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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궁의 별궁.
백연혜는 차분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내력을 끌어 올리지 못하게 점혈 당한 상태였다.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차를 마시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혈천문의 총공세에 손쓸 새도 없이 창천궁에 남아있던 창검백영대와 수비를 하던 무사는 모조리 죽었다. 궁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유가장의 식구들 뿐.
백연혜는 마지막에 들이닥친 자의 무위를 생각하고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을 옥죄는 사기(邪氣)에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당했다. 설마 혈륜마 황형산이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지는 몰랐다.
장강붕파를 시전 해 보았지만 간단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검을 잡아 버리는 통에 펼치지도 못하고 점혈을 당했다. 왕전조차도 그의 일수에 수급이 잘렸다. 귀찮다는 듯이 돌아다니며 창천궁의 무사들을 도륙한 그는 볼일이 있다며 떠났다. 황혜란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이상할게 하나 없었다.
“호호호.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거지?”
방으로 들어서는 황혜란을 보고 백연혜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황혜란은 태연한 백연혜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흥! 너에게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 포로가 잘 살아 있나 보러 온 거니까 말야.”
황혜란의 말에 백연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혜란은 자신이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흥! 너 삼룡삼봉에도 못 드는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삼룡삼봉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이미 삼룡삼봉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해졌다. 심검에 든 유세운과 영호천의 등장에 이어지는 고수들의 등장. 누구하나 삼룡삼봉 못지않은 실력이 있었다. 없다면 등에 업을 세력뿐. 하지만 그것조차도 벌써 철마성과 창천궁이 무너졌으니 의미가 많이 약해졌다.
황혜란은 허리에 찬 채찍을 풀어 백연혜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의 낭군님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황혜란도 혈영단을 이용해 얘기를 들었다. 주화입마 당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악양으로 떠났다는 것도. 그리고 악양의 양관척의 집이 지금은 흑무기마대에 의해서 점령당했다는 것도.
황혜란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거 들었어? 광오문의 총관으로 있는다던 양관척의 집이 흑무기마대에 의해 완전히 짓밟힌 거?”
“뭐라고요?”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백연혜를 보며 황혜란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흑무기마대장까지 왔다지 아마? 과연 살아서 벗어났을까?”
백연혜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조금씩 이성을 찾게 해주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분명히 돌아오실 거예요.”
“뭘 믿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백연혜의 말에 황혜란은 코웃음을 쳤다. 황혜란은 대답조차 않고 다시 창밖을 보는 백연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한 달 안에 돌아오게 해주지.”
“그게 무슨…?”
돌아보는 백연혜를 향해 황혜란의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지어졌다.
“한 달 후. 너와 유가장 식구들을 공개 처형해주지. 그렇게 한다면 지금 숨어버린 창천궁과 정파의 쓰레기들도 운 좋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백연혜는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야 상관없지만 유가장의 식구들은…”
“흥! 네가 나한테 뭔가 부탁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는 거냐?”
황혜란은 한번 쏘아주고는 뒤돌아 방을 나가버렸다.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눈물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던 창천궁에서 바라보는 하늘도 역시나 파랗기만 했다. 백연혜의 눈에 두 줄기 눈물이 흘렸다.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유세운은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왜?”
은태정의 대답에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도저히 길이 안보입니다. 다시 한번 제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은태정은 유세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들 수련한다고 집중하는 척 해보였지만 이곳을 지켜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태정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지금 너와 나의 차이를 알려주마. 네가 거기서 무언가를 얻는 다면 그것 또한 광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지.”
은태정은 말을 하고 광오문도들을 불렀다.
“모두 반경 이십 장 밖으로 물러나 거라.”
은태정과 유세운 정도의 고수가 펼치는 무공은 코앞에서도 못 알아볼 판에 멀리 물러나라는 말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유세운의 은광천세를 잘 아는 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다.
유세운을 바라보던 은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광검이 보고 싶으냐?”
“예.”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은광천세를 펼쳐보거라.”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깊이 자연지기를 받아 들였다. 전신을 휘도는 자연지기를 대번에 뿜어냈다. 결코 은태정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슈아악.
번쩍이는 은광의 구에 곽부절이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뭐죠?”
곽부절의 물음에 육우령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웃음을 지었다.
“광오문의 문주가 가지는 절기이지.”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모르겠구나.”
태연히 답하는 육우령도 눈부신 은광을 보며 그 안의 상황이 궁금했다.
유세운은 자신의 은광천세를 펼치며 뚫어져라 은태정을 바라보았다. 은태정의 입가에 걸린 가느다란 미소. 호신강기처럼 펼쳐진 은태정의 은빛 강기 덩어리들은 그의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은태정은 은광천세를 펼치고 있는 유세운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너에겐 빈틈이 너무 많아.”
은태정은 유세운의 앞에 서서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촤아악.
반으로 갈라지는 은광천세는 은태정이 펼친 은빛 강기의 벽에 막혔다. 자신의 뒤로는 아직도 은광천세가 펼쳐지고 있지만 은태정이 펼친 은빛의 벽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지기로 뿜은 기운을 반으로 가른 겁니까?”
유세운은 내력을 거두며 물었다. 은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네 스스로가 자연지기와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은태정의 물음에 유세운은 이게 뭔소리냐는 듯이 바라봤다.
“그게 뭔 소립니까?”
“무상진기란 자연지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몸에 내력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변의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강기화 시켜 뿜어내는 것이 은광천세이지.”
“예.”
유세운은 당연한 소리를 하는 은태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태정은 자신의 손에 가볍게 은빛의 소도를 만들어 보였다.
“헉!”
강기로 세세한 모양까지 다듬은 소도의 모양을 만든 은태정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은태정은 자신이 만든 소도를 여러 가지 도구로 바꾸어 만들며 말했다.
“너는 네가 받아들인 자연지기를 얼마만큼이나 네가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느냐?”
유세운은 은태정의 말에 당황했다.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와선형으로 발출하는 것이 은광천세의 요체다. 그것은 자신을 통해 걸러진 자연지기. 그것을 더욱 세밀하게 조작할 수 있냐는 물음에 당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은태정은 가만히 손에 들린 작은 소도를 들어 올려서는 뒷면에 있는 숲을 향해 휘둘렀다. 갑작스레 길어지는 은광이 지나간 자리의 나무는 대번에 쓰러졌다.
스걱.
콰콰쾅.
나무들이 요란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새에 은태정은 멍한 표정의 유세운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제법 오랫동안 명상을 통해 무상진기를 느끼는데 익숙해졌을 테니 한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보거라.”
강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미 실체를 가지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은태정이 바라는 것은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은태정은 고민하는 유세운에게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자연지기를 익히고 나면 좀더 다른 은광천세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연못을 향해 걸었다. 은광천세에는 거침없이 뿜어내기에 조절이 힘들었지만 지금 은태정이 원하는 것은 그것조차 조절하기를 바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호신강기처럼 자연지기를 두르고 다가오던 은태정의 모습. 그것은 심검에 이른 어떠한 공격도 견뎌내는 모습이었다. 유세운은 멍한 표정으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권법가였다. 사부에게 처음 배운것도 팔각연환권이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검 같은 무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버지!”
절규하듯 소리치는 백연문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지만 백선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안된다.”
간단한 대답. 백연문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어째서 안된다는 겁니까!”
결국 백선후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지만 내게는 하나뿐인 딸이다! 지금 내 마음이라고 구하러 가고 싶지 않겠느냐!”
백연문은 백선후의 두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렇다면 저를 이렇게 말리실 수는 없습니다.”
백연문의 말에 백선후는 씁쓸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천궁이 혈천문에게 무너진 것은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들이라면 자신들 못지않은 육대세력 중 한 곳이었으니까. 더욱이 북천방의 일에도 단 한 명의 무사도 보내지 않았던 곳이니까. 그들이 백연혜와 유가장의 식구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을 죽였을 때에도 참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죽이기보다는 살렸을 때의 값어치가 훨씬 컸으니 말이다.
방금 전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혈천문의 공식적인 선언이 전 강호에 퍼졌다. 백연혜와 유가장의 식구들을 공개처형하겠다는 선언. 기간은 앞으로 한 달 후였다. 백연문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은 당연했다.
백연문은 백선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에게 창명백검수를 내 주십시오. 제가 구출 하겠습니다.”
“갈! 지금 네 눈에는 현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백선후의 일갈에도 백연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혈천문에서 저희를 잡기 위해 유인책으로 펼친 거라는 것도요.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연혜를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네가 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백연문의 대답에 백선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큰 것을 보아라. 지금 네가 가는 것은 대세를 그르치는 일이야.”
백선후의 말에 백연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 연혜의 공개처형을 지켜 볼 수는 없습니다.”
백선후는 말없이 백연문을 바라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일궁 이문의 책임자 중 한명으로써 이곳을 벗어 날 수는 없었다. 백선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보내주지 않으면 단독으로라도 가겠다는 결의에 찬 아들에게 결국 백선후는 허락의 말을 꺼냈다.
“될 수 있다면 네가 연혜를 구해냈으면 한다. 창명백검수를 데리고 가거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백연문까지 보냄으로 창천궁의 대가 끊길 수도 있었지만 백선후는 이를 악물고 허락했다.
백연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못난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백연문은 백선후를 마지막으로 보는 거란 생각에 눈물이 나는 것을 애써 참으며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연문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백선후는 밖으로 나가는 백연문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남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