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수레바퀴는 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낮게 깔리는 웃음소리만이 퍼져 나갔다.
“크흐흐흐.”
두개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
“이것이야. 이것이었어.”
어둠 속에 작은 옥빛의 륜(輪)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륜에서 나는 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을 밝히는 빛.
웃음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치렁치렁 긴 머리에 잔뜩 자란 수염. 모두 옥빛으로 빛났다.
자그마했던 옥빛의 륜은 어느덧 웃음소리의 주인을 휘감고 점점 거대해져갔다.
푸스스.
옥빛의 륜이 닿는 거리에 있는 모든 것은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반경 십장을 넘어선 거대한 륜은 커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퍽.
벽면의 일부가 완전히 무너지며 구름 낀 바깥 하늘이 얼핏 보였다. 옥빛의 수염에 머리를 기른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보아라. 하늘이여. 이것이 바로 천륜광검(天輪光劍)이다.”
번쩍.
사내의 전신을 휘감던 옥빛의 륜이 그의 손짓을 따라 벽면에 난 구멍을 향해 뻗어갔다. 거침없이 뻗어가던 옥빛의 륜은 구멍을 넓히며 하늘로 하염없이 뻗어갔다.
“크하하하하!”
사내는 륜이 넓혀 놓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사내의 전신을 두르고 있는 은은한 옥빛의 기가 넘실거렸다. 하늘을 딛고선 사내는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았다.
육백여 명에 달하는 검사들이 오체투지하고 있었다.
사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검사들을 내려 보았다.
“들어라. 검마도의 검사들이여! 이제 우리의 검이 중원을 벨 때가 왔다!”
사내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가르며 멀리 퍼져나갔다. 사내는 자신의 검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일어나라! 그리고 검을 뽑아라!”
차차차창.
검과 하나가 된 듯한 움직임. 검사들의 검이 일제히 뽑혀 들었다. 육백에 달하는 검의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랐다.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늘이여! 들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중원은 우리의 검 아래 놓일 것이다!”
사내의 말에 하늘이 울부짖듯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치이익.
어둠 속을 퍼져나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것을 위해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인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 하지만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치이익.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다시 한번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우습군.”
쿠르르릉.
사내의 발끝에서 시작한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점점 커져가는 진동음에 사내의 입가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천년 전의 무공을 뛰어넘는 무공이 아직도 나오지 못했다니 우스운 일이야.”
핏빛의 혈광이 어둠을 밝혔다. 귀기(鬼氣)마저 느껴지는 혈광이 일렁이며 사내의 모습을 비췄다. 으스스한 혈광에 비춰진 사내의 모습은 오랜 시간 빛을 못 받아 새하얀 피부와 피처럼 붉은 적색의 눈썹과 머리였다.
사내의 걸음이 한걸음 옮겨졌다.
치이익.
땅에 고여 있던 물이 사내의 발걸음이 닿는 곳을 중심으로 증발했다. 사내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이걸로 다시는 이곳에 들 일이 없겠군.”
사내의 가벼운 손짓을 따라 혈광이 뻗어가 바위에 작렬했다.
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스러진 바위 사이로 걸어가던 사내는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사내의 시선이 닿는 곳.
어둠 속에서 사내가 뿜어내는 빛을 받아 더욱 으스스한 수라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문이 있었다. 사내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당신도 참 재밌는 사람이야. 저런 것은 왜 만들어 놓은 거야? 저 정도의 양이면 천하의 명검을 몇 자루나 만들 수 있을 것을.”
사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과 나의 마지막 만남이니 소원을 들어 주도록 하지.”
사내의 전신을 타고 흐르던 혈광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며 커지기 시작했다. 문에 새겨진 수라의 형상을 띠는 혈광을 지켜보던 사내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만년한철이라도 막을 수 없음을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더욱 아까운 거야.”
사내의 손이 만년한철에 수라의 형상을 새긴 문을 향했다.
“당신이 남긴 무예야. 잘 보라구. 천마광휘(天魔光輝)!”
사내의 손길을 따라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던 높이 십장에 달하던 수라의 형상이 빛살처럼 뻗어갔다.
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수라의 문을 바라보며 사내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만년한철이라는 건가? 깨져나가는 군.”
치이익.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바람 냄새인가?”
사내는 깨져나간 문 뒤로 보이는 동굴을 천천히 걸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보이는 작은 구멍을 통해 밤하늘이 보였다. 사내의 입에서 냉소가 흘렀다.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항시 밤이군.”
걸어가던 사내는 동굴의 끝에 서서 눈살을 찌푸렸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에 화광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오체투지 하고 있는 수많은 마인들과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자들을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이 가장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자를 향했다.
“아버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잠깐 동안의 흔들린 눈빛은 금세 사라졌다.
“일어나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 사내의 모습에서는 하늘이라도 뒤엎을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처럼 붉은 눈썹에 수염과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내의 입이 열렸다.
“천년을 지켜온 수라의 문을 깨신 걸 축하드립니다.”
“수라의 문을 깨신 걸 축하드립니다.”
마인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을 울렸다. 사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수라마교의 교주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교주?”
사내의 물음에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천마광휘를 이룬 자. 진정한 수라마교의 교주가 되는 것이 천년을 이어온 율법입니다.”
“그런 짓까지 해놨었단 말이지.”
작게 중얼거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마인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천산을 울렸다.
“교주님. 만세! 만세! 만만세!”
사내는 입가를 말아 올리고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사내의 손을 따라 뻗어 올라간 혈광은 다시 한번 수라의 형상을 띠었다.
“처…천마광휘!”
지켜보던 수많은 마인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사내는 수라의 형상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고서는 마인들을 돌아보았다.
“천하. 곧 우리 발아래 놓일 것이다.”
작게 외치는 목소리는 수많은 마인들의 귀에 확연히 들렸다. 천산을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보다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마인들은 저마다 경악했다.
사내는 마인들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수라의 뜻으로…”
밤하늘에 붉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있던 아이의 입이 열렸다.
“불길하군.”
“뭐가 불길하다는 겁니까?”
아이에게 묻는 목소리의 노인은 하얀 서리를 맞은 듯 온통 하얀색 일색이었다. 아이의 고개가 돌려졌다.
“네 눈에는 저 하늘의 별자리가 안보이냐?”
아이의 말에 노인이 웃음을 지었다.
“저야 의술만 팠지. 언제 하늘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까?”
아이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네놈은 항상 그랬어. 어린놈이 이것저것 다 배워 둘 것이지 꼭 지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고집 부리더니만.”
아이의 말에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나마 하나라도 팠으니 이 정도까지 된 거 아닙니까?”
아이는 능청을 떠는 노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절진에 가둬 놀 껄 괜히 꺼내왔나?”
“허허허. 그럼 심심해서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나마 제가 있으니 심심하진 않지 않습니까?”
“웃기지마. 네놈을 데려오고 나서 이마에 주름이 느는 것 같아.”
아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자신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설마 저보다 많아지시기야 하겠습니까?”
“이게 진짜! 너 계속 말대꾸 할래?”
“에구. 나이를 먹으니 뼈가 약해져서 살짝 맞아도 부러 질 것 같은데…”
“네가 알아서 고쳐!”
아이의 눈빛이 살벌해지자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도 못 들으셨습니까?”
“그래서?”
아이의 물음에 노인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제 의술이 하늘을 속인다 해도 저한테 시술할 순 없는 겁니다.”
“으윽! 저놈의 입심! 어린놈이 말만 늘어가지고!”
아이의 말에 노인은 허리를 두들기며 답했다.
“에고. 그래도 이제 저도 근 백년 살았는데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아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도 한 백년 살았지.”
노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저 별 두 개는 뭔데 저렇게 재수 없게 빛나는 겁니까?”
“그것 때문에 걱정이다.”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어떤 거 말입니까?”
아이는 노인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설마하니 그러기야 하겠어?”
“아 답답하게 정말 이럴 겁니까?”
노인이 성화를 내자 아이는 삐딱이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며?”
“그야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런데 뭘 믿고 큰소리야?”
노인은 아이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말보다 손이 먼접니까?”
아이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세상은 아직도 말보다 주먹이 통하더라고.”
“크윽.”
노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아이는 하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은거를 깨고 나가야 될지도 모르겠군.”
“정말 나갈 겁니까?”
노인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에구 늘그막에 제자를 두는 게 아니었어.”
“크흐흐. 그래도 제자라고 걱정은 되나 봅니다.”
아이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하긴 백년을 다 살고도 제자 없는 너보다야 낫지.”
“누가 제가 제자가 없다고 합니까? 이래봬도 예쁘기로 치면 천하의 누구 못지않은 제자를 두고 있습니다.”
“흥. 말이야 누가 못해.”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놓인 바위위에 앉았다.
“나중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가서 보면 알겁니다.”
“흥.”
아이는 노인의 옆에 놓인 바위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석이라면 알아서 하겠지. 이리와. 바둑이나 두자.”
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럼 아홉 점 깔아 주시는 겁니까?”
아이는 노인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정도면 자신 있어?”
“흐흐흐. 요즘에 바둑으로 잃은 돈이 얼만지 기억도 안 납니다.”
“하하하. 좋아. 아홉 점 깔고 둬.”
아이는 노인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은발을 쓸어 넘겼다.
수레바퀴는 돌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