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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 시선이 닿는 곳 모두가 푸르기만 했다. 초원에 우뚝 솟은 파오들. 파오들의 중앙에 있는 가장 커다란 파오 안에서는 술마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벌컥. 벌컥.
“크으. 좋군.”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양다리를 왼 손에 들고 오른 손에 미유주를 항아리 째 들고 마시던 거한의 사내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크흐흐흐. 뭐하는 놈이냐?”
거한의 사내 앞에는 흑의에 한손에 곰방대를 든 사내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네가 흑무기마대장인가?”
“뭐?”
거한의 사내는 곰방대를 든 사내의 말에 되묻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거 오래 살다 보니 별 말을 다 듣는군.”
거한의 사내는 미유주 항아리를 바닥에 놓고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파오의 구석에 놓여있던 장창이 날아와 잡혔다.
“제법이군.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부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파오 안에 놓여있던 미유주 항아리와 바닥에 놓인 가죽이 휘날렸다.
쩡.
바람을 가르며 뻗어가던 장창은 파오 안에 들어온 사내의 곰방대에 막혔다. 부러질 듯 휘어졌지만 사내의 곰방대는 끝내 장창을 막아냈다.
“크흐흐. 이거 재밌군.”
거한의 사내는 장창을 거두어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한의 사내가 장창으로 곰방대의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이름은 출파. 이름을 밝혀라.”
“싫어.”
간단하게 대답하는 곰방대를 든 사내의 대답에 출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이름을 밝히면 죽이려고 들게 뻔한데 그럴 필요야 없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살 거라고 생각하는가?”
곰방대를 다시 입에 물며 사내는 웃음을 지었다.
“난 얘기를 하러 온 거지. 죽자고 싸우려고 온건 아니니까.”
출파는 장창을 움켜쥐고 크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 얘기를 듣는 상대가 나라면 좀 놀아줘야 겠군.”
쩡.
곰방대로 장창의 끝을 쳐낸 사내는 피식 거렸다.
“이거 날 너무 쉽게 보는거 아냐?”
휘어졌던 장창은 뱀이 먹이를 노리듯 휘어져 곰방대를 든 사내의 목을 노렸다. 곰방대를 든 사내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장창을 피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출파는 멈춰 서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 이름이 뭐냐?”
출파의 물음에 사내는 곰방대를 입에 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수라마교 비천십팔마왕 서열 삼위인 청운마왕이라고 한다.”
청운마왕의 소개에 출파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었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수백 초를 겨루어야 될 상대가 고작 삼위라는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작 삼위라고?”
출파의 물음에 청운마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건 십팔마왕 만 모아놨을 때의 이야기지. 교주님과 태상호법님 까지 하면 어디 이름이나 말할 수 있겠는가?”
“너보다 강한 자도 있단 말인가?”
“수두룩 하지.”
청운마왕의 말에 출파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네놈을 죽여도 수라마교에는 큰 피해는 없겠군.”
자세를 낮추는 출파를 보며 청운마왕은 웃음을 지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소식을 들려주러 온 거야. 싸우러 온 게 아니고.”
“재미있는 소식?”
출파의 물음에 청운마왕은 연기를 내뿜으며 답했다.
“흑무기마대를 중원에서 내쫓은 자가 갈 곳.”
청운마왕의 말에 출파의 두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눈으로 가득 덮인 설경에 전신에서 마기를 물씬 풍기는 마인들이 모였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마기를 내뿜는 마인들을 바라보던 혈미, 혈발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다.”
작지만 그곳에 모인 어떤 마인도 그 목소리를 못 듣는 이 없었다. 혈발의 사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년을 넘어 이어오는 수라의 뜻을 펼칠 때다.”
혈발의 사내는 손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행마제.”
사내 앞에 다섯의 노인이 나섰다. 오행을 나타내는 색의 옷을 입은 노인들의 전신은 마기 한점 없이 고요했다. 사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수라천마대(修羅千魔隊)와 적청쌍마단(赤靑雙魔團)을 이끌고 청의문을 친다.”
“존명!”
오행마제의 대답을 들은 사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혈발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태상호법께서는 이번 일의 총 책임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존명!”
사내는 고개를 숙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사내의 시선은 설원에 모인 마인들을 향했다.
“청의문을 시작으로 강호의 오대세력은 수라의 뜻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사내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비천십팔마왕.”
“예!”
사내의 앞으로 열여섯 명의 사내들이 무릎을 꿇었다. 초원으로 나간 청운마왕과 영호천의 손에 죽은 비천마왕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였다.
사내는 심검에 달한 열여섯 명의 마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수라마교의 온 힘을 다한 일전이다.”
“예.”
사내는 비천십육마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비천십팔마단 모두를 데리고 나와 같이 움직인다.”
“존명!”
사내는 고개를 돌려 수라성을 바라보았다.
“오늘부로 수라성은 포기한다.”
사내의 말에 모든 시선이 집중 되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사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있는 곳이 수라마교다. 그리고 우리의 수라성은 중원에 다시 짓도록 한다.”
사내의 말에 모든 마인들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가라! 지금부터 강호의 역사는 우리의 손으로 다시 쓰여 진다!”
백운산의 길목을 막고 서 있는 거대한 대문. 얼마 전에 부서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수리 되어있었다.
죽립인 한명을 데리고 백운산을 오르는 옥빛 머리의 중년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곳이냐?”
“예.”
중년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은 곳에 자리 잡았구나.”
중년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거대한 대문을 막아서는 열명의 사내들. 일견하기에도 수련이 얕지 않은 듯 잘 벼려진 듯한 기세를 내뿜는 사내들의 말에 중년인은 잠시 멈춰 섰다.
“철마성은 봉문했다! 어떠한 방문객도 받지 않는다!”
사내의 말에 중년인은 자신의 옥빛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그런가?”
“어서 돌아가라!”
말없이 한걸음 내딛는 죽립인을 중년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
“봉문으로 될 말인가?”
“무슨 소리냐?”
열명의 사내들의 전신에서 살기가 물씬 풍겼다. 중년인의 말의 억양이 철마성의 봉문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중년인은 자신의 옥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강호의 역사에서 사라져야지. 고작 봉문으로 살아남아보겠다는 것이 우습군.”
“이런 미친!”
열명의 사내들이 대번에 달려들며 검을 뽑는 모습을 보던 중년인의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쓸쓸하진 않을 것이다.”
번쩍.
한순간 중년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옥빛의 광채는 열명의 사내를 집어 삼켰고 비명 소리도 없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중년인은 태연하게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유세운이라는 아이. 제법 요란하게 들어섰다고 하더군.”
“철마성의 대문을 일격에 부수고 들어갔답니다.”
중년인의 시선은 길이만 삼장에 달하는 철마성의 편액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저것도 필요 없겠지.”
중년인의 전신에서 옥빛의 섬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죽립인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며 중년인의 전신을 두르고 있는 옥빛의 륜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경지의 무위가 다시 한번 펼쳐졌다. 철마성의 대문을 비롯한 편액이 걸려있던 곳까지 대번에 사라져 버렸다.
중년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철마성.”
중년인의 뒤를 따라 걷는 죽립인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검마도의 오랜 숙원이 반드시 풀릴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미소였다.
백건호는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자를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냐?”
“예.”
부복해 있던 자는 두 손을 들어 붉은 색의 종이를 내밀었다. 백건호는 붉은 색의 종이를 받아 바라보았다.
출(出).
다급히 새겼는지 단 한 글자만이 새겨진 붉은 종이를 바라보던 백건호는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화르륵.
금세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는 붉은 종이를 바라보던 백건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궁내에 남아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지금 궁내에 남아 있는 병력으로는 창검백영대와 창영쌍연대중 홍연대 오백이 남아 있습니다.”
백건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북천방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병력을 뽑느라 궁주와 문상 무상을 비롯한 거의 전 병력이 궁내에 자리를 비워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긴급을 알리는 밀지가 도착했다. 육대세력이 서로에게 간세를 심어 놓은 것은 오랜 역사동안 서로 묵인 되어 오던 일이다.
붉은 밀지라면 수라성에 잠입한 첩자의 것. 수라성에서 출이라 함은 수라마교의 부활이라 봐도 무관했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어느 쪽이냐?”
“청의문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백건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의문도 지금은 거의 모든 병력이 북천방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냥 수라성의 힘이라도 막기 힘들 터. 하지만 수라마교가 움직인 것이라면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무리였다.
백건호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그려졌다.
“창검백영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은 청의문으로 향한다.”
“예.”
백건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네는 지금 상황을 북천방을 막으러간 궁주에게 전하도록 하게.”
“예.”
백건호는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어루만졌다. 수라마교의 발호라면 심검을 넘어선 자가 분명히 있을 터. 이번 일은 길보다 흉이 많을 것만 같았다. 백건호는 부복하고 있는 사내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든 청의문으로 오지 말라고 하게.”
“예?”
되묻는 사내를 향해 백건호는 웃음을 지었다.
“설혹 내가 죽는다해도 복수를 위해 달려오지 말란 말이네. 지금 북천방을 막기 위해 모인 병력. 중원의 모든 저력이라고 봐도 무관하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란 말을 전하게.”
“하지만…”
“그들이 무너지면 중원은 더 이상 수라마교의 힘을 받아낼 자들이 없네.”
백건호는 씁쓸히 웃었다.
“만약의 경우에 지하로 숨는 한이 있더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백건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 사내는 작게 떨려오는 목소리를 숨기며 간신히 대답을 했다.
백건호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손녀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야겠군.”
걸음을 옮기는 백건호의 뒷모습을 보던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의 중대함이 두 어깨를 짓눌렀다. 한시라도 빨리 말을 전해야만 했다. 사내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