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74화 (17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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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는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청의문의 모습은 소리 없는 적막 속에서도 육백 년을 내려온 강호의 패자답게 웅장해 보였다.

혈발의 사내 단우태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저곳인가?”

“예. 저곳이 지난 육백 년 간 강호의 패자 중 하나인 청의문입니다.”

단우태는 수라마황 단우적의 설명에 청의문을 향한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물었다.

“예상되는 적은?”

단우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창천궁과 천룡문의 태상궁주와 태상문주가 각기 오백의 정예들을 데리고 와서 지금 현재 대략 이천여명의 정예와 심검에 이른 고수 셋이 있을 것입니다.”

단우적의 말에 단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하지는 않을 곳이군.”

단우태는 하늘에 내리는 눈을 손으로 받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수련을 위해 동굴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던가? 지금 이렇게 내리는 눈이 손에서 녹는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늙은 것들이 죽을 곳은 확실히 찾았군.”

단우태는 간단히 말하고서 천천히 돌아섰다.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까지 기어 나오지 않는다면 일단 불을 지르고 나오는 놈을 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단우태는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고 단우적의 시선은 다시 청의문을 향했다.

“이제 시작이다.”

청의문 내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청혈림(淸血林).

조용히 앉아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얼굴이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 서리가 내린 듯 하얀 수염을 쓰다듬던 청혈협 조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이렇게 친구들 얼굴도 보게 되는군.”

조영의 말에 허리에 찬 창룡검을 쓰다듬던 창궁검 백건호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이정도 해주지 않으면 다른 애들이 숨을 시간을 벌어주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같은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유달리 덩치가 크고 정정한 노인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우리야 다 늙어서 어차피 상관없다지만 다른 아이들이 불쌍하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일세.”

작게 대답하는 조영을 보며 정정한 노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천룡문의 태상문주인 천룡후(天龍吼) 헌원수도 물론 그런 뜻인걸 알고 이번 일에 자진해서 찾아왔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건호는 차분히 차를 마시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철마성이 무너졌다는데 어떻게 된 이야긴지 아는가?”

백건호의 물음에 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이해가 안가네. 사실 철마풍 독고청도 이번에 심검에 든 것으로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가?”

헌원수의 물음에 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명의 인물에게 당한 것 같다는 보고는 받았네.”

“두 명?”

놀라서 물어오는 헌원수와 백건호를 보며 조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정확한 정보는 아닐세. 그 정보를 보낸 아이마저 그들에게 당한 것 같으니 말일세.”

백건호는 헌원수를 보며 물었다.

“자네 나랑 같이 철마성에 들어가면 다 죽이고 나올 자신 있나?”

백건호의 물음에 헌원수는 피식 거렸다.

“말이 잘못 된 거 아닌가? 둘이서 살아나올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게 맞을 듯하네.”

헌원수의 말에 백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군. 심검의 고수 둘이라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대체 그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조영은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누군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움직였다는 것은 곧 강호에 그자도 모습을 드러내겠지.”

조영의 말에 백건호도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무거운 짐만 남겨두고 가는 것 같군.”

“그러게 말일세.”

끼익. 끼이익.

노를 젓는 소리만이 어두운 밤 장강에 울리고 있었다. 배의 선수에서 말없이 강바람을 맞고 있는 유세운의 손은 피가 나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몸이 약해져서 그가 깨어난 것은 배로 움직인 지 이틀 만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육우령에게 수혈을 점혈 당했었다.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수하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남았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만큼 분노하고 절규했다. 지금은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배의 선수에서 하늘을 바라본 것도 오늘로 꼬박 이틀째다.

“문주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세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곽부설은 대답 없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동호법과 약속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문주님을 완치시키기로.”

그제야 곽부설은 목이 갈라져 쉴 대로 쉰 유세운을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곽부설은 보통 사람보다 약해진 체력의 유세운이 이틀이나 강바람을 맞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수혈을 점하려던 곽부설을 향해 유세운이 돌아섰다.

“분명히 하나만 말하지. 앞으로 한번만 더 내 수혈을 점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는다.”

곽부설의 냉막한 표정에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형산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유세운의 물음에 곽부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내일이면 도착할 작은 어촌이 있습니다. 광리촌(廣鯉村)이라는 곳인데 그곳에서부터 마차로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립니다.”

유세운은 말없이 다시 돌아섰다. 주저하는 곽부설의 귀로 유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마지막은 지켜봐줬어야 했어.”

작게 들리는 유세운의 말에 곽부설은 가만히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이 있었다해도 달라지진 않았을 거였다. 심검에 이른 상대라면 광오문의 모두가 달려들어도 당해낼 수 없는 자. 동무벽의 말이 가장 맞는 말이었음에도 가슴 한쪽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의문의 정예들이 모여 지어놓은 막사 중 가장 커다란 막사에 앉아 있던 조예림은 자신의 앞에서 보고를 하는 엽패를 보며 어이 없어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엽패도 물론 이곳으로 오면서 조예림이 당금의 청의문주라는 것을 들었지만 아직도 반신반의 하며 말을 이었다.

“태상문주님께서 이곳에 있는 다른 세력들과 함께 숨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마지막 남은 혈육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의 조부를 믿고 눈을 감으셨는데 이제 그분마저 죽음에 직면해 있다니. 그리고 그 소식을 들고 달려온 엽패를 향해서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 할아버님의 곁에 안계시고 이곳으로 오신거죠?”

엽패는 묵묵히 고개를 들어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혈육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조예림의 시선이 많이 흐려져 있었다. 엽패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태상문주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엽패는 다시 말하는 조예림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심검에 이르셨던 태상문주님 조차 이번 일전에 목숨을 거셨습니다.”

조예림은 말없이 엽패를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

“정말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건가요?”

엽패는 조예림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엽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창천궁과 천룡문의 태상궁주님과 태상문주님도 오셨지만 역시나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엽패의 말에 조예림은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른 두 분도 모두 심검에 들었으리라고 생각됐다. 육백년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기재들이라 불리신 분들. 이번 폐관에서 심검에 들지 못하면 다시는 나오지도 않겠다고 소리치며 들어가신 분들이다.

조예림은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청의문의 본가가 습격을 당한다면 과연 어디로 숨어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휴~. 일단 창천궁주님과 천룡문주님과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엽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예림은 엽패에게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세요.”

비록 그에게 무공을 배워 사제지간이긴 하지만 이제는 문주와 부문주의 사이가 된 터라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엽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복수는 반드시 해야 될 것입니다.”

“아직 할아버지가 어찌 되신 건 아니잖아요.”

가벼운 미소를 짓는 조예림을 보며 엽패도 제발 그렇게 되기를 속으로 빌었다.

창천궁주 백선후는 자신 앞에 부복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창궁검 백건호의 유일한 호위이자 심복인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죽음.

백선후는 한숨을 내쉬며 명했다.

“일어나게.”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 못지않은 사내의 기세에 백선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라도 있어드렸어야 하는 것을.”

“태상궁주님의 뜻입니다.”

“알고 있네.”

백선후는 오늘따라 자신의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밖에서 호위를 서던 창명백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의문주님과 천룡문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거라.”

백선후는 입안이 씁쓸해졌다. 물론 그들도 비슷한 보고를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백선후의 예상대로 들어서는 이들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절로 한숨이 세어 나왔다.

“어서들 오시오.”

갈색 무복에 그려진 용들이 승천하는 모습. 짧은 턱수염에 강렬한 눈빛의 중년인. 천룡신권 헌원백은 두 눈을 빛내며 백선후에게 말을 건넸다.

“들으셨소?”

“들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헌원백과 엽패를 대동한 조예림은 차례대로 자리에 앉았다. 백선후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들이십니까?”

헌원백은 탁자위에 올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가 사지(死地)에 들어가셨는데도 훗날을 기약하라는 전언에 발이 묶인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말에 주먹만 쥐고 있을 뿐이었다. 헌원백의 시선이 백선후를 향했다.

“백궁주는 어쩔 생각이오?”

백선후는 자신의 턱을 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따라야지요.”

조예림은 백선후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이 많은 인원이 어디로 움직인단 말인지요?”

조예림의 물음에 헌원백도 같은 의미의 시선으로 백선후를 바라보았다. 백선후는 지도에 한 지점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정도 병력이 숨을 만한 곳이 있습니다.”

백선후가 손으로 짚은 곳을 보며 조예림과 헌원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원백이 시선을 들어 백선후를 바라보았다.

“그곳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이오?”

“뱃길을 이용해야지요.”

지금 이곳에 모인 인원만 해도 사천 명이다. 그 많은 인원을 뱃길로 움직일 배조차 준비할 수가 없었다. 백선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뱃길을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은 오백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머지는 야음을 틈타서 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백선후의 말에 헌원백이 회의가 드는 듯 물었지만 이미 방법은 없었다.

“그곳까지만 가면 적어도 수비하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헌원백은 백선후와 조예림을 보고는 넌지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솔직히 이곳의 인원이라면 그들을 막을 수 없겠소? 수라성의 병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천 밖에 되지 않지 않소,”

헌원백의 물음에 백선후는 씁쓸하게 웃음을 남겼다.

“절대 고수의 수가 부족한 것이지요. 아버님께서 심검에 드시고도 죽음을 각오하셨다는 것은 수라마교의 부활이 저희의 예상을 웃도는 것일 겁니다.”

백선후의 말에 헌원백은 결국 시선을 다시 지도로 향했다. 백선후가 짚은 곳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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