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수라마교
휘날리던 눈발이 점점 약해져 마침내 멈춰졌다. 단우태는 자신의 혈발을 뒤로 단정히 넘긴 채 청의문을 바라보았다.
“왜 나오질 않지?”
며칠을 기다렸지만 청의문에 들어앉은 전대의 늙은이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우태의 얼굴에 따분함이 감돌았다.
“그래도 제법 정예가 모였다고 생각했더니 일만 귀찮게 하는군.”
단우태의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단우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단우태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좋아. 그럼 화끈하게 불장난이나 좀 해볼까?”
단우태의 말에 단우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우태는 단우적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밤은 청의문 안에서 자고 싶군.”
돌아서 막사로 들어가는 단우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우적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청혈협 조영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듯 하네.”
“허허. 그래도 피도 안보고 꽤나 오래 버텼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창궁검 백건호를 향해 천룡후 헌원수도 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군. 이렇게 자네들과 같이 움직여 보는게.”
“아마 한 사십 년은 넘었지 아마?”
각기 다른 육대세력의 수장이 된 이후로 젊었을 때처럼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같이 움직인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헌원수의 말에 그들은 모두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들이 육룡이었던 시절. 지금은 그 중 둘이 죽고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과 혈륜마(血輪魔) 황형산 뿐이었다. 물론 젊었을 적에야 가끔 볼 일이 있었지만 그가 혈천문의 문주가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백건호는 자신의 창룡검을 어루만지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서 가자고. 늦으면 손도 못써볼지 모르니.”
백건호의 말에 조영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자네들 무공을 견식할 수 있어 기분 좋군.”
“허허허. 우리야 말로 기대되는데. 자네가 펼치던 청혈인(淸血印)이 보고 싶군.”
“원 없이 보여주겠네.”
눈이 그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준비시킨 병력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쌓인 눈을 녹일 듯 했다. 조영은 그들 앞으로 가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모두 알고는 있겠지?”
“예!”
조영은 눈이 오는 동안 청의문의 비밀통로를 통해서 무인들이 아닌 식솔들과 청의금검대 백 명을 내보냈다. 식솔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예!”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 일. 그들의 눈에서는 만녀한철이라도 녹일 듯한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최대한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그것이 너희 가족과 전 중원천하를 위한 길이니라.”
“예!”
우렁찬 대답에 조영은 웃음을 지었다. 조영은 묵묵히 백건호를 바라보았다. 백건호는 천천히 창룡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뽑혀 나온 창룡검에 푸른 검강이 뻗어 나왔다. 삼 장에 달하는 검강을 뽑아낸 백건호의 입에서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가라! 수라마교의 뜻을 오늘 이 자리에서 꺾어라!”
“우와아아!”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청의문의 대문이 열렸다. 대문 밖으로 수라마교의 마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조영과 백건호, 현원수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비호처럼 날아오른 그들의 신형이 가장 먼저 청의문의 대문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이천의 정예 고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눈이 쌓인 땅을 평지처럼 달려오는 무림인들을 보며 단우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잘 모르나 보군.”
수라마교가 아니 수라성이 그동안 얼마나 준비했는지를 모르는 그들의 만용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북천방이 아니었어도 자신들 힘만으로도 나머지 육대세력을 멸할 수 있었다. 수라의 뜻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대에서도 무림일통이 가능했을 터.
단우적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수라의 뜻을 펼칠 때다! 쳐라!”
단우적의 손이 내려짐과 동시에 일천 육백에 이르는 마인이 오행마제를 따라 앞으로 몸을 날렸다.
검붉은 물결을 보며 단우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단우적의 시선에 셋으로 갈라지는 정파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같이 모여있다해도 평생을 다르게 수련해 온 이들. 각자 자신의 문파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운데의 병력에 청혈협 조영과 청의문도들이, 왼쪽에는 창궁검 백건호와 창영홍연대가, 오른쪽으로 멸마권웅단(滅魔拳熊團)과 천룡후 헌원수가 앞으로 내달렸다.
창룡검을 뽑아든 채 달려가는 백건호의 앞으로 두 명의 노인을 필두로 달려오는 무리들이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
백건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오행마제인가?”
역시 마주 달려오던 오행마제들도 자신을 알아본 듯 했다.
“그만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오행마제 중 수령마제(水靈魔帝)의 외침에 백건호는 대답으로 창룡검을 내뻗었다.
슈아악.
물결치듯 뻗어가는 푸른 검강에 수령마제와 그의 곁에 달리던 금령마제(金靈魔帝)의 양손에서 강기가 뻗어 나왔다.
콰쾅.
몰아쳐 오는 강력의 여파를 베어 내고 앞으로 내달린 백건호를 본 수령마제와 금령마제는 다급히 옆으로 피했다. 이미 백건호의 창룡검이 그들을 향해 재차 검강을 뿌려대고 있었다.
“제길!”
“심검에 들었다더니 맞는가 보군!”
다급히 쌍장을 뻗어내 검강을 막아내는 그들을 뒤로 하고 백건호는 마인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푸학.
“크아악!”
대번에 다섯 마인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비록 아무리 강한 마인이라 해도 극마의 경지에 든 자가 아니라면 백건호의 일검을 피할 수 없었다.
앞으로 달려가는 백건호의 뒤로 창천궁의 창검홍연대원 오 백이 사방으로 검기를 뿜으며 따라왔다.
반으로 갈리기 시작한 마인들은 누구도 백건호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백건호가 마인들의 중앙에 이를 때까지는.
콰쾅!
달려가던 기세를 빌어 내뻗은 검강을 가볍게 막아내는 자를 보고 백건호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흑의에 검은 두건을 이마에 두르고 있는 중년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자신의 묵검(墨劍)을 들어 백건호를 겨누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냐?”
백건호의 물음에 중년사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천십팔마왕의 수좌인 묵검마왕(墨劍魔王)입니다.”
“비천십팔마왕의 수좌?”
묵검마왕은 자신의 짙은 묵색의 검을 들어 백건호를 겨누었다.
“육대세력 중 저희가 가장 상대하고 싶던 곳이 창천궁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검을 꺾을 수 있어 다행이군요.”
묵검마왕의 말에 백건호는 안색을 찌푸렸다.
“건방지군.”
초마의 경지에 든 자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봤다. 더욱이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빈틈 하나 없는 그의 모습에 절로 창룡검을 쥔 손에 땀이 찼다.
거칠 것 없이 내뻗는 일 권(一拳)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마인들을 보며 헌원수의 입에서는 미소가 그려졌다. 평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많은 마인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손에 닿는 마인 하나하나가 죽어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니 내뻗는 주먹에 더욱 경력이 실리는 것 같았다.
콰쾅!
“크아악!”
오행마제 중 둘과 겨루지 않고 지나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기세가 있어 옆으로 물러났던 그들에 대한 피해라고 해야 미미할 터. 수라마교의 마인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헌원수의 주먹이 다시 내뻗어졌다.
반으로 갈라지던 마인들의 중앙쯤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좀만 더 가서 그들을 가로질러야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가득했다.
콰쾅!
“크윽!”
헌원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게 내뻗던 권강을 가볍게 막아내 자신의 걸음을 멈추게 한 자가 보였다. 짙은 흑의에 구척에 이르는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중년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의 두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살벌했다.
“누구냐?”
헌원수의 물음에 사내는 팔짱을 끼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천룡후 헌원수를 내 손으로 잡게 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내의 웃음에 헌원수의 수염이 분노로 떨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뭐하는 놈이냐?”
“크흐흐. 비천십팔마왕중 서열 이 위인 황권마왕(黃拳魔王)이시다.”
“감히 수라성주도 아니고 그 부하 주제에 내 앞에서 큰 소리치는 것이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직까지 저릿저릿한 주먹에 헌원수는 긴장했다. 비천십팔마왕이라면 이정도의 고수가 열여덟 명이나 있다는 뜻. 헌원수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한 놈이라도 줄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헌원수를 바라보는 황권마왕은 여전히 느긋했다.
“단번에 여기까지 뚫은 줄 알겠지? 웃기지 마라. 너희 늙은이 들이 도망 갈까봐 일부러 열어준 길이니.”
“도망?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헌원수의 전신에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태산이라도 뒤엎을 기세. 웃고 있던 황권마왕도 천천히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해도 서로 심검에 달한 상대임을 잘 알았다.
미려하게 뻗어가는 일장에 오행마제 중 수좌를 맡고 있는 화령마제(火靈魔帝)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애초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대충 상대하고 피하려 했지만 청혈협 조영의 손속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과거에도 마인들을 보면 결코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 않지 않던 조영의 손에 걸려 벗어난 마인이 없다던 소문이 사실인 듯 했다.
전신을 옥죄어 오는 기세에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뻗어오는 장세에 담긴 경력은 마주하면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 덮쳐왔다.
자신이 계속 뒤로 밀리는 동안 청의문의 고수들과 마인들은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준비해온 수라마교 마인들이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눈에 독기를 품은 청의문도들은 동귀어진도 주저하지 않았다. 검에 찔리면 검을 움켜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화령마제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이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신없이 뒤로 물리다 보니 자신도 어느덧 계획했던 진의 중앙에 도착했다.
청혈협 조영의 눈에 살기가 비쳤다.
“그만 쉬게.”
화령마제는 다급해졌다. 조영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청혈인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손모양의 푸른 강기 덩어리가 뻗어오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화령마제의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기라. 역시 청혈인의 비밀은 그것이었나?”
콰쾅!
굉음과 함께 조영은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화령마제가 다급히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태상호법님!”
“됐다. 어서 뒤에 있는 청의문 녀석들이나 처리해라.”
“존명!”
물러나는 화령마제를 보면서도 조영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조영은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태상호법이라면 교주는 단우태 그 아이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군. 어차피 그래봤자 지금뿐이겠지만.”
조영은 단우적의 혈발과 혈미를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초마의 경지 그 중에서도 끝을 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벽을 넘지 못했나 보군.”
“벽을 만져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것만으로 천하에 나를 상대할 자 교주님을 제외하고 없으니 말이다.”
조영은 깊이 자연지기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그 경지 한번 견식해 보도록 하지.”
“견식의 대가는 목숨이다.”
단우적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