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78화 (17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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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팍. 찰팍.

청의문의 앞 전장에는 이미 온통 핏물과 눈이 녹아내린 물이 합쳐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우태는 차분히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 피해는 얼마나 돼지?”

“적청쌍마단 육백 중 이백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라천마대원 천 명중 삼백이 죽었습니다.”

간단한 단우적의 말에 단우태는 물끄러미 그를 돌아보았다.

“꽤나 고생했나보군.”

단우태의 말에 단우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심검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건만 동귀어진을 노리는 심검의 고수는 가벼이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묵검마왕도 백건호의 목숨을 얻는 대가로 왼팔을 잃었고 황권마왕은 헌원수의 목숨을 얻는 대가로 극심한 내상을 입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요양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단우태는 걸어가다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둘렀다.

콰쾅!

붉은 빛이 번쩍인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청의문의 현판이 있던 자리는 먼지만이 날리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부로 청의문은 강호에 남아 있을 일 없으니 상관없겠지.”

걸음을 옮기는 단우태의 뒷모습을 보며 단우적은 이제 천하는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했다. 청혈인에 당한 왼쪽 어깨가 욱신거려 왔다.

하북성 무산에 자리 잡고 있는 창천궁.

창천궁까지 달려서 반각이면 도달할 곳에 멈춰서는 인물들이 있었다. 전신에서 사기를 뿜어내는 혈령마왕 황정회는 묵묵히 창천궁을 바라보았다.

육백 년이라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자신의 손에 무너질 생각을 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옆에서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던 황혜란이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말해 보거라.”

“백연혜란 계집과 유가장의 식구들은 모두 사로잡아 저를 주세요.”

황혜란의 말에 황정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해주마.”

“고마워요.”

활짝 웃는 황혜란을 보던 황정회의 시선이 다시 창천궁을 향했다. 어차피 절대고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성의 고수가 몇 있겠지만 그건 내문의 고수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황정회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문의 고수는 내성으로 바로 향하고 혈겸천사대는 창천궁을 포위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 혈마단과 혈극살대는 모두 창천궁을 공략해라! 가자!”

황정회의 명을 따라 혈천문 이천의 고수가 물밀 듯이 창천궁을 향해 쏘아져 갔다.

“소공녀님!”

다급히 와서 소리치는 창운쌍검을 보며 백연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시죠?”

백연혜의 물음에 창운쌍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피하십시오.”

“무슨 말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연혜는 뜬금없는 창운쌍검의 말에 당황했다. 창운쌍검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혈천문의 전 병력이 창천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성문도 금세 함락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왜…?”

“지금 궁의 전력이 빠져 나간 것을 알고 들이닥친 것 같습니다.”

백연혜는 자신의 검을 움켜쥐고 달려 나가며 창운쌍검에게 명했다.

“최대한 피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제 걱정은 마시고 최대한 혈천문의 시간을 끌어주세요!”

“예!”

별궁으로 달려가는 백연혜를 보면서 창운쌍검은 다급히 성벽 쪽을 향해 달려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세운은 말없이 은태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은태정은 유세운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유세운이 운기를 마치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은태정은 다짜고짜 자리에 앉혀 놓고는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유세운은 깨어나자마자 뛰쳐나가려다가 벌써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전 지금 복수를 위해 나가봐야 합니다!”

제법 강하게 밀어 붙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간단한 주먹세례였다.

빠악!

“으윽!”

“그깟 실력으로 어디를 나간 단 말이냐!”

“예전에는 이정도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유세운의 외침에도 은태정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건 그때고.”

“아무리 그래도 전 가야 합니다.”

“대체 어떤 놈한테 당했길래 이렇게 앞뒤 안보는 거냐?”

은태정의 물음에 결국 유세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천방의 방주란 놈이 심검에 들어서 간신히 꺾었는데 그 와중에 주화입마에 들었습니다. 만수화의님을…”

빠악!

“으윽! 왜 때려요!”

“누구 앞에서 님자를 붙이는 거냐?”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만수화의를 찾아오는 길에 흑무기마대장이라는 녀석한테 호법 둘이 당했습니다.”

“흑무기마대? 그 놈들이 중원에는 왜 들어왔는데?”

은태정의 물음에 유세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예전에 그 놈들이 중원에 심어놓은 세력을 한번 들쑤셔 놓아서…”

“그러니까 네가 벌인 일 때문에 들어 왔단 말이냐?”

“예.”

은태정은 유세운이 깨어나기 전에 상황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놈이 돌아다니면서 안 건드린 세력이 없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녀석을 강호에 내보냈으니 다 내 죄구나.”

“전 지금 다시 나가봐야 합니다!”

“시끄럽다.”

간단한 은태정의 협박에 유세운은 순간 목을 움츠렸다. 어째 심검에 들었어도 변한 건 하나 없었다. 은태정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너를 지금 밖으로 못 내보내는 이유가 있느니라.”

“알려 주십시오!”

조용히 주먹을 들어올리는 은태정의 모습에 유세운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은태정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강호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광검에 든 두 가지 무공이 있다고.”

“예. 천마광휘와 천륜광검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제법이구나.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게 지금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빠악!

“으악!”

유세운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은태정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강호에 나온 것 같다.”

은태정의 말에 유세운은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놈들이 뜬금없이 왜 나온 답니까?”

유세운은 은태정이 자신의 발목을 잡기 위한 변명이라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녀석들 만날 일 없으니 내보내 주세요. 저는 흑무기마대에 볼일이 있습니다.”

유세운의 말에 은태정은 말없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빠악!

“으악! 정말 왜 이러십니까!”

“다시 저번처럼 네 문도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이곳에서 광검에 이를 때까지 수련을 해라!”

은태정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은 없지만 광검이라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도 아니었는데 어찌 그것을 기다린단 말인가. 유세운은 굳은 의지로 은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됩니다. 전 한시가 급합니다.”

은태정은 주먹을 들어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영원히 안 급하게 해주랴?”

“크윽!”

결국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었다.

채챙!

“무슨 일입니까?”

유태청이 자신의 검으로 상대의 목을 찌르며 물었다. 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창검무영 왕전도 땀을 흘리며 다급히 답했다.

“이들이 혈천문의 고수들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겠습니다.”

왕전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력이 빠져나가 있다지만 창천궁을 칠 생각을 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총력을 기울였는지 자신들이 상대하는 이들이 혈마단의 고수들이었다.

혈마단이라면 혈천문의 외문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자들이었다. 하나하나 어디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사기(邪氣)를 물씬 풍기는 자들이 펼치는 검술이 당해내기 쉽지 않았다.

챙!

다시 한번 자신을 찔러오는 혈마단원의 검을 막아낸 왕전의 검이 그의 목을 베었다.

“켁!”

왕전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별궁은 혈마단의 손에 넘어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창천궁에서 뽑은 무사들이기는 했지만 아직 어디에서 소속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들 열명이 덤벼도 혈마단원 하나를 막지 못했다.

왕전은 다급히 소리쳤다.

“일단 몸을 빼내십시오.”

왕전의 말에 유태청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왕전은 혈마단원의 검을 막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한 사람의 검이라도 더욱 필요한 때에!”

왕전은 답답했다. 지금은 살아남기 조차 포기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면서 피하지 않는 그를 보니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차앗!”

언제 유주란의 검술이 이렇게 늘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팔랑거리는 환검을 펼치며 두 명의 혈마단원을 막아내는 모습에 절로 경탄이 나왔다. 하지만 그건 잠시 버틸 뿐 결국 이곳에 있는 이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장강붕파!”

콰콰쾅!

굉음과 함께 혈마단원 셋이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왕전은 내성의 고수가 이곳으로 온 것이란 생각에 고개를 돌리다 두눈을 부릅떴다.

“소공녀님!”

피했어도 벌써 피했어야 할 백연혜가 검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주란을 공격하던 자 중 한명이 돌아서며 코웃음을 쳤다.

“흥!”

혈마단원의 검에서 뿜어져 나가는 검강을 보고 왕전이 다급히 뛰어들려는 찰나 백연혜의 검이 먼저 찔러 들어갔다. 검강을 비켜 흘린 백연혜의 검이 단번에 혈마단원의 목을 베었다.

이곳에 들이닥친 혈마단원의 숫자가 이십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이제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백연혜가 유주란의 곁에 내려서며 미소 지었다.

“아직 무사하셨네요.”

유주란은 백연혜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호호. 아직 도망 안가시고 뭐하셨어요?”

유주란의 물음에 백연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마져 도망가면 창천궁은 누가 지켜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호호호호. 물론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너희가 살아나갈 길이 없지.”

날카로운 교성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터질 듯 전신을 꼭 죄는 혈의를 입은 황혜란이 그곳에서 웃고 있었다. 백연혜의 검이 그녀를 향했다.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아느냐?”

“무사하지 그럼 어떻게 되려고?”

태연히 대꾸하는 황혜란은 백연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 셋은 사로잡아라!”

왕전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황혜란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자들의 가슴에 새겨 진 혈왕(血王)이라는 두 글씨가 보였다.

혈왕단. 혈천문 외문의 가장 강력한 이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이미 모두 검강의 수준을 넘어선 자들. 왕전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부는 이미 났다.

“웃기지마!”

앞으로 뛰쳐나가는 백연혜의 검에서 장강붕파가 시전 되는 것을 본 왕전은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콰쾅!

황혜란의 뒤에 서 있던 사내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도강이 장강붕파를 막아냈다. 황혜란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이미 늦었어.”

황혜란의 웃음소리를 듣던 백연혜는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황혜란을 사로잡는다면 적어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강불진을 이용해 뻗어가는 검을 방금 전의 사내가 다시 도로 막아내는 것이 보였다.

쾅!

강하게 검면을 쳐낸 자를 보며 왕전이 신음처럼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혈왕단주!”

백연혜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장강붕파를 시전했다. 아니 시전하려고 했다.

콰쾅!

옆의 벽면이 부서지며 들이 닥치는 자를 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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