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형산으로…
“이름은 기억해 주마!”
출파의 기마가 앞으로 뛰쳐나오며 그 기세를 실은 장창이 찔러왔다. 동무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척 보기에도 심검에 든 자. 결코 자신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시간을 끌려면 전신전력을 다해야 했다.
스릉.
뽑혀져 나오는 도에 이미 동무벽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베겠다는 의지만이 도에 실렸다.
“호오.”
청운마왕은 여유 있게 관전하며 웃음을 지었다. 동무벽의 일도에 실린 기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길어도 십 년. 짧으면 오 년 안에 심검에 들었을 자였군.”
콰앙!
굉음과 함께 동무벽과 출파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승부는 확실히 나있었다. 출파의 말이 멈춘 대신 동무벽은 극심한 내상에 입가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동무벽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아니다!”
출파보다는 그가 타고 있는 말을 노린 일도였다.
“건방진!”
콰앙!
출파의 장창이 동무벽의 보도를 쳐냈다. 뒤로 세 걸음이나 밀리는 동무벽의 뒤를 관백이 바쳐줬다.
“제법인데?”
동무벽은 입으로 피를 흘려 자신의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적시면서도 우스개 소리를 했다. 출파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쫓아라! 유세운이라는 자를 놓치면 너희는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출파의 내력이 담긴 말에 제 삼 부대는 다시 말을 달렸지만 관백의 부채 끝에 피어나는 선환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달려가면서 진세를 펼쳤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를 보며 관백은 주저 없이 선환을 날렸다.
“뜻대로는 안 된다!”
장창을 들어올리는 출파를 향해 동무벽이 달려들었다.
“네놈 상대는 나다!”
진세가 발동되기 전에 선환에 맞는다면 그 피해는 극심할 터였다. 청운마왕은 웃음 지으며 자신의 곰방대를 가볍게 휘둘렀다,
슈악.
푸른 강환이 흰색의 강환을 막아갔다.
콰쾅!
굉음과 함께 경력의 여파에 밀린 관백이 사당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기마를 탄 채로 사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던 흑무기마대는 결국 진세를 풀었다.
“제길! 죽여!”
장창을 든 채로 기마에서 내려 안으로 진입하는 자들을 보며 청운마왕의 시선은 느긋하게 동무벽과 출파를 향했다.
출파의 두 눈에서 흉광이 뿜어져 나왔다.
“건방진 자! 흑왕삼연격(黑王三連擊)!”
짙은 흑색의 강기가 맺힌 장창이 뻗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무벽은 이를 악물고 보도를 휘둘렀다.
콰쾅.
일격에 보도를 막아내고 이격에 보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이어지는 삼격에 동무벽은 다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지만 단번에 오른쪽 어깨를 잃었다.
“크윽!”
동무벽 역시 사당 안으로 날아갔다. 출파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그려졌다.
“감히 내게 덤비다니 그 용기가 가상하군.”
출파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섰다. 출파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흑무기마대원들이 모두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동무벽을 부축하고 서있는 관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이지만 재미있었다.”
동무벽은 관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평생에 가장 멋진 순간들이었던 것 같군.”
관백도 동무벽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이십 년 만에 나온 강호치고는 재미있었지.”
다가오는 출파를 보며 관백의 부채에 선명한 흰색의 선환이 피어올랐다. 관백은 동무벽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봐. 이번에 깨달은 거야.”
“좋아. 기대하지.”
관백의 오른 발이 진각을 내딛으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출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도 주제를 모르는군. 흑왕삼연격!”
일수에 동무벽을 패퇴시킨 초식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전신을 옥죄는 기세와 무엇이라도 부술 듯한 흑색의 강기를 보는 관백의 눈은 차분했다.
섬전처럼 뻗어오던 일격을 옆으로 흘리고 나아가는 관백의 뒷모습을 보며 동무벽은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한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옥죄는 기세와 경력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관백은 이어서 들어오는 이격을 간신히 피해냈다. 대가로 왼팔을 잃기는 했지만 관백의 시선에 집념이 어렸다. 한 걸음 내딛은 관백의 부채에 맺힌 흰색의 선환이 뻗어 나갔다.
놀란 출파의 표정에 관백은 웃음을 지었다. 눈앞으로 들이닥친 삼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퍼억.
삼격을 바라보던 관백의 앞을 가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뒤늦게 달려들어 관백의 앞을 막아선 동무벽이었다. 관백의 앞을 막아선 동무벽을 뚫은 장창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관백은 동무벽의 등을 보며 그저 가볍게 미소 지었다.
퍼억.
“크아악!”
자신의 장창에 나란히 꿰뚫린 동무벽과 관백이 아닌 출파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에 펼친 관백의 일 수. 그것에 왼쪽 눈을 잃은 출파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잡아라! 놓치면 모두 죽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청운마왕의 손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사당에 모셔진 위패를 부셨다.
콰앙.
위패가 모셔졌던 곳. 부서진 잔해 사이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흑무기마대원 제 삼부대의 전원이 구멍 안으로 달려들었다.
청운마왕은 아직도 왼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의 장창에 꽂힌 천풍쌍기를 바라보는 출파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출파의 장창에 꽂힌 천풍쌍기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내의 수혈을 짚어 등에 업은 양관척은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 입구가 발견 됐다는 뜻이었다. 동굴로 되있어 따라 잡히지 않을 만한 거리를 왔음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도병우가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
“거의 다 왔다.”
도병우는 따라 달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벌써 백장을 넘게 달려왔건만 동굴은 축축한 느낌이 들뿐이었다. 이런 지하에 만든 비상통로라면 들어간 돈도 장난이 아닐 터였다.
도병우는 마지막으로 말한 관백의 전음이 귀에 맴돌았다. 입안이 씁쓸했다.
끝까지 그들을 넘어서지 못한 것만 같았다. 알면서도 덮어주다니. 자신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지켜주마.”
그들의 의기에 도병우는 결국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스스로의 목숨도 가볍게 버리던 그들의 모습에 자신이 너무나 저급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죽은 듯이 잠들어 곽부설의 등에 업혀있는 유세운을 보며 도병우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 왔다!”
양관척의 말에 도병우는 짙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솔직히 지금까지 경신술로 달린 거리라면 악양도 벗어날 만큼의 거리였다.
양관척을 따라 나와 눈에 들어온 것은 동정호. 그리고 앞에 놓인 나룻배뿐이다.
“이게 다야?”
도병우의 물음에 양관척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럼 비상통로로 도망가면서 어디로 갈 줄 알았냐?”
양관척의 대꾸에 도병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육문도 여기 좀 부셔주시오.”
도병우의 말에 육우령은 청룡도를 들어 올렸다. 한층 차가워진 육우령의 표정에 그도 동무벽과 관백의 죽음을 애석해 한다고 느꼈다.
콰쾅!
청룡도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에 그들이 나온 입구는 단번에 무너졌다. 도병우는 다행이라는 듯이 배에 올라서며 말했다.
“흔적은 남지 않겠군.”
“당연하지.”
대답하는 양관척을 보며 도병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시 한번 곽부설의 품에 안긴 유세운을 본 도병우는 밤 하늘을 올려보았다.
“왠 소란이냐!”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던 흑무기마대원들이 멈춰 섰다. 뒤따라 한쪽 눈에 불을 키고 쫓아 들어오던 출파는 그들을 향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무래도 출구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뭐야?”
분노한 출파의 장창은 보고한 자의 머리를 대번에 날렸다.
“컥!”
짧은 단말마와 함께 죽어가는 수하를 바라보는 출파는 이미 악귀와 같았다.
“열명으로 만든 한 개 조만 끝까지 가봐라. 나머지는 악양 일대를 수색한다!”
“예!”
출파는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눈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는 상권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세운이라고 했던가? 반드시 죽여주마.”
입구로 걸어 나오는 출파를 보며 청운마왕이 씁쓸히 웃었다.
“어지간하면 지혈이라도 하지. 금창약이라도 줄까?”
“죽고 싶은 건가?”
으르렁대는 출파를 보며 청운마왕은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리야? 도와주고 싶어서 한 말인데.”
출파는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바닥에 버려진 두 구의 시체를 바라봤다. 아무리 전력을 안 한 흑왕삼연격이었다지만 그것을 피하고 들어와 자신의 한쪽 눈을 가져간 상대를 보며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크흐흐. 목숨을 건 자와 싸우는 방법을 배운 건가?”
초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자신의 기세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 했거늘. 목숨을 건 일격을 결국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거의 심검에 다다른 관백과 동무벽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출파에겐 상관없었다.
육감을 극한까지 깨우친 자신에게 왼쪽 눈이 없다고 무공을 펼치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터져나가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 눈으로 올려보는 밤하늘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정적이 흐르는 대전에 한 사내가 묵묵히 서 있었다.
얼굴의 반을 덮는 흉터. 현은 말없이 기다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자를 보는 현의 얼굴에는 가벼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옥빛의 머리와 수염을 기른 자는 현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
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제는 내 곁에 있어라.”
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옥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현은 나직이 물었다.
“뜻하는 것은 얻으셨습니까?”
“이제 시작일 뿐이지.”
간단한 대답.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뜨거운 야망이었다.
“철마성의 일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차피 그들도 오백년 전에 일어났던 참사의 원흉중 하나다. 애초에 살려둘 마음은 없었다.”
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현의 물음에 그는 간단히 답했다.
“비풍십이검주에게 맡겼다. 곧 있으면 올 것이니라.”
현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래.”
뒤돌아서 대전을 나가는 현을 바라보던 사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주받은 해안을 단신에 배 한 척으로 살아서 나간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밖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전을 걸어 나온 현은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결국 물어보지도 못했소.”
유세운에게 했던 말을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어쩌면 그 대답이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자기가 생각하는 그 대답이었을 것이다. 자식마저 포기하고 무공에 미쳐있던 그에게 돌아올 대답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