악 속에서 은태정은 가만히 빛나는 은빛의 덩어리를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걸로 공격을 한다면 제법 쓸모 있겠구나.”
“하하하. 지금 여기 모인 자연지기가 얼만데 그러세요.”
유세운의 웃음에 은태정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지금 네가 나가서 만나야 될 다른 자들도 이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을 거다.”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놈이라도 저를 막는 놈은 용서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