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깨달음
콰쾅.
단 일 초의 교환. 청의문주 조상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열 걸음 만에 멈춰선 조상의 얼굴에는 경악만이 남아 있었다.
“쿨럭!”
선혈을 한사발이나 뱉어냈다. 한번의 공격으로 산영삼검을 고혼으로 만든 자.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건만 결과는 참담했다.
“네… 놈은 누구냐?”
답답한 가슴을 움켜쥔 채 묻는 조상에게 비천마왕은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수라의 뜻을 전하는 십팔마왕 중 비천마왕이라 한다.”
비천마왕의 말에 조상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네…네놈 지금 뭐라고 했냐? 수라의 뜻?”
“그래.”
조상은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렇다면 수라마교가 다시 재림한단 말이냐?”
조상의 물음에 비천마왕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역시 청의문주라 뭔가 말이 통하는군.”
조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육백년을 내려오는 청의문. 문주에게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정사(正邪)를 초월한 여섯 명의 초인들이 이루어낸 화산에서의 대결전. 수라성의 초대 성주이자 수라마교의 십삼 대 교주가 화산을 내려가며 한 말. 수라의 뜻이 이 땅에 재림할 때 천하는 다시 수라마교의 발밑에 있으리란 말이었다.
조상은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절…대 네놈만큼은 살려 둘 수 없겠구나.”
조상의 말에 비천마왕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크흐흐. 걱정마라. 나도 네놈을 살려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쩡.
경력의 힘에 밀려 뒷걸음치던 등악표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직접 육우령과 손을 섞어 본 적은 없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무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꺾었다는 자와의 대결.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건만 초가 거듭될수록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동무벽이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씰룩이며 입을 열었다.
“뭐야?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되는 녀석이 육우령이 어쩌네 했단 말야?”
경탄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분노로 뒤덮였다.
“허튼 소리 지껄이지 마라!”
등악표의 대도가 다시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혈풍낙뢰도(血風落雷刀)의 일초. 붉은 강기가 벼락처럼 동무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동무벽의 왼발이 진각을 내딛었다.
텅.
밑에서부터 올려치는 보도에는 아무런 변식도 없었다. 다만 베고야 말겠다는 동무벽의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쩡.
다시 튕겨져 오르는 대도를 움켜쥔 손에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등악표는 호흡을 고르며 내력을 모았다.
“네놈. 인정해주마.”
등악표의 말에 동무벽은 느긋하게 보도를 휘두르며 답했다.
“난 아직 널 인정 못하겠다. 그리고 시간 없으니 어서 덤벼. 언제까지 시간을 끌 거냐?”
동무벽의 말에 등악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등악표의 대도에 붉은 색의 도환이 어렸다. 동무벽은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해보려나 보군.”
동무벽의 보도에 피어나는 붉은 도환을 보며 등악표의 얼굴이 더욱 진지해졌다.
피독주를 입에 문 궁역의 좌검우도가 그의 분노를 마음껏 표출했다.
“크하하. 어디까지 도망갈 샘이냐?”
궁역의 외침과 함께 뻗어오는 패도적인 도세에 도병우는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곰방대 또한 궁역에게 잘려나갔다. 하후추도 도와주려 했지만 궁역의 좌검에 번번이 막혔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휘두르고 있는지라 연환강편을 펼치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잘못하면 자신도 위험한 상황. 도병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궁역의 우도를 피해내기에 급급했다.
궁역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렇게 해서야 영 끝이 없겠군.”
궁역의 자세가 한껏 낮춰졌다. 양쪽으로 벌린 좌검과 우도. 화살의 시위를 매기듯 긴장되는 순간. 도병우는 잘려나간 곰방대를 들었다.
아마도 피하기조차 어려우리라. 도병우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시간을 내주어서는 궁역에게만 이로운 것. 도병우의 신형이 땅을 박찼다. 옆에서 하후추도 검환을 만들어내 궁역을 향해 달려들었다.
궁역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왜 현무장군인지를 모르나 보군.”
카카캉.
하후추의 검환도 도병우의 강기도 궁역의 신형이 선회하며 일으킨 강막에 모두 퉁겨져 날아갔다.
현무도검세(玄武刀劍勢)의 일초 현무철갑세(玄武鐵甲勢).
사대천왕 중 가장 패도적인 자를 꼽으라면 야율적을 꼽고 가장 냉막한 자를 꼽으라면 막철유를 꼽았다. 가장 섬세한 창술을 펼치는 자가 공손령이었고 가장 막강한 방어초식을 펼치는 자가 바로 현무장군 궁역이었다.
궁역은 현무철갑세의 반탄력에 뒤로 밀려나는 도병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너 같은 자는 북천의 하늘아래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하후추가 다급한 마음에 뛰어들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자신 또한 지금 내력이 끌어올려지지 않는 상태. 하후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병우는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쾌검과 패도의 기세를 보며 피식 거렸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만 죽어라!”
좌검에서 펼치는 쾌검이 지척에 달했고 뒤따라오는 우도의 패도의 경력에 옷이 펄럭였다. 도병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쩌쩡.
눈을 감은 순간 귀에서 들리는 강렬한 충돌음과 뒤따라오는 경력의 여파에 도병우는 뒷걸음을 치며 눈을 떴다.
“무슨…?”
궁역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뭐하는 놈들이냐?”
궁역의 물음에 앳된 목소리가 물었다.
“헉헉. 하나만 묻자. 너 사대천왕 중 하나냐?”
“이렇게 검은 놈도 있었나? 곤륜노보다는 조금 하얗군.”
궁역의 좌검을 막아선 사내와 우도를 막아선 사내의 뒷모습을 보던 도병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삼홍검 서중. 병환검 단량!”
이청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중원의 후속부대인가?”
유세운은 이청형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저런 어쩌지? 그럼 네놈도 끝이겠군.”
이청형은 유세운을 보며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너는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님 생각을 못하는 건가?”
“뭐야?”
이청형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체 어디를 봐서 너희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어디를 봐도 우리가 이겨.”
유세운의 말에 이청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나마 너를 밑에 두려했던 내가 한심스럽군.”
이청형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팔신장.”
“예.”
팔인교를 매고 있던 여덟 명의 거한이 일시에 대답했다. 유세운의 시선이 잠시 그들을 향했다. 팔인교를 매고 다녀서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지 한번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들의 수준이 강환의 경지에는 들어서 보였다.
“뭐야 저런 놈들을 가마꾼으로?”
이청형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후. 팔인교를 매고 있지만 내 호위이기도 하지. 마음껏 주살하라.”
“예.”
이청형의 뒤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팔신장을 보며 유세운은 입맛을 다셨다.
“쳇. 이거 생각보다 귀찮아 지겠는데?”
비쾌한 신법으로 몸을 날리던 영호천은 자신을 막아서는 거한을 보고 멈춰 섰다.
“누구냐?”
“북천방의 팔신장이다.”
영호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영호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너랑 놀아줄 시간은 없다. 그만 비켜라.”
“흐흐흐. 문주님이 허락한 이상 너희들은 오늘 다 죽은 목숨이다.”
영호천은 먼지가 가득 쌓인 죽립을 들어 거한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 내 눈에 띄는 북천방의 놈들. 한 놈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군.”
“크하하하.”
달려드는 거한의 주먹에 맺히는 강환을 보며 영호천은 천천히 고검을 뽑아들었다. 영호천은 처음에 달려오던 속도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팔신장. 이름은 기억해주마.”
스걱.
팔신장의 두 눈에는 불신의 빛만이 가득했다. 가볍게 강환을 베고 지나 자신의 몸을 두 동강 낸 영호천의 검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남았다.
동철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거한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역풍이 불어 늦어지자 배에서 내려 쉬지 않고 달려왔다. 말의 숨도 턱 끝까지 차 있는 듯 했다. 전장이 코앞인데 자신을 막아서는 거한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동철은 말의 목을 가볍게 도닥여주었다.
“그동안 고생했구나. 잠시 쉬거라.”
말에서 내린 동철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난 동철이라고 한다. 이름을 밝혀라.”
동철의 물음에 팔신장은 피식 거렸다.
“크흐흐. 네가 내 이름을 알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팔신장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동철은 태연히 검극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극으로 그려내는 태극.
팔신장은 뒷골을 스치는 불안한 기운에 고개를 흔들며 일권을 내뻗었다.
부앙.
세찬 바람을 동반한 강력한 강기가 뻗어왔다. 동철은 태연히 태극의 가장자리로 강기를 맞이했다.
“헛!”
태극의 끝에 걸린 강기는 속절없이 방향이 틀어졌다. 동철은 태극을 그리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전의 자신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고수. 조급해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팔신장의 두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한 수 재간은 있었구나.”
팔신장의 주먹에 강환이 피어올랐다. 동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 같은 상대를 만나서 반가웠소.”
동철의 검극에도 검환이 맺혔다. 검환이 그리는 태극을 보며 팔신장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청의 금검대와 함께 주작부대를 휩쓸고 다니던 관백의 말이 멈춰 섰다. 두 명의 거한이 앞을 팔짱을 낀 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관백의 물음에 팔신장들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주작장군을 쓰러트린 자인가?”
“그렇긴 한데 누군지 기억에 없는 자들이군.”
관백의 말에 팔신장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북천방에서도 그들은 손에 꼽히는 고수들이다. 이청형이 직접 키워낸 팔신장. 누구하나 우러러 보지 않는 이 없었다.
팔신장들의 주먹에 강환이 맺히는 것을 보고 관백은 말에서 내려섰다.
“말이 필요 없나 보군.”
주작장군과의 싸움에서 얻은 영감을 잃어버리기 전에 강환에 이른 고수들과 다시 겨룰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인 것도 같았다.
촥.
관백의 부채가 넓게 펴졌다.
“밝힐 이름도 없는 자들에게 손을 쓴다는게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덤벼라.”
“건방진 자!”
두 명의 팔신장들이 관백의 좌우로 움직였다. 팔신장 개개인도 이미 강환에 이른 고수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합격술이었다. 팔신장 전체가 모인다면 이청형을 제외하고 당할 자가 없다고 북천의 무인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었다.
좌우로 흩어지는 팔신장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관백은 입가에 아찔한 미소를 지었다.
“기대되는군.”
터텅.
좌우에서 내딛은 진각.
팔신장의 강환이 관백을 향해 쏘아져왔다. 관백의 부채에도 흰색의 선환이 피어올랐다. 관백의 눈에 좌우에서 들이 닥치는 강환의 작은 틈새가 보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신형. 내딛은 좌보에 팔신장들의 두 눈에 경악이 어렸다. 여덟 명이 펼치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이지만 둘이 펼치기에 생긴 작은 틈으로 관백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틈이 승패를 갈랐다.
“선풍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