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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오문-177화 (17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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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유세운을 바라보던 하얀 색의 수염에 흰머리를 한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너무 심한데요?”

“왜?”

노인의 옆에 서 있던 은태정이 태연히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천하에 이 노인보다 의술이 뛰어난 자는 없을 터였다. 노인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척 보니 제 제자가 손을 쓴 것 같은데…”

“그런데?”

“한달 안에 손을 쓰면 나을 수야 있겠지만 일찍 손 쓸수록 낫기가 편하지요.”

“그래서?”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은태정을 보고는 피식 거렸다.

“지금 제 능력으로는 치료만 가능합니다. 예전의 무공을 되찾는다거나 앞으로 무인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지요.”

“뭐야?”

은태정의 전신에서 견디기 힘든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다고 달라질 거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잔 거냐?”

노인은 은태정을 보며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치료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럼 빨리 말해야지!”

주먹을 들어올리는 은태정을 보며 노인은 유세운을 다시 한번 봤다. 그래도 제자라고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저 혼자 힘으론 안 됩니다.”

“말만 해라.”

“그리고 이 시술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거라서…”

“너 지금 내 앞에서 돈 이야기 꺼내려고 이렇게 오래 끌었냐?”

은태정이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본 노인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지요.”

“다시는 먹지도 못하게 해 줄까?”

은태정의 압력에도 노인은 굴하지 않았다.

“흥!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유세운이라는 녀석 기경팔맥이 뒤틀어진 것을 잡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 되는데 그걸 사서 한단 말인가.

은태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얼마나 원하냐?”

“흐흐흐. 제가 진 빚을 다 탕감해주시죠.”

은태정은 노인의 말에 두 눈에 불을 켰다.

“너 이 자식 지금까지 나한테 바둑으로 져서 빚진게 얼만데 그딴 소리야!”

노인은 입가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수중에 돈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야 이 자식아! 그래도 삼만 냥이나 잃은 놈이 할 말이냐!”

“제자 목숨이 삼만 냥이 안 된다면 저도 포기하죠.”

“이 자식아! 내 제자 목숨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어떤 자식이 말했어?”

흥분하는 은태정을 보며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냥 그 선에서 합의 보자니까요.”

“끄응. 알았다.”

결국 은태정은 지금까지 내기 바둑으로 번 돈을 모두 안받는다는 조건으로 유세운을 치료하기로 했다. 노인은 품에서 침통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그래.”

노인은 유세운을 일어나 앉히고는 침을 놓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침을 꽂는 노인은 은태정을 보지도 않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기경팔맥의 자리를 잡아주고 있으니 천천히 내력을 주입해 주시죠.”

은태정은 노인의 말에 앉아 있는 유세운의 백회혈에 손을 얹었다. 장심을 통해 유세운에게 들어가던 무상진기는 노인이 하나하나 잇는 기경팔맥을 따라 움직였다. 그동안 운기조차 못하고 있던 유세운인지라 기경팔맥이 무척이나 쇠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상진기의 도움을 받으며 점점 기력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거의 한 시진이나 걸려 침을 다 꽂은 노인은 땀을 닦으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솔직히 이 상황의 환자는 자신보다 은태정의 도움이 훨씬 더 필요했다.

기경팔맥이 다시 자리를 잡아도 쇠약해진 그것으로 다시 무공을 닦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배로 힘들었다. 하지만 광검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경지에 오른 은태정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쇠약해진 기경팔맥을 회복시켜 줄 수 있었다.

물론 예전만큼 완전히 돌아오진 않겠지만 거의 그 수준까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은태정 뿐이었다.

“좋은 사부를 뒀군.”

작게 중얼거리는 노인의 말은 이미 누구도 듣지 못했다.

은태정과 유세운을 둘러싼 은빛의 강기막을 보던 노인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에휴. 늙으니 만사가 힘들구먼.”

고작 한 시진 동안 침을 논 것인데도 기력이 다 된 듯 했다. 한숨을 내쉬며 기대앉은 노인은 은태정이 만든 은빛의 구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결국 역사에 남게 되는군요.”

무에 미쳐 인생을 바쳤던 은태정이었다. 강호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우연치 않게였지만 그 덕에 쌓은 친분이었다. 자신보다 오십 년이나 더 살았지만 그의 열정은 아직도 순수한 무인의 자세였다.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다른 것 보다 그것을 배우는게 가장 남는 거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겨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차피 저런 진기 운행을 보니 앞으로 몇 시진은 걸릴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세운은 암흑 속에 버려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련히 절벽 위에서 절규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심정 같아서는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복수를 위해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그런 유세운에게 한 줄기 빛처럼 서서히 전신을 채워가는 무상진기가 느껴졌다. 하나하나 기경팔맥의 끊어진 부분들이 이어지며 그 길을 따라 지나가는 무상진기의 기운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부님!’

천하에 무상진기를 가진 자라면 단 둘이다. 자신과 사부님. 그런 무상진기가 자신의 기경팔맥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낀 유세운은 눈에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왜 기억을 못했을까? 아마 복수에 미쳐 있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전신을 감돌던 무상진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던 유세운의 머릿속으로 혜광심어가 전해져 왔다.

(깨어났으면 운기 시작해라!)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은태정의 목소리인가! 유세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진기를 주입했는지 전신의 기경팔맥에는 무상진기가 가득 휘몰고 있었다.

깊이 자연지기를 빨아들였다. 이미 길과 방법은 알고 있었다. 몸이 그 상태가 아니었을 뿐. 자연지기를 받아 들여 무상진기와 함께 전신의 세맥까지 대주천 시키기 시작했다.

잠을 자던 노인은 별이 보이는 듯한 충격에 잠에서 깼다.

“으윽!”

“너 지금 자고 있었냐?”

노인은 자기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은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끝났습니까?”

“뭐가 끝나?”

태연하게 답하는 은태정의 뒤로는 아직도 은빛의 기운이 구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은태정과 은빛의 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대로 성공적이군요.”

“음. 그건 그래.”

은태정은 힘이 들었는지 노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인은 은태정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한 것 같습니까? 아까 보니 심검의 경지에 들었던 아이 같은데.”

은태정은 묵묵히 유세운의 운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쎄? 그렇게 약한 녀석이 아닌데 어쩌다 그리 당했는지 모르겠군.”

“저번에 말한 그것 때문입니까?”

노인의 물음에 은태정은 말없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을 보고 은태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 정도 살았으면 쓸데없는 호기심이 명을 줄인다는 거 알 때가 되지 않았냐?”

은태정의 말에 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이미 살만큼 살았는데 무슨. 호기심이나 대 채우고 죽어야 될 것 같습니다.”

노인의 말에 은태정은 피식 거렸다.

“그런 놈이 돈은 탐내냐?”

“그거야 죽을 때 저승에 짊어지고 가려고 그러는거 아닙니까.”

“잘도 그러겠다.”

가볍게 핀잔을 준 은태정은 아직도 운기중인 유세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두 명에게 걸렸다면 살아서 나를 보진 못했을 거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흐음. 그렇군요.”

유세운의 운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완쾌 된다고 해도 심검의 경지 밖에 되지 않을 텐데…”

노인의 말에 은태정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심검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

“에이! 그래도 광검에 든 사람 옆에서 몇 달 있다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노인의 말에 은태정은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생각했다. 은태정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저대로 내보내면 십중팔구 반드시 죽을테니.”

“크흐흐. 그럼 수련 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런데 왜 네가 좋아하냐?”

은태정의 물음에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태정은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나도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은태정의 말에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데리고 오신 애들 중에 아는 애도 있고, 연구해볼 만한 녀석도 한 놈 있길래 하는 말입니다.”

은태정은 노인의 말에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명색이 제자의 문도들이라는데 손 댈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그리고 저 정도 되는 의원이 손을 대면 있던 병도 낫는 법입니다.”

“얼씨구! 너 그걸 빙자해서 얼마나 뜯어내려고 그러는 거냐?”

은태정의 물음에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고는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놈은 나도 흥미 있는 놈이라 돈 안 받을 테니 말입니다.”

“흥! 알아서 해!”

간단하게 코웃음 친 은태정은 다시 주저앉아 유세운의 운기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이보다 든든한 호법은 없으리라 생각한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만수화의님!”

웃으며 달려오는 곽부절을 안아 든 노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광오문도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 빤히 보는 거냐?”

“문주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양관척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노인 만수화의는 입가에 미소만을 지었다.

“뭐 자기 사부가 맡았으니 알아서 하겠지.”

만수화의는 태연하게 말하고서는 곽부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많이 나았나 보구나.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제가 돌아다니려고 그런 건 아니 구요.”

차마 은태정의 허공섭물에 잡혀 왔다는 말을 못하고 주저하는 아이를 내려주고 만수화의는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야! 거기 염소수염!”

“예?”

도병우는 자신을 부르는 노인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언제 봤다고 대뜸 염소수염이라고 하는지 머릿속에서 열이 확 치솟는 것 같았다.

“넌 나 좀 보자.”

만수화의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병우는 주변에 있는 광오문도들을 바라보았지만 다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병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나 만수화의를 따라갔다.

광오곡이라 새겨 진 커다란 바위 옆에 와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만수화의에게 다가간 도병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만수화의는 뜬금없이 물었다.

“언제부터냐?”

“예?”

아까부터 생각과 다르게 멍청한 질문만 한다고 생각하던 도병우는 돌아서는 만수화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싸늘한 표정. 그리고 두 눈 가득 이상한 열기를 품은 표정이었다.

“네놈 속에 있는 그 혈왕고(血王蠱)에 대해 묻는 거다.”

“예?”

도병우는 다시 한번 멍청하게 질문을 했다. 자신을 진맥 한 번 해보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알아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병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좀 오래 됐습니다.”

만수화의는 도병우를 바라보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파환단(破幻丹)을 먹은게 언제냐?”

“예?”

결국 도병우는 다시 한번 멍청한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파환단의 존재조차 알다니 그것은 오직 수라마교에서만 나오는 비전의 환단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당하기 전에는 자신조차 모르던 것.

도병우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만수화의를 쏘아보았다.

“설마 마교의 인물이십니까?”

빠악!

“크윽!”

머리를 감싸 쥐는 도병우를 보며 만수화의가 이를 갈았다.

“이런 멍청한 녀석! 천하제일의를 뭐로 보는 거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만수화의의 눈을 보던 도병우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한달 조금 넘었습니다.”

만수화의는 놀랍다는 듯이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통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용케 다른 사람들한테 안 들켰군.”

도병우는 씁쓸한 표정만을 지었다. 만수화의는 한숨을 내쉬며 도병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는 내일부터 나랑 같이 지낸다. 알겠냐?”

“예.”

대답을 하면서도 왠지 만수화의의 알 수 없는 열기가 떠오르는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도병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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