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그게 정말이냐?”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황혜란의 물음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창천궁의 전 병력이 청의문을 향해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 청의문을 향했지?”
“그것까지는…”
황혜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텅텅 빈곳을 노리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육대세력에 관련된 일이니 만큼 자기 뜻 대로만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확실히 남아 있는 인물들이 유가장의 인물들과 백연혜 그리고 창검백영대 뿐이란 말이지.”
“일반적인 무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신경 쓰실 것 없을 듯 합니다.”
“호호호. 알았어.”
황혜란은 일어나 다급히 방을 벗어났다. 복수를 위한 첫 걸음이란 생각에 절로 흥이 났다.
혈왕각을 향한 황혜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혈천문주 혈령마왕 황정회는 긴 머리를 중년미부가 빗기게 놔둔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요란하게 들어오는 황혜란을 바라보는 황정회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황혜란은 달려와 황정회의 품에 안겼다. 황정회는 황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냐?”
다시 한번 묻는 황정회의 물음에 황혜란은 애교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라…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보니 어려운 부탁인가 보구나.”
“아뇨. 아버지라면 충분히 들어 주실 수 있어요.”
황정회는 황혜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황혜란은 황정회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말을 이었다.
“제게 혈마단과 혈극살대를 내주세요.”
황혜란의 말에 황정회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의 병력이라면 구파일방 중 한개 방파 정도는 우습게 무너뜨릴 병력이었다.
“그들은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
황혜란은 황정회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창천궁을 치려고요.”
황혜란의 말에 황정회와 그의 머리를 빗어주던 중년미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정회는 전신에서 사기를 뿜어냈다.
“혈영.”
“부르셨습니까.”
즉각적으로 들려오는 대답에 황정회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허튼 소리를 한게 네놈이냐?”
“죄송합니다.”
일체의 감정이 없는 혈영의 목소리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지금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정회는 황혜란을 품에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황정회의 손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보고 황혜란이 다급히 팔에 매달렸다.
“아버지.”
황정회는 잠시 황혜란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창천궁을 쳐서 무엇하려고 하느냐?”
황정회의 물음에 황혜란은 자신의 팔목을 내보였다. 아직도 남아있는 흉터를 보이며 황혜란은 표독스럽게 말했다.
“저를 이렇게 만든 자의 가족과 연인이 그곳에 남아 있어요.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육대세력의 판도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황정회는 씁쓸히 웃었다. 심검에 이른 유세운을 공격하러갔다가 입은 상처는 황혜란의 자존심에 치유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남겼다. 황정회는 말없이 황혜란을 보았다. 삼봉에 들던 딸이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은 창천궁이라 해도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황정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되겠다.”
“아버지…”
황정회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혈천문의 전 병력을 이용해서 창천궁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야 겠다. 내가 직접 가마.”
“아버지!”
황정회의 말에 황혜란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황정회는 피식 웃었다.
“전 혈천문도를 모아라. 내일 바로 출발하겠다.”
“존명!”
멀어지는 혈영의 기척을 느끼며 황정회는 웃음을 지었다.
호북성 의창의 강가에 세워진 객점인 하상루(河上樓). 장강으로 나가는 선착장의 바로 옆에 있어 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장강의 물결을 바로 바라볼 수 있어 붙어진 이름이었다. 객점의 이층에 식사를 시킨 유세운은 초췌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도군사는 어디 갔어?”
유세운의 물음에 관백이 대답했다.
“이 근처에서 무림의 정세를 알아보러 간다고 잠시 나갔습니다.”
“그래?”
유세운은 내력이 운기가 안 되자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음에도 피로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보이는 장강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장강을 보니 또 연혜 생각나는군.”
“문주님!”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는 도병우를 보며 유세운은 뺨을 긁적였다.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도병우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수라성의 전 병력이 청의문을 향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수라성이?”
유세운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같은 육대세력인데 왜 함부로 움직이는 거지?”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휴. 그거야 지금 북천방을 막기 위해 중원의 전 병력이 집결된 빈틈을 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연합해서 공격하면 수라성이라도 무너질 꺼 아냐. 그러니 왜 그런 짓을 했냐는 거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의 벽에 등을 기댔다. 도병우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다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철마성이 멸문 당했습니다.”
“뭐?”
“지금 무슨 소리야!”
도병우의 이번 말에는 좌중의 모든 시선이 향해졌다. 유세운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철마성은 봉문 했잖아.”
무림의 관례상 봉문을 하고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원한을 가졌다 해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런 철마성이 멸문을 당했다는 말에 어이없어 하는 유세운을 향해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당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웃기지마! 그곳에는 나랑 붙었던 그 노인네도 있잖아!”
철마풍 독고청이라면 자신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던 고수였다. 그런 그가 있는 곳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병우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유세운은 관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악양까지 얼마나 걸리지?”
관백은 장강을 바라보며 답했다.
“배를 이용하면 오일이면 도착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되겠어.”
유세운의 말에 광오문의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성의 발호도 철마성의 멸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두두두두.
먼지를 휘날리며 달리는 일천의 기마.
흑색 갑주에 흑마들을 타고 달리는 그들의 질풍 같은 기세는 앞을 가로막는 무엇이라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선두에서 달리던 출파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제법이군. 군부와도 선이 닿아 있나?”
출파의 옆에서 편한 자세로 말을 모는 청운마왕은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이며 답했다.
“별 것 아니지. 이정도 일이야.”
흑무기마대가 중원을 함부로 넘지 않았던 것은 황군과의 일전이 벌어진다면 극심한 소모전이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미리 손을 써 놓았는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없었다.
출파는 다시 한번 청운마왕을 바라보았다.
자신 못지않은 실력. 그가 제시한 길로만 달리면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앞을 가로막는 황군은 보지도 못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성을 피해 야숙을 하면서 달리는 것도 큰 이유긴 하겠지만 황군의 간섭 없이 중원으로 들어선 것은 일종의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저번에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출파의 물음에 청운마왕은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중원 상권의 삼분지 일은 저번처럼 자네들이 가지라고.”
출파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청운마왕은 입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유세운의 목을 따는 대로 초원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잊지 말라고.”
“우리도 중원보다는 초원이 좋다.”
간단히 대답한 출파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장창을 더욱 움켜쥐었다. 말로 전해들은 유세운의 무위는 자신과 버금가는 실력이다. 심검에 든 고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기다려라. 크흐흐.”
청수혼원장 엽패는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했다.
“수라성의 전 병력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엽패의 보고를 듣는 노인은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백발은 곱게 뒤로 넘겼고 주름진 피부에는 세상의 풍파를 견뎌낸 노인만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수라마교라고 칭하는게 옳겠지.”
엽패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예.”
“지금 청의문에 남아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나?”
엽패는 한숨을 내쉬었다.
“북천방을 막기 위해 청의문의 전력 중 절반이 넘게 나갔습니다. 남아있는 병력으로는 수라마교의 총 공세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엽패의 말에 노인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수라마교가 부활했다는 것은 다른 육대세력의 멸문을 뜻하니 말일세.”
엽패는 말없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청의문의 태상문주인 청혈협(淸血俠) 조영.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선 조영에게 이런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심검의 경지에 들어선 조영조차도 수라마교의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육대세력에서는 어떤 반응인가?”
엽패는 조영의 물음에 조금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창천궁과 천룡문의 태상궁주님과 태상문주님이 정예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신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조영은 물끄러미 엽패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늙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예?”
조영은 엽패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자네는 지금 이대로 북천방을 막으러 갔던 청의문도 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영은 자신의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늙은이들이 죽을 생각을 한거야. 그러니 자네는 가서 청의문의 힘이 되어주게.”
“저도 남겠습니다.”
엽패의 말에 조영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수라마교를 막아낼 수 없을 거야. 자네는 이곳보다 그곳에 더욱 힘이 되 줄 걸세.”
“하지만…”
“그만하게. 자네는 그들을 도와주게나.”
“태상문주님…”
조영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전하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일세.”
조영의 한마디 한마디가 유언처럼 들려 엽패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조영은 그런 엽패의 어깨를 말없이 두들겨 주고는 몸을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엽패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뵙기를…”
말을 잇지 못하는 엽패는 그 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조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될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