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야습
두두두두두.
오천여기의 기마가 달리는 말발굽에 대지가 울음을 토했다.
먼지 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아침 햇빛을 가렸다.
팔인교를 매고 있는 여덟 거한의 신형이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올랐고 그 안에서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던 이청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틀 만에 도착했군.”
이청형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전방을 바라보았다. 선발대를 무너뜨린 청의문의 정예들이 나와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감히 육우령을 잡아뒀단 말이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면 너희는 내일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청형의 중얼거림이 끝날 무렵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기마가 거대한 청기를 휘둘렀다.
히히힝.
말이 멈춰서고 북천방의 오천 무사들이 청기의 명령을 따라 멈춰 섰다.
청의문과의 거리는 백 장. 그들의 야영지인 천막까지의 거리는 백오십 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청의문주 조상은 오천의 기마가 멈춰서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북천방주를 유세운이 막아낸다 해도 이정도의 인원을 막아낸다는 것은 청의문만으로는 무리였다.
더욱이 여느 방파도 아닌 북천의 무림을 통일한 패자.
북천방의 정예들이라면 자신들이라 해도 쉽지 않을 터.
조상은 불안한 마음에 유세운을 돌아보았다. 태연히 갈색 말에 올라탄 채로 북천방의 진영을 바라보던 유세운의 입이 열렸다.
“휘유~ 장난 아닌데?”
유세운은 오천 명에 이르는 북천방의 무사들 뒤로 치솟아 오르는 흙먼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나 서둘렀군.”
잠도 안자고 운기를 했더니 몸은 상쾌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자야 될 시간에 자지 않았다는 것이 뭔가 꺼림칙하게 생각됐다.
“제길. 이것도 다 저놈들 때문이잖아.”
유세운은 뒤를 돌아 봤다. 눈 밑이 검게 물든 도병우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때 작전은 다 짰어?”
도병우는 퀭한 눈을 들어 유세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들의 반응이나 보고 얘기하도록 하죠.”
“하하하. 좋아. 기대해 보겠어.”
유세운의 시선은 다시 북천방을 향했다.
“호오. 저것들은 뭐지?”
북천방의 진영 가운데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일단의 기마대가 보였다.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오는 백여 명의 인원들 사이로 팔인교가 보였다. 유세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말이나 타고 다닐 것이지. 사람들은 왜 혹사 시키는 거야?”
유세운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전 백여 명의 기마대가 멈춰 섰다. 오십 장 거리까지 다가온 기마대의 선두에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섰다.
붉은 망토에 호랑이 가죽 투구를 눌러쓴 사내였다. 동무벽이나 육우령보다는 작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거한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자였다. 대도를 허리에 찬 사내의 입이 열렸다.
“청의문주와 광오문주는 나오라!”
넓은 평야에 퍼져나가는 목소리에 유세운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게 지금 누구를 오라가라야!”
조상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일단 나가봐야 하지 않겠소.”
유세운은 조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군요. 저 건방진 자식의 얼굴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면 말이죠.”
유세운의 말에 조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몰았다. 그의 뒤로 동무벽과 관백이 말을 몰아 따라갔다.
조상은 그들을 보다 자신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로는 오늘 아침 웃는 얼굴로 찾아온 하후추가 패검을 차고 따라왔다.
조상과 유세운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청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놈은 청의문주 일 테고 한 놈이 광오문주라는 놈인가?”
조상의 말에 그의 옆에 말을 몰고 있던 비천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중년인이 청의문주 청연장 조상이군요.”
이청형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저런 자가 있을 수 있지?”
아무리 많이 잡아줘도 이십대 중반 밖에 안 보이는 자다. 그런 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검의 경지였다. 이청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여흥거리군.”
촤라락.
허공섭물로 펼쳐지는 주렴 사이로 이청형이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이청형의 시선이 유세운에게 멈춰졌다.
유세운은 주렴을 걷고 나오는 이청형을 보고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야 저놈은?’
절로 속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금까지 본 다른 심검의 고수와는 궤를 달리하는 자.
창궁검 백건호 보다도 철마성의 철마풍 독고청 보다도. 하물며 영호천이라 해도 저 자만큼 위협적이진 않았다.
이십 장을 넘는 거리를 넘어서 느껴지는 상대의 기파. 유세운은 다시 한번 욕을 했다.
“제길!”
유세운의 욕을 들은 동무벽과 관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느끼기에도 식은땀이 흐르는 상대. 유세운이라면 어떨까란 기대를 했지만 그의 욕지거리를 들으니 상대의 실력이 대충 가늠이 됐다.
“길보단 흉이 많겠군.”
“이번은 정말 쉽지 않겠어.”
동무벽의 중얼거림에 관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말을 몰던 조상도 유세운의 욕지거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무리인가?”
하후추의 시선은 호랑이 가죽 투구를 쓰고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들은 대로라면 저자가 북천혈풍단주? 육우령 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내 수준은 넘어선 자로군.’
어제 밤새 머리를 맞대고 짠 계획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북천혈풍단주가 저 정도의 고수라면 다른 사대천왕도 마찬가지 일 터. 이길 승산이 더 작아졌다.
이청형은 천천히 평야의 바닥을 밟았다. 아직 다 녹지 못한 잔설의 느낌이 시원하게 와 닿았다. 이청형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육우령은 어디 있는가?”
작게 말했지만 안에 실린 내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청의문의 정예들과 지원군 전체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오십 장의 거리를 넘어서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 때문이리라.
이청형의 시선은 유세운에게 향해졌다.
대답을 한다면 그의 몫. 지금 나와 있는 중원인 중 최강이라 불릴만한 그의 몫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유세운의 입이 벌어졌다.
“막사에 있다.”
그 역시 작지만 내력을 담아 한 말. 이청형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예상대로 심검에 이른 고수. 막사에 있다니 아직까지는 육우령도 무사한 듯 했다.
“너 같은 자가 중원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유세운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너 같은 자가 북천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유세운의 말에 이청형은 웃음을 지었다. 유세운의 거침없는 말투와 태도에 얼핏 육우령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청형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내 밑으로 들어오겠느냐?”
이청형의 말에 비천마왕은 물론 나와 있던 모든 이가 놀랐다. 내력을 많이 실지 않아 나와 있는 양쪽의 대표만 들을 수 있었다.
유세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넌 귀가 없냐?”
이청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런 이상한 말이 들리는 것 보니 뭔가 이상이 있는 듯도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세운의 말에 실소했다.
“내가 광오문주 유세운이다.”
“그래서?”
이청형의 되물음에 유세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위로는 사부님을 제외한 누구도 올라올 수 없다.”
이청형의 시선에 호기심이 어렸다.
“네 사부가 누구냐? 그 또한 내 밑에 두겠다.”
“이런 미친 자식이!”
유세운은 이청형의 말에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말의 옆구리를 차려했다. 관백이 다급히 다가와 그의 말고삐를 잡았다.
“문주님!”
유세운은 관백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이청형의 얼굴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네깟 놈 백 명이 덤벼도 사부님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유세운의 거침없는 말에 이청형은 그저 웃음만을 지었다.
이청형 보다도 그의 옆에 있던 북천혈풍단주의 얼굴이 피처럼 붉어졌다. 분을 참지 못한 표정. 명령만 떨어진다면 단숨에 대도로 목을 쳐내고 싶다는 표정이다.
심검의 고수를 키워 낼만한 자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바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근간에 심검에 이르렀던 자도 이미 백 년 전의 고수다.
이청형은 유세운을 거두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결국 너도 내 밑에 있을 자는 아니군.”
이청형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유세운의 눈빛이 변했다.
‘이자식 정말 예사롭지 않은데?’
하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유세운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청형을 쏘아보았다. 직접 손을 섞는다면 또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기세만으로 본다면 광검의 경지에 이른 사부와 겪은 시간이 비웃었다.
자칫 실수로 물고기 하나 태웠을 때 사부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비하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유세운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뭐가 우습지?”
이청형의 질문에 유세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것 없어.”
이청형은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북천의 선두에 선 자. 육우령을 내놓아라. 그렇다면 너희 중원의 무인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주마.”
이청형의 말에 조상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북천방주 쯤 되는 자가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 모든 인원이 도착한다면 자웅을 겨룰 만 했다.
지원군의 진영에 남아있던 도병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턱도 없는 소리 하고 있군.”
도병우의 예상대로 유세운은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청형을 바라보았다.
이청형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그를 내놓지 않는다면 내일 이 시간. 너희의 피가 이 평야에 강을 이룰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뿜어내는 기세에 도병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는 건가?”
도병우의 예상대로 유세운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웃기지마.”
“뭐?”
이청형의 물음에 유세운은 말을 이었다.
“그는 절대로 내줄 수 없다.”
이청형은 유세운을 쏘아 보았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네가 내 밑에 들어오지 않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저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그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육우령도 저들의 목숨도 너에게 내줄 생각이 없다.”
“하하하.”
이청형은 유세운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청형의 내력이 담긴 일갈이 터져 나왔다.
“기한은 내일 이 시간이다! 명심해라!”
촤르륵.
팔인교의 주렴이 걷어지며 이청형의 신형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북천혈풍단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유세운을 쏘아보았다.
“네놈의 목. 반드시 내가 따도록 하지.”
동무벽이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저놈의 목. 반드시 제가 따도 되겠습니까?”
동무벽의 물음에 북천혈풍단주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북천혈풍단주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
“네놈이냐? 육우령을 쓰러뜨린 자가?”
“그래.”
“나한테는 그런 비겁한 수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네놈의 목도 내가 따주도록 하지.”
동무벽은 자신의 보도를 두들기며 코웃음 쳤다.
“글쎄? 과연 네가 몇 초나 버틸지 내기할까?”
“크크크. 기대하지.”
북천혈풍단주의 손이 들어 올려지고 기마대가 일제히 뒤로 돌았다.
“가자!”
멀어지는 북천혈풍단과 팔인교를 보며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저놈의 목은 동호법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