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75화 (175/194)

(175)

양관척의 집에 있던 식솔 모두를 처참하게 죽이고 그 시체를 태워버린 출파는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그자들의 행방을 아직도 못 찾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출파의 말에 청운마왕도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상하군.”

“뭐가?”

출파의 물음에 청운마왕은 자신의 곰방대를 입에 물며 답했다.

“더이상 연락이 없어.”

“무슨 소리야?”

청운마왕은 출파를 바라보고는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죽음을 각오한 모양이야.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말을 태연히 하고 있는 청운마왕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출파의 장창을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무래도 일단은 기다려야 될 것 같군.”

“무슨 개소리냐!”

출파의 고함에 청운마왕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본교의 전 병력이 움직이고 있어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도 없는데…”

“전 병력이 움직여?”

“그래. 수라의 뜻이 천하에 퍼지기 시작할 때가 된 것이지.”

간단한 청운마왕의 대답에 출파는 코웃음을 쳤다.

“내겐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자가 있는 곳을 알려달란 말이다.”

청운마왕은 태연하게 곰방대를 물며 답했다.

“나도 설마 자네가 그를 놓칠 줄은 몰랐지. 게다가 녀석들도 필사적일 테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군.”

청운마왕의 말에 출파는 이를 갈았다.

“너! 그들을 죽이고 난 다음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뒤돌아서서 나가는 출파의 뒷모습을 향해 청운마왕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기다려지는군. 너 때문에 수라의 뜻을 전하는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됐으니.”

형산(衡山)

호남성 형산현에 위치하고 웅장한 산세가 수백 리에 이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 중원 오악(五嶽)중 남악(南嶽)이라고도 불리 운다. 그런 형산의 가장 유명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축융(祝融), 천주(天柱), 부용(芙蓉), 자개(紫蓋), 석름등이 있다.

한기의 마차가 힘차게 자개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더 이상은 길이 없어 마차를 달릴 수가 없었다.

마부석에서 내린 곽부설이 조용히 말했다.

“문주님 이제는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두 눈에서 불을 뿜을 듯한 유세운이 걸어 나왔다. 하지만 바닥에 내려서는 걸음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부축하려는 곽부설의 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니 가자.”

곽부설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고 자개봉을 바라보는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이미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인 자개봉을 과연 유세운이 올라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곽부설은 말없이 돌아섰다.

“자개봉의 정상까지 올라가면 뵐 수 있을 겁니다.”

곽부설의 말에 유세운의 시선은 자개봉의 정상을 향해 고정되었다. 이미 몸 상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조예림이 말한 한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유세운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곳까지만 가면 된다.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다짐으로 옮기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광오문도들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남았다. 양관척은 부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유세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유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곽부설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여 그의 앞으로 나섰다. 길을 아는 것은 자신이니 자신이 앞장 서야 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곽부설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유세운은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걸음을 멈추면 동무벽과 관백의 복수를 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유세운 덕에 일행은 해가 지기 시작하고서야 자개봉의 정상에 도착했다. 세 시진에 걸린 힘겨운 이동이었다.

자개봉의 정상에는 녹지 않은 눈과 작은 목옥 한 채가 붉은 석양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유세운의 시선은 착찹하기만 했다. 적어도 조예림의 곁을 떠나 올 때만 해도 몸을 빨리 회복해서 백연혜를 찾아 갈 생각만 했었다. 석양을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돌아갈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여야 할 존재가 생겼다. 적어도 흑무기마대라는 이름이 강호에서 잊혀지기 전까지 그녀에게 돌아 갈 수 없었다. 그런 유세운의 귀로 곽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수화의님. 곽부설입니다. 안에 계신지요?”

곽부설의 물음에 유세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잠시 목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한 소년이 밖으로 나왔다. 걸어 나오는 소년을 보고 곽부설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부절아! 다 나았느냐?”

곽부설의 물음에 소년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응! 그런데 형 언제 온 거야?”

걸어오는 소년의 어깨를 움켜쥔 곽부설이 급히 물었다.

“그보다 만수화의님은 어디 계시냐?”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만수화의님은 안계신데…”

소년의 말에 유세운은 한달음에 달려가 곽부설을 밀치고 어깨를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냐! 이곳에 분명히…”

숨이 찬 유세운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소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곽부설을 바라보았다. 곽부설 역시 다급한 표정이었는지라 소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두 달은 안 된 것 같은데 그때쯤에 떠나셨어요.”

소년의 말에 유세운은 힘없이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개봉의 정상에 자리한 눈위를 걸어가는 유세운을 보고 양관척이 다가왔다.

“문주님…”

유세운은 말없이 양관척을 바라보았다. 말없는 유세운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하하. 들었어? 이곳에 없다는 군.”

양관척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천풍쌍기의 복수를 위해서는 유세운의 주화입마를 치료하는게 가장 우선이었다. 그가 없다면 복수는 아예 불가능했다.

유세운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개봉의 절벽 근처로 다가갔다. 눈부신 석양의 빛을 바라보던 유세운은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들의 복수도 해 줄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유세운의 눈에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곽부설은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없었느냐?”

“그냥 신기한 것을 발견하셨다고 웃으시면서 떠나셨어.”

곽부설의 동생 곽부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으로 형이 누군가를 데려온 것도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사람은 더욱더 전례가 없었다. 의원이라고 만난 것도 만수화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이것저것 가르쳐 주며 치료해 준 만수화의와 정이 들었지만 치료가 끝나자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며 떠나버렸었다. 혼자 간신히 곽부설이 준비해놓은 식량으로 지내며 따분해 하던 곽부절에게 찾아온 사람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자가 있었다.

불쑥 자신의 형을 밀어내며 자신을 향해 두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모습은 광인의 그것과 같았다.

곽부절은 시선을 돌려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절벽의 끝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으아아아악!”

유세운은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과 절망을 모두 가슴에 담아 소리쳤다. 형산의 봉우리를 타고 메아리쳐 되어 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유세운은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전신의 힘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소리치는 유세운은 쉬어터진 목소리로 절규했다.

“대체 뭐가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무공이고 무엇이 대적할 자 없는 거란 말입니까! 자신의 호법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이깟 무공에 그들의 목숨으로 연명한 이깟 목숨! 대체 무엇이…쿨럭!”

절규하던 유세운은 무리한 등산으로 약해진 체력에 손상된 기경팔맥의 영향으로 각혈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체 무엇이… 무엇이 광오문의 문주라는 겁니까! 고작 이정도 밖에 안되는데…”

유세운은 절규해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형산 구석구석 메아리쳐 돌아왔다. 유세운은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대체 무엇이…”

“문주님!”

가장 빠른 신법의 곽부설이 유세운을 받아 들었다. 양관척과 육우령도 다급히 달려왔다. 곽부설은 가만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곽부절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물을 가져 오거라!”

단 한번도 자신을 향해 소리친 적 없는 형의 호통에 놀란 곽부절이 돌아서려다 멈추고 두 눈을 부릅떴다. 곽부절의 모습에 곽부설이 다시 소리쳤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곽부절은 아무 대답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석양이 지는 태양을 가리켰다. 곽부설은 다시 한번 소리치려다 자신들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의 석양사이로 빛나는 은색의 광채를.

“문주님?”

은색의 광채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세운의 절기였다.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육우령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지만 그의 시선은 곧 곽부설의 품안에 쓰러져 있는 유세운을 향했다.

다시 고개를 든 육우령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유세운이 쓰러진 곳. 절벽의 가장자리다. 그리고 지금 태양을 등지고 자신들을 보는 이가 있는 곳은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

육우령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청룡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

육우령의 청룡도가 자신을 향하자 태양을 등진 채 유세운을 바라보던 그림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헉!”

단지 시선만으로 육우령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흔한 살기나 기세조차 뿜지 않았는데 뒤로 물러난 자신을 탓하며 청룡도를 움켜쥐었다.

곽부설도 어느새 자신의 검에 손을 얹고 상대를 쏘아 보았다. 은발에 은빛 눈썹을 가진 소년은 쓰러져 있는 유세운을 향해 다시 시선을 보냈다. 천천히 허공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년의 모습에 양관척과 도병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 쳤다.

소년은 유세운의 바로 앞에 눈이 쌓인 바닥을 살며시 밟으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제법이구나.”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육우령과 곽부설을 향한 소년의 말에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소년은 가만히 곽부설의 품에서 유세운을 받아들었다.

“누구냐?”

“예?”

자신도 모르게 존대가 튀어나온 곽부설은 오늘따라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살수가 이렇게 상대 앞에서 흔들리다니.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누가 이 녀석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냐고 묻고 있다.”

천하에 유세운을 향해 이 녀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강호에 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왠지 이 소년에게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곽부절이 나서서 그들의 궁금증을 대신했다.

“넌 누구야?”

간단한 물음에 곽부설은 이를 악물고 곽부절의 앞을 막아섰다.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는 단 한번 손짓이면 자신의 동생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유세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누구냐?”

양관척이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취했다.

“저희는 광오문의 문도들입니다.”

소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광오문의 문도?”

양관척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존성대명을 가르쳐 주십시오.”

양관척은 말을 하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상대는 허공답보를 펼치는 절대고수. 어찌 이렇게 경망스럽게 물었나를 저주했지만 소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시선은 눈물을 흘리며 피를 토한 채 기절해 있는 유세운에게로 향했다.

“문도를 얻어도 어찌 저런 것들만 얻었는지. 쯧쯧.”

“무슨 말씀이신지…?”

양관척은 의문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했다. 소년의 시선이 주변을 돌아보자 광오문도 전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육우령이었다. 허공섭물을 펼치는 것도 놀랍지만 자신이 반항조차 못하다니.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피식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꿈틀대지마. 잘못하다 풀리면 살아남지 못할 테니.”

소년 은태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절벽을 향해 날아올랐다. 은태정의 허공섭물에 묶인 여섯 명의 광오문도 들은 일제히 하늘을 나는 경험을 했다.

“으아아아악!”

어린 곽부절의 비명소리가 형산 자개봉을 중심으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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