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67화 (167/194)

(167)

주화입마

어둠 속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유세운의 의식이 점점 돌아왔다. 낯익은 목소리들이라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컥!”

너무나 짧게 들이마시는 호흡. 무리하게 들이마시려다 격한 기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돼요!”

여인의 목소리에 유세운은 억지로 눈을 떴다. 자연지기만 안들이 마셔지는 게 아니라 전신에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눈을 뜬 유세운의 시선에 백의를 입은 여인이 보였다.

“조소저?”

유세운은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히 북천방주와를 쓰러트리고 관백이 달려오던 것 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데 대뜸 보이는 얼굴이 조예림이라는 것에 어이없어했다.

조예림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문주님은 삼 일 째 의식을 잃으셨었어요.”

유세운은 조예림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천막 안에는 관백과 유청운, 동철의 모습이 보였다.

유청운이 다가와 손을 잡으며 물었다.

“괜찮으냐?”

동철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세운에게 다가왔다. 유청운이 나서서 더욱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을 뿐 걱정하는 마음은 하나같았다. 유청운의 물음에 유세운은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나 괜찮은거요?”

유세운의 물음에 조예림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피식 거렸다.

“그거야 일어나보니 알겠는데. 지금 내가 한줌 진기도 안모여서 물어본 거요.”

유세운의 말에 좌중은 모두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조예림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대답을 했다.

“유문주님은 지금…”

“깨어나셨소?”

천막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들어서는 동무벽과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육우령을 보고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소리 치지마. 귀가 울려.”

“크하하하. 일어났으니 됐소. 내 문주가 그놈 쓰러트릴줄 알고 있었소.”

동무벽의 웃음에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일간이나 의식을 잃었다가 일어났는데 대뜸 찾아와서 소리부터 치는 호법이라니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유아우. 괜찮은가?”

다시 천막의 문이 열리며 죽립을 눌러쓴 영호천과 도병우가 들어섰다. 유세운은 양손을 들어올리며 웃음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사람들이 다와야 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영호천의 물음에 유세운은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조예림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모두가 들어도 상관없나요?)

유세운은 대답을 하려다 내력이 없어졌음을 알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타개할 방법이 더욱 궁금했다.

조예림은 유세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유공자의 몸은 기경팔맥이 가닥가닥 끊어진 상황입니다. 단전의 내력은 완전히 고갈 되었지요. 살아 남은게 기적이라고 보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조예림의 말에 동무벽이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의원이라면 좀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요!”

소리를 지르는 동무벽을 관백이 막아섰다.

“그만하게.”

“아니 지금 그만하게 생겼어? 문주가 그 고생을 하며 북천방주를 죽였는데 살아있는게 신기해 보인다니 그게 말이 돼?”

조예림은 동무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그럴 뜻은 아니었습니다.”

“흥!”

고개를 돌려버린 동무벽을 바라보던 조예림은 다시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제가 손은 써보았습니다만 미천한 실력으로 간신히 상황이 악화되는 것만 막았습니다.”

“상황이 악화되는 것?”

유세운의 물음에 조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유문주님의 상황은 일반 범인보다도 못한 지경입니다. 기경팔맥이 끊어진 상황에서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지를 못 움직이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왜 그러느냐?”

유세운의 손을 잡은 채 유청운이 물었다. 유세운은 유청운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형님한테 말한 대로 이제는 형님이 저 좀 먹여 살리셔야 되겠습니다.”

유세운의 농담에 유청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호천은 조예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유아우가 사지가 못쓰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말은 아니겠죠?”

영호천의 물음에 조예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저는 무리지만 제 사부님이신 만수화의님이시라면 가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조예림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몰렸다. 조예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부님은 어느 날 훌쩍 기이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치료하러 가신다고 떠나 버리셔서 지금 어디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조예림의 말에 좌중의 얼굴이 모두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유세운은 가만히 만수화의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만수화의…만수화의.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가 자신의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야 천하제일의원(天下第一醫員)이니 당연히 들어봤을 거 아닙니까!”

유세운은 도병우를 바라보다가 동무벽을 향해 말했다.

“도군사가 맞고 싶은 가본데 대신 손 좀 써줘.”

“크크크. 그 말을 기다려왔습니다.”

덥썩 도병우의 멱살을 움켜쥐는 동무벽이었다. 도병우는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이거 왜 이러나?”

“문주가 너 좀 손봐주라고 하시니 각오해라.”

주먹을 들어올리는 동무벽은 관백의 손뼉 치는 소리에 멈춰 섰다.

“예전에 곽문도의 동생을 치료하는 분이 만수화의님이라고 했었습니다.”

관백의 외침에 유세운도 손뼉을 마주쳤다.

“맞아! 어쩐지 들어봤다 싶었어. 그럼 곽문도만 찾아보면 되겠군.”

웃음을 터트리는 유세운을 보며 조예림이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부님이라 해도 기한은 최대 한달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관백의 물음에 조예림은 아미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지금 유문주님에게 제가 손을 써놓은 방법으로는 길어야 한달입니다.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사부님으로서도 속수무책이실 겁니다.”

“한달이라…”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관척이 있는 악양까지 가는 시간만 해도 짧은 시간이 아닐 터. 지체할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말은 타도 상관없소?”

유세운의 물음에 조예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움직이신다면 마차로 밖에 움직이지 못하실 겁니다.”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차라도 하나 준비해 주시겠소?”

유세운의 말에 조예림은 웃음을 지었다.

“마차가 하나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지요.”

“고맙소.”

유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조예림의 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청의가 아니라 백의를 입고 있는 거요?”

조예림은 유세운의 말에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리며 조예림은 작게 대답했다.

“아버님이 이번 전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분명 청의문주님을 당해낼 만한 자는…”

말을 하던 유세운은 흑의복면인이 떠올랐다.

“설마…?”

유세운의 얼굴을 보던 조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산영삼검과 청죽오검과 같이 당하셨다 들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조예림의 눈에는 강한 복수의 의지가 깃들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그놈은 누가?”

영호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조금만 빨랐어도 청의문주님은 구할 수 있었을 것을…”

영호천의 말을 들은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복면인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영호천을 제외하고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자였다.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예림은 애써 웃음지어 보였다.

“지금은 유문주님의 회복이 우선이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가 급하다고 했으니 우리는 이만 전장에서 물러나도 되겠소?”

유세운의 물음에 조예림은 웃음을 지었다.

“이미 북천방의 모든 무인들은 포획 및 사살 되었어요.”

유세운은 조예림의 말에 생각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탁 하나 더 해도 되겠소?”

유세운의 물음에 조예림과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유세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 북천방의 무인들을 전부 북천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었소. 물론 이번 전투에서 잡은 무인들까지야 무리겠지만…”

“아뇨. 저도 모두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조예림은 간단히 대답했다. 조예림은 놀란 표정의 유세운을 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 청의문의 문주는 저입니다. 아버님의 원수도 그들이 아닌 다른 자.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조예림의 말에 유세운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맙소.”

유세운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육우령을 돌아보았다. 육우령도 마음이 놓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세운은 동무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지간하면 부축 좀 해줄래?”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문주가 부축을 해달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소.”

유세운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하기 싫다는 거야?”

“아니오. 하하하.”

유세운은 따라 나오려는 유청운과 영호천을 말렸다.

“형님. 저 대신 창천궁으로 좀 가주세요. 반드시 나아서 돌아가겠다는 말 좀 전해 주십시오.”

유세운의 말에 유청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영호형님은 시간이 조금 나시면 이곳 일들 마무리 될 때까지 있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유세운의 물음에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어차피 나도 이곳에서 더 알아봐야 될 일이 있으니 그렇게 하겠네.”

유세운은 조금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조예림을 바라보았다.

“그럼 조문주님.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예림은 유세운의 말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비록 부지불식간에 청의문의 문주를 맡았다지만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아직 청의문의 인물들도 제대로 인정을 못하는 것을 유세운은 태연히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

조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나으시길 바랍니다.”

유세운은 조예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유세운은 동무벽의 어깨에 기댄 채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천막을 나왔다.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인물들이 보였다.

위지남매와 청의문의 외문주인 하후추의 모습이었다. 유세운은 걸음을 멈춰 섰다. 위지청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괜찮아?”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니 이제 괜찮아 지러 가보려고.”

유세운의 말에 위지남매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유세운의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조예림이 몇 번이나 침을 놓았고 가지고 온 영약도 아끼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밝은 유세운의 모습에 아직 희망이 있어 보였다.

하후추는 다가와 유세운에게 깊이 읍을 했다.

“전 청의문도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유세운은 하후추의 인사에 얼굴을 붉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후추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을 꺼내려던 하후추는 유세운의 뒤를 이어 나오는 조예림을 바라보고 읍을 했다.

“문주님.”

조예림은 하후추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제가 타고 온 마차를 유문주님에게 드리세요.”

“하지만 그건…”

조예림이 타고 온 마차는 사천 당문에 부탁해 특수 제작한 마차였다. 조예림을 위해 조상이 직접 당문에 부탁했던 물건. 그것을 넘겨주기는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조예림의 표정은 단호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합니다. 더욱이 유문주님은 말을 타실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유세운은 앞장서는 하후추를 따라가며 조예림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조예림의 말을 들으며 돌아선 유세운은 동무벽의 어깨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내력을 잃어버리고 나니 더욱 하늘이 높게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