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북(北)으로…
일천의 무인. 모두 기마에 올라 자신이 나오길 기다린 듯 했다. 여운이 갈색 말을 데리고 다가왔다.
“유문주님.”
“여대장.”
유세운은 미소를 지었다. 여운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희는 따로 출발합니다.”
“그런가?”
유세운은 사뿐히 말에 올랐다. 여운은 포권을 취해보였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아마 오면 모두 끝나 있을 거야.”
유세운의 너스레에 여운은 미소를 지었다. 유세운은 천천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일천의 기마가 좌우로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또각. 또각.
청석 바닥을 두들기는 말발굽 소리만이 울렸다. 갈라진 기마들의 틈새로 죽립을 눌러쓴 영호천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선두에 선 유세운은 영호천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영호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인사는 잘하고 온 건가?”
“뭐 금방 다녀올 일인데요.”
태연한 유세운의 말에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랑 같이 검을 휘두를 날도 있군.”
“하하하. 전 형님 뒤에 숨어 있어야 겠습니다.”
유세운의 농담에 영호천은 피식거렸다.
“농이 심하군.”
끼이이익.
천천히 열리는 대문을 바라보는 유세운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금방이다. 금방.”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말. 결심을 다졌다.
백건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중원의 혼을 보여주시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릉.
백건호의 손에 창룡검이 뽑혀 나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검신. 백건호의 손이 내려졌다.
“가서 북천방을 무찌릅시다!”
“와아!”
유세운은 갈색말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달려보자.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이히힝.
알아들었다는 듯이 울음을 토하는 갈색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가자! 하!”
유세운과 영호천의 말이 동시에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일천의 무인들의 기마가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
새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아. 춥네요.”
위지청의 투덜거림에 위지평은 자신의 피풍의(皮風衣)를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입고 있거라.”
“헤헤. 거절할 줄 알았죠?”
위지청은 넙죽 위지평이 건넨 피풍의를 둘렀다. 위지청은 자신의 손에 떨어진 눈송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언제쯤 이곳에 도착할까요?”
“그리 멀지 않을 거다.”
위지평의 말에 위지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문에서도 고수가 많이 나왔으니 저희가 선발대는 막아낼 수 있겠죠?”
위지평은 넓은 평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눈들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선발대가 아니다.”
“그래. 문제는 선발대가 아니다.”
위지청과 위지평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부님.”
“이렇게 나오실 필요 없으십니다.”
팔척의 거한에 거대한 패검(覇劍)을 허리에 찬 사내. 청의뢰검 하후추는 저 멀리 눈발 너머의 평야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이미 심검에 든 광천주 이청형. 북천방의 본대가 문제지.”
위지청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에이. 사부님. 그래도 그들이 오기 전에 천룡문과 창천궁의 무인들이 먼저 올 거잖아요.”
위지청의 말에 하후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라도 이청형을 필두로 한 북천방의 무인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위지청은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하아. 괜찮을 거예요.”
위지평은 태연하게 말하는 위지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냐?”
“호호호. 소문 들었잖아? 세운오라버니 얘기 말야.”
위지청의 말에 위지평은 피식거렸다.
“하지만 철마성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가 시간을 맞춰온단 말이냐.”
위지평의 말에 하후추가 관심을 가졌다.
“지금 말하는 자가 일권무적 유세운을 말하는 거냐?”
“예.”
위지청의 대답에 하후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느냐?”
“헤헤.”
위지청은 웃음을 지으며 피풍의를 여몄다.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고요.”
위지청의 말에 하후추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너 스물넷 밖에 안 된 녀석이 무슨 십년을 넘은 지기라는 거냐?”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흉신대부 마방의 일.”
위지청의 말에 하후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십년도 더 된 이야기 아니냐?”
“그때 만났어요. 세운오라버니와는.”
“그래?”
하후추는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십년도 넘은 지기는 맞구나.”
“그럼요. 물론이죠.”
하후추는 갑자기 안색을 굳히고 눈을 빛냈다. 위지청은 사부의 갑작스런 표정변화에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그들이 온 거 같구나.”
“예?”
“신호탄을 터트려라.”
위지평도 그제야 눈발을 넘어 들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위지평은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어 줄을 잡아당겼다.
피융-
펑!
푸른 신호탄이 터지고 하후추는 몸을 돌렸다.
“문주님한테 가볼 테니 너희도 준비 하거라.”
“예.”
경공을 펼쳐 몸을 날린 하후추는 청의문주 조상과 말을 나누는 조예림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저도 한 사람의 무인이에요.”
조상은 조예림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너를 따라오라 함은 너의 무공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다.”
조상은 조예림의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수화의의 뒤를 잇는 너의 의술이 부상자들 치료에 도움이 될까해서 따라오라 한 것이니라. 싸우러 나갈 생각은 버려라.”
“아버지.”
조예림의 간청에도 조상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후추는 조상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들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하후추의 말에 조상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가 적의 예봉을 꺾어놓게.”
“알겠습니다.”
하후추에 대한 조상의 믿음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천궁에 무상으로 하후패가 있다면 청의문에는 그의 동생인 외문주 하후추가 있다. 그런 만큼 결단코 북천방의 선발대를 못 막으리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하후추는 조예림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소문주님. 아직 북천방과 겨룰 기회는 많습니다. 오늘은 저만 믿고 쉬시지요.”
조예림은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하후추는 조상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경공을 펼쳤다.
“청의금검대는 문주님을 보필하고 청의은검대와 청의동검대는 나를 따라라.”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가로질러 경공을 펼치던 하후추는 가장 선두에서 자신의 말고삐를 쥐고 있는 위지평을 볼 수 있었다.
“사부님.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경공을 펼치던 하후추는 가볍게 날아올라 말안장에 올라탔다. 눈발너머 검은 그림자들을 이루는 무인들을 보며 하후추는 자신의 거대한 패검을 뽑아 들었다.
“가자. 북천방의 걸음을 이곳에서 영원히 멈추게 해주자!”
“예!”
쌓이기 시작한 눈을 박차고 하후추의 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눈발 너머로 보이는 푸른 기.
“청의문인가?”
청룡도 육우령은 자신의 흑마를 멈춰 세웠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청의인들. 푸른 물결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흑염이 바람에 휘날렸다.
“얼추 천은 되어 보이는군.”
육우령은 묵묵히 청의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십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선 청의인들. 가장 선두에 말을 타고 패검을 비켜든 사내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청룡도 육우령인가?”
육우령의 호안이 가늘게 떠졌다.
“그렇다. 그대는 누구인가?”
“청의문의 외문주를 맡고 있는 하후추다.”
육우령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청의뢰검 하후추.”
“그렇다. 북천방의 걸음. 여기까지다.”
하후추의 패검이 육우령을 겨누었다. 육우령도 천천히 자신의 청룡도를 들어 하후추를 가리켰다.
“북천의 걸음을 막을 수 있으리라 보는가?”
육우령의 말에 하후추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곳을 넘지 못할 거다.”
육우령은 하후추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북천까지 들려온 명성. 실망시키지 마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육우령의 발이 자신의 흑마의 옆구리를 찼다. 벼락처럼 뛰쳐나가는 흑마를 보고 하후추도 마주 말을 달렸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눈발을 가르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아앙.
하후추의 거대한 패검도 눈발을 갈랐다.
콰앙.
거대한 격돌음과 함께 스쳐지나가는 하후추와 육우령. 하후추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이 정도의 신력(神力)이라니.’
자신의 패검도 누구 못지않은 중병이라 생각했지만 육우령의 청룡도. 엄청난 무게를 자랑했다. 아직도 손끝이 저려왔다.
돌아서는 육우령의 모습에 하후추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과연 이로다.”
육우령을 향해 겨누어진 하후추의 패검에 푸른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육우령은 다시 한번 흑마의 옆구리를 찼다.
이히힝.
땅에 쌓인 눈을 박차고 질풍처럼 내달리는 흑마위에서 육우령의 청룡도가 도강을 뿌렸다. 하후추의 말도 앞으로 내달렸다.
번쩍.
하후추의 별호에 어울리는 쾌검. 그토록 거대한 패검을 눈부신 속도로 찔러 들어갔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눈발들 사이로 하후추의 검강이 육우령을 노렸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반 선회하며 하후추의 검강을 쳐냈다.
콰앙.
격돌과 함께 육우령의 흑마가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과 하나가 된 움직임. 하후추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다시 한번 도강을 뿌렸다. 중병의 이점을 살린 횡 베기.
부아앙.
하후추는 이를 악물었다. 일장에 달하는 청룡도의 길이가 마상전에서 이토록 유리할 줄은 몰랐다. 하후추의 패검에서 검강이 피어올랐다.
콰앙.
이히힝.
격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하후추의 말이 무릎을 꿇었다.
털썩.
하후추는 눈 위에 내려서서 육우령을 향해 패검을 겨누었다. 육우령은 흑염을 휘날리며 하후추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하겠는가?”
하후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물론이다.”
하후추의 말에 육우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마에서 내려섰다. 팔척에 이르는 하후추도 말에서 내려선 육우령을 보고 올려다보았다. 구척의 장신에 일장에 달하는 청룡도를 든 육우령을 향해 하후추는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는 다를 거다.”
하후추의 말에 육우령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검으로 말하라!”
육우령의 일갈과 함께 일장에 달하는 청룡도가 눈부신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청룡도의 끝에 피어나는 도강에 하후추의 패검이 재빠르게 검강을 피워냈다.
콰콰쾅.
육우령의 청룡도가 머리 위에서 한바퀴 돌아 내리쳐졌다. 하후추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청의문의 절기중 하나인 청류보(靑流步)가 펼쳐졌다.
육우령의 청룡도를 피해낸 하후추의 신형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하앗!”
일갈과 함께 눈부신 속도로 뻗어가는 하후추의 검강을 보고 육우령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내리쳐지던 육우령의 청룡도가 그의 손에서 선풍처럼 회전을 했다.
遂?
눈발을 사방으로 날려 보내는 경력의 여파에 하후추는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우뚝 선 채 자신을 내려보는 육우령을 보고 하후추는 입맛을 다셨다.
“강하군.”
북으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