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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산더미처럼 쌓인 장부들을 정리하던 현은 붓을 멈췄다. 고개를 드는 얼굴에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어떻게 알고 왔나?”
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죽립인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힘들게 찾았습니다.”
현의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현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죽립인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도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그가 나를?”
현은 장부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웃기지 마. 내가 그곳을 떠난 것은 다 그가 원한 일이었다.”
현의 말에도 죽립인은 묵묵히 서 있었다.
“이제와 나를 찾는 건 무슨 뜻이냐?”
죽립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도주님이 검마도의 저주를 푸셨습니다.”
“뭐?”
현의 상처로 얼룩진 얼굴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검마도의 저주를 풀었다 함은 오랜 숙원이 풀렸다는 말. 현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래서 나를 찾는 것인가?”
죽립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잠시 장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물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 가봐야 겠지.”
현은 대청을 나가며 죽립인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현은 걸음을 옮겨 양관척을 찾아갔다. 늦은 밤까지 잠도 안자며 일에 매달려 있는 그는 항상 이시간이면 서재에서 장부를 검토하고 있었다.
서재 앞에 도착한 현은 작은 인기척을 냈다.
“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들어오게.”
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양관척은 초췌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말을 건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 늦은 시간에 잠도 안자고 있었나?”
양관척의 말에 현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양대인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현의 말에 양관척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리와 앉게.”
양관척은 앉기를 권하며 서재에 장부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현은 물끄러미 양관척의 하는 행동을 바라보다 그의 손에 술병이 들려나오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숨겨놓고 드시는 겁니까?”
“하하하. 일이 많아서 어디 맘 놓고 술이나 먹을 틈이 있어야 말이지.”
양관척은 현의 앞에 앉으며 술병을 건넸다.
“대신에 술잔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네.”
현은 웃음 지으며 양관척이 건넨 술병을 받아 들여 마셨다. 입안을 감싸고도는 도화(桃花)향에 현은 웃음을 지으며 술병을 양관척에게 다시 건넸다.
“좋군요.”
양관척도 술병을 입에대고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양대인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해보게.”
양관척은 술병을 탁자위에 내려놓고 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현기가 가득한 그의 두 눈은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현은 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의 말에 담긴 뜻. 예전에 유세운이 말했던 적이 있었다. 양관척은 씁쓸히 웃음을 지었다.
“역시 문주님의 예상대로 되는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문주님이 자네는 광오문에 있을 수 없을 거라고 하셨네. 역시 자네는 떠나야 할 사람이었군.”
현은 유세운의 말과 그의 모습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밥값은 하고 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닐세. 자네 덕에 계획이 한 이년은 앞당겨졌으니 그런 걱정일랑 하지도 말게.”
양관척의 말에 현은 작은 미소로 답했다. 양관척은 술병을 건네며 물었다.
“언제 갈 생각인가?”
현은 양관척의 술병을 받아 들며 답했다.
“지금 바로 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잡지는 않겠네.”
양관척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현은 양관척의 손을 바라보다 일어나 굳게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다음에 다시 보게 되길 바라겠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양관척은 웃음을 터트리며 현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 술병은 이별 선물로 가져가게. 자네도 없으니 이제 내가 술이나 마시면서 여유부릴 시간은 완전히 없어졌으니 말일세.”
“하하하. 알겠습니다.”
현은 포권을 취해보이고는 양관척의 서재를 나왔다. 밖으로 나온 현의 앞에는 곽부설이 조용히 서 있었다.
“떠나는가?”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곽부설은 냉막한 표정에 한줄기 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닐세. 아마도 오늘 찾아온 자 때문인 듯 하군.”
곽부설의 말에 현은 가볍게 놀랐다. 죽립인의 기척을 알아채다니. 이미 심검에 든 그의 기척을 알아챘다는 것만으로도 곽부설이 왜 그렇게 유명한 살수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조심하게.”
현은 곽부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권을 취했다.
“그럼 다음에 뵙는 날까지 건강하십시요.”
“그럼 다음에 보세.”
곽부설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현은 자신의 경지로 곽부설의 움직임을 잡을 수 없다는 것에 가벼운 놀람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립인을 향해서.
아직도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야영지. 굵은 화톳불도 거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유청운은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보름이 되어가는 군.”
“그렇게 걱정이 되시나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유청운은 놀라며 돌아보았다. 백색의 옷을 입고 있는 조예림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누가 뭐라 해도 청의문의 문주인 그녀가 이런 밤에 돌아다닌 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예림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공자님도 아직 주무시지 않았잖아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이제는 청의문의 문주가 된 그녀다. 쉽게 대할 수는 없었다. 대답하는 유청운의 말에 조예림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는 말도 쉽게 나눌 수 없는 처지가 되었군요.”
조예림의 말에 유청운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밤에 화톳불에 붉게 비춰지는 유청운의 얼굴을 보며 조예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유공자님은 유문주님이 걱정되시나 봐요?”
“그야 동생이니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요.”
유청운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같이 가주었어야 했지만 유세운의 부탁에 가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됐다. 유세운이 가고 삼 일 만에 도착한 창천궁주에게 말을 건네 유세운이 부탁한 일은 전서구를 타고 창천궁으로 향했다.
부탁마저 들어주고 나자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이 없어졌다.
“그때 억지를 부려서라도 따라 갔어야 하는 건데…”
조예림은 자신을 한탄하는 유청운을 보며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전 다행스러운데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되묻는 유청운을 향해 조예림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남아 있으시게 되서요.”
유청운이 궁금해 하며 물으려는 찰나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이 야심한 시간에 이런 곳에서 남녀가 뭐하고 있는 건가요?”
고개를 돌리던 유청운은 당황했다. 용이 그려져 있는 갈색의 무복에 등에 양쪽으로 교차되게 매어져 있는 단창.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여인은 승천단창 헌원옥이었다.
“헌원소저께서는 어인일로…”
유청운의 당황한 목소리에 헌원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예림과 그를 돌아보았다.
“글쎄요.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뜬금없는 헌원옥의 말에 유청운은 어이없어했고 하늘을 바라보던 조예림의 얼굴은 붉어졌다.
헌원옥은 조예림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이제 조문주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조예림은 헌원옥이 특별히 강조하는 문주라는 말에 아미를 찌푸렸다. 일문의 문주라는 자신의 위치를 보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청의문의 문주란 자리에 있는 자신이 함부로 남자를 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아는 헌원옥의 웃음기 섞인 말에 조예림은 괜히 심술이 났다.
“글쎄요. 아버님의 유언을 들어 드려야겠지요.”
조예림의 말에 헌원옥과 유청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헌원옥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물어오는 헌원옥을 향해 조예림은 미소로 답했다.
“청의문의 앞날보다 저의 앞날을 먼저 생각하란 말씀 이셨어요.”
조예림의 말에 유청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뜻일까?라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헌원옥은 금세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도 천룡문의 후계자이지 천룡문의 문주는 아니었다. 유청운에게 호감이상의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예림의 말투를 들어보니 괜히 더 욕심이 났다.
한차례 멋진 비무였던 그때가 더욱 그리워졌다. 헌원옥은 유청운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유공자님.”
“예?”
헌원옥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피곤하지 않으시면 저랑 비무라도 해주시겠어요? 이번에 더욱 실전 경험을 쌓으셨으니 실력이 일취월장 하셨을 것 같아서요.”
헌원옥의 말에 유청운은 밝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하지만 아직 헌원소저를 상대해드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헌원옥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세요. 유공자님은 이미 삼룡 삼봉에 비견되는 신진고수 시잖아요.”
헌원옥의 말에 유청운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조예림은 헌원옥을 새침하게 한번 쏘아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제가 저번처럼 공증인이 되드릴께요.”
“그래주시겠습니까?”
웃으며 부탁하는 유청운을 보며 헌원옥은 조예림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너무 노골적인거 아냐?)
(헌원언니가 더 심하신 것 같으신 데요?)
헌원옥은 조예림을 한번 쏘아보고는 등에 매고 있던 단창을 뽑아 들었다.
“전력을 다할 거예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청운의 검도 천천히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