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콰당.
앉아 있던 의자가 넘어지도록 다급하게 일어나는 일행을 보고 유세운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다들 왜 그래?”
동무벽이 당황한 눈빛으로 양관척을 바라봤다.
“누구냐?”
“무슨 소리야?”
유세운과 마찬가지로 앉아 있던 양관척도 의아한 듯이 동무벽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인물은 동무벽과 관백, 곽부설과 육우령이었다. 동무벽은 보도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보군.”
“엥? 무슨 말이야?”
유세운이 동무벽을 바라보며 묻는 순간 대문이 있던 방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쾅!
유세운도 인상을 찌푸렸다. 이정도의 굉음이 들릴 정도라면 대번에 대문이 박살났을 것이다. 남의 집 대문을 부셔본 경험이 알려줬다. 그리고 이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건 최소 강환 이상의 경지일 때 가능했다.
관백이 침중한 안색으로 양관척을 바라봤다.
“비밀 통로 같은게 있나?”
“비밀 통로라면 물론 있지만…”
말끝을 흐리는 양관척을 향해 관백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안내해라.”
양관척은 관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게.”
다그닥. 다그닥.
부서진 대문의 잔해사이로 걸음을 옮기던 출파의 기마를 가로막는 노인이 보였다.
“뭐하는 놈들이…크악!”
대답대신 그어진 출파의 장창의 경로를 따라 지나간 기세에 노인의 몸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출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유세운! 나와라!”
출파의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대궐 같은 양관척의 집에 울려 퍼졌다. 사방에 불이 켜지며 양관척의 집에 있던 식솔들이 밖으로 나왔지만 출파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저들을 사로잡아라.”
“예!”
대답과 함께 뛰쳐나간 제 삼 부대에게 나와 있던 인물들은 모두 사로잡혔다. 반항을 하던 남자들은 주저 없는 흑무기마대의 창에 찔려 유명을 달리했다.
출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나오지 않겠다는 말이냐?”
역시나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출파는 제 삼 부대장을 바라보았다.
“네놈 말대로라면 나올 텐데?”
제 삼부대장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출파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출파의 시선이 청운마왕을 향했다. 청운마왕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뭘 그렇게 보지? 아무것도 못들은 사람처럼?”
청운마왕의 말에 출파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대와 이대가 들어와 이들을 지켜라. 삼대는 나를 따라라!”
“예!”
출파의 외침에 부서진 대문 사이로 이백기의 기마가 뛰어 들어왔다. 출파의 시선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감히 내 앞에서 도망을 가겠다고?”
출파를 태운 기마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동안의 여행으로 지칠대로 지친 유세운은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헉헉.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떤 자식이야!”
유세운의 투덜거림에 앞장서던 동무벽이 투덜거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문주가 예전 같아야 간신히 해볼만한 놈인 것 같소.”
“뭐?”
가장 뒤에서 달리는 관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심검에 든 자 같더군요.”
유세운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놈이 불쑥 악양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도 부인의 손을 잡고 달리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현 강호에 그 경지에 든 자가 몇이나 된다고 우리를 습격한단 말인가?”
양관척의 물음에 동무벽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모르지 그건. 문주가 워낙 사고를 치고 다녔어야지.”
동무벽의 말에 쫓아가던 유세운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동호법! 다 낫고 한번 보자고!”
동무벽은 어깨를 살짝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동무벽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얼마나 남았냐?”
“얼마 남지 않았어.”
대답하는 양관척을 돌아본 동무벽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젠장이군!”
콰앙!
가까운 곳에서 굉음이 터지며 말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무벽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들킨 모양이야! 최대한 달려!”
동무벽은 유세운을 단숨에 안아들고 땅을 박찼다.
출파는 내당으로 들어서는 문을 부수고 들어서고는 소리쳤다.
“쫓아라!”
황급히 신법을 펼쳐 달려가는 자들이 보였다. 제 삼 부대장이 단숨에 말을 몰고 달려 나갔다.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청운마왕이 피식 거렸다.
“저자만 보냈다 후회하지 않겠나?”
“무슨 말이냐?”
청운마왕은 다시 곰방대를 물며 답했다.
“광오문에는 문주만 있는게 아니거든.”
“뭐?”
콰앙!
커다란 굉음에 출파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리고 하염없이 날아가는 제 삼 부대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청운마왕은 작게 킥킥 거렸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광오문도 하나하나 모두 잘나가는 놈들이라니까…”
출파는 청운마왕을 한번 쏘아보고는 자신의 애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어떤 놈이든 내 손에 잡히면 죽는다!”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출파의 장창이 도망가는 가장 후미에 있는 자를 향했다. 은은한 달빛에 비춰지기에도 빼어난 외모의 사내가 부채를 드는 것이 보였다.
관백은 사당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안심했지만 뒤쫓아 오는 흑색기마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흑무기마대?”
관백은 주저 없이 부채를 휘둘렀다. 왠지 달려오던 자의 얼굴이 낯익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콰앙!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별 반항 없이 되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관백은 피식 거렸다. 유세운에게 걸려 쫓겨났던 자였다. 아직 내상이 다 낳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 몸으로 자신들을 쫓아 왔다는게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놈이든 내 손에 잡히면 죽는다!”
히히힝.
말의 옆구리를 거세게 걷어차며 달려오는 자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들이 이렇게 몸을 피하게 만든 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거구의 사내의 장창에 모인 강기를 보며 관백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힐끔 돌아본 일행은 간신히 사당 입구에 도달했다. 무엇이든 뚫어버리겠다는 듯이 달려오는 장창의 기세에 관백이 먼저 부채를 휘둘렀다.
부앙.
뻗어가는 선강을 향해 거한의 장창이 꽂혔다.
콰앙!
세찬 경력의 힘을 빌려 관백의 신형도 일행의 곁에 내려섰다. 내려서는 관백을 향해 유세운이 물었다.
“괜찮아?”
“애초에 피할 생각이어서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품에서 내려서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거한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어 내린 수염과 흑색의 갑주.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육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다. 지금 저자와 부딪치면 필사(必死)였다.
“너 이름이 뭐냐?”
유세운은 힘겹게 서서 물었다. 거한의 두 눈이 있는 곳에서 화광이 치솟았다.
“흑무기마대장 출파다! 유세운이라는 자가 누구냐?”
유세운은 출파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훗. 운도 좋았군.”
“뭔 소리냐?”
유세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친 호랑이는 여우에게도 당하는 법이지.”
유세운의 말에 출파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건방진 놈!”
출파의 장창이 유세운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깟 말장난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말아라.”
출파의 장창이 겨누어지자 견디기 힘든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유세운의 앞을 동무벽의 등이 가렸다.
“문주. 안으로 피하시오.”
“뭐?”
동무벽은 두 눈으로 출파를 쏘아보면서 작게 말했다.
“저 자는 내가 막겠소.”
“웃기지마.”
작게 으르렁대는 유세운을 향해 동무벽은 결국 살며시 돌아보았다. 동무벽은 자신의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씰룩거렸다.
“나중에 봅시다.”
동무벽의 손이 빠르게 유세운의 수혈을 짚었다. 유세운은 감기는 두 눈을 애써 부릅뜨며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고 했다. 유세운을 받아든 곽부절을 향해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치시키게.”
“알겠습니다.”
곽부설의 두 눈에 결의의 빛이 다져졌다. 돌아선 동무벽의 시선에는 출파와 그의 옆에서 곰방대를 문 자. 그리고 그의 뒤를 매우고 있는 흑무기마대원들이 보였다.
“모두 피해라. 내가 막는다.”
육우령이 자신의 청룡도를 비켜들고 그의 옆에 서려고 했다. 하지만 관백이 먼저 동무벽의 옆에 서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자린 내 자리야. 자네와 한번 겨뤄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육우령은 자신의 미염이 흩날리는 것도 생각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동무벽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우리 둘이 없으면 문주를 지킬 자는 자네뿐이야.”
육우령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무벽은 양관척을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마. 형산에서 보자.)
양관척은 동무벽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내음이 났지만 애써 소리 내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안의 비밀 통로는 자신 밖에 모르니 가장 먼저 뒤돌아섰다.
“반드시…반드시 살아라.”
양관척은 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출파의 명령이 들려왔다.
“쳐라!”
대답조차 않고 장창을 앞세운 채 달려드는 자들을 보며 관백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관백의 따뜻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기세의 선강이 줄기줄기 뻗어왔다.
콰쾅!
기마를 탄 채로 뒤로 밀려나는 자들을 보며 관백은 도병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번뿐이야! 문주를 부탁하네!)
도병우의 흠칫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언제부터 알았나?)
(조금 된 것 같군. 가장 확실한 건 북천방을 막을 때였지만 말야.)
도병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관백의 등을 바라보았다. 육우령을 제외한 인원들이 양관척이 연 비밀 통로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관백은 부채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네 예전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나도 자네가 좋아해주길 바라진 않네. 미리 자네를 막지 않았던게 후회되니까.)
도병우는 마지막으로 관백과 동무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뒤돌아섰다.
(문주의 목에 내목을 바치지.)
(부탁하네.)
관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곰방대에 무언가를 갈아 집어넣던 도병우를 보았을 때 어렴풋이 느꼈었다.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때늦은 후회다. 북천방을 막기도 힘겨웠던 때였다. 말하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것이 오늘과 같은 결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의 확답을 들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출파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망가려고? 크흐흐. 가봐라. 이곳에 있는 모든 식솔을 죽이고 불태워 버릴 테니.”
출파의 말에도 동무벽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끄럽군.”
동무벽의 말에 출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건방진 놈이로군. 이름이 뭐냐?”
“동무벽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