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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궁에서 창주궁보다 깊은 곳에 위치한 태운각(太雲閣).
태상궁주인 창궁검 백건호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온 하객들로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걸 어쩌지?”
관백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 인원이면 오늘 뵙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영호천도 옆에서 죽립을 슬며시 들어올리며 말했다.
“대단한 인파군.”
영호천의 뒤에 서 있던 서중이 웃음 지었다.
“비키라고 해볼까요?”
서중의 말에 동무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거참 시원시원한 꼬마구나.”
“뭐요?”
동무벽의 말에 서중의 한쪽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동무벽은 그런 서중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한번 같이 소리쳐 볼까?”
동무벽의 말에 서중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 좋군요.”
“참아주세요.”
백연혜는 정말 이 많은 무인들을 향해 소리칠 듯한 사내들을 말렸다. 워낙 많은 무인들이 있는 관계로 하얀 면사로 가리고 온 백연혜는 일행에게 작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백연혜는 태운각 앞을 가득 메운 인파를 피해 뒤로 돌아갔다. 무인들은 없고 두 명의 창천궁의 무사가 눈을 빛내며 지키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일견하기에도 여타 다른 창천궁의 무사와는 달라 보이는 사내들.
“소공녀님. 오셨습니까.”
공손히 포권을 취해보이는 사내들을 향해 백연혜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이쪽으로 왔어요.”
“들어가시지요.”
백연혜를 따라 들어선 유세운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오면 될 것을 괜히 걱정했군.”
백연혜는 유세운을 돌아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소문내시면 안돼요.”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는군.”
백연혜를 따라 들어선 태운각의 대청. 하늘을 올려다보는 백염의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유세운과 영호천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너무도 자연스런 기세. 자연지기를 터득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백염의 노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백연혜는 노인에게 다가가 사뿐히 절을 올렸다.
“할아버님. 손녀 백연혜가 인사드리옵니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허허. 그동안 우리 손녀가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노인의 말에 백연혜는 가볍게 얼굴을 물들였다. 노인은 유세운과 영호천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해보였다.
“광오문의 이대 문주인 유세운이라고 합니다.”
“허허. 자네인가?”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노부는 백건호라고 하네.”
백건호의 시선은 유세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노부가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서부터 얼마나 자네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를 걸세. 꼭 한번 보고 싶었네.”
백건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은노선배님은 존경할 수밖에 없군. 자네 같은 고수를 배출하시다니 말야. 그래. 아직 정정하신가?”
“반노환동까지 하셨으니 정정하시다고 봐야겠죠.”
“허허허. 역시 무림의 역사에 남으실 분이야.”
백건호는 시선을 돌려 영호천을 바라보았다.
“낭인천주 되는가?”
“영호천이라고 합니다.”
백건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팔십 평생을 검만을 바라보고 그 길만을 달려와 겨우 심검의 경지에 들었건만 자네들을 보니 부끄럽군.”
백건호의 말에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생신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유세운의 말에 백건호는 자신의 백염을 쓰다듬었다.
“이거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자네가 주는 선물이라니 기대되는군.”
관백이 앞으로 나서며 목함을 건넸다. 백건호는 관백이 건넨 목함을 열어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검인가?”
들어서 검을 뽑아든 백건호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스릉.
맑은 검명을 토하며 뽑혀 나온 창룡검의 푸른 검신에 새겨진 용이 승천할 듯한 기세.
백건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검을 바라보았다.
“차…창룡검인가?”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백건호의 눈에 감격의 빛이 서렸다. 육백년의 시공을 넘어 창천궁의 초대궁주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우웅.
검신에 아른거리는 푸른 기운. 백건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창천궁의 내력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검은 본적이 없었다. 검명을 토하며 빛나는 검. 검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검을 회수했다.
찰칵.
검집으로 들어간 창룡검을 보며 백건호는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노부 평생에 이렇게 뜻 깊은 선물은 처음이군.”
백건호의 시선이 유세운을 향했다.
“고맙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유세운의 말에 백건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허허. 그럼 내 더한 부탁을 해도 되겠군.”
백건호의 말에 담긴 뜻에 유세운은 잠깐 긴장했다. 백건호는 뒷짐을 진 채 유세운과 영호천을 바라보았다.
“이번 북천방의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을 걸세.”
유세운과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건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번 북천방과의 결전에 나가 줄 수 있겠나?”
백건호의 물음에 영호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유세운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유세운을 살펴보던 백연혜는 걱정스레 전음을 보냈다.
(왜 그래요?)
유세운은 입을 열려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백건호를 바라보았다.
“백노선배님.”
유세운의 부름에 백건호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유세운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음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장내에 싸늘한 겨울바람이 스쳐갔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연륜이 깊은 백건호였다.
“흠흠. 자네 지금 노부를 놀리는 건가?”
유세운은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제가 왜 노선배님을 놀린다는 겁니까?”
“아니 그 경지에 들도록 전음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그런 거 배울 시간 없었습니다. 게다가 항상 얼굴을 마주 대하고 살았는데 그것 쓸 일 조차 없었죠.”
유세운의 말에 백건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허허허.”
백건호는 유세운을 바라보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네 경지에 전음 따위를 배운 다는 것 자체가 우습겠군.”
유세운은 묵묵히 백건호를 바라보았다. 백건호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의기상인을 깨달은 자네에겐 간단할 걸세. 그냥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을 상대에게 보내면 되네.”
백건호의 말에 유세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 삼아 유세운은 백연혜를 불러 봤다.
(연혜. 연혜?)
(푸훗. 정말 어떻게 한번 듣는다고 혜광심어를 그렇게 쉽게 펼칠 수 있는 거죠?)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그러게요. 그런데 왜 그랬어요?)
(뭐가?)
백연혜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전음을 보냈다.
(북천방을 막아달라고 했을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요.)
(휴~. 당연하지. 또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
유세운의 마음에 담긴 감정까지 실린 혜광심어에 백연혜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저 믿고 기다릴께요.)
“흠흠.”
백건호의 헛기침에 유세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백건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체 자네 노부한테 전음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서는 그런 식으로 사용한단 말인가?”
“무슨 말입니까?”
유세운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영호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게 역력히 표현 할 거라면 전음이 무슨 필요인가? 그냥 말로하게.”
영호천의 말에 유세운은 상황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전음을 배웠다고 시험 삼아 해본다는 것이 그만 모든 이들이 눈치 챌 만큼 서툴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어깨를 으쓱거리며 표정에 다 나타냈으니 누가 못 알아차렸으리.
백건호는 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둘 다 승낙했으니 내 문상한테 일러두겠네.”
백건호의 말에 영호천과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미소 짓고 있는 백건호를 뒤로 하고 모두 태운각을 나왔다. 유세운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알았어요.)
웃음 짓는 유세운을 보고 동무벽은 투덜거렸다.
“크윽. 이십년 전만 해도…”
“하하. 그러게 말일세. 강호의 누구 못지 않은 풍류남아라고 자랑하던 우리 아닌가.”
“쳇. 네놈들 덕에 눈물 흘린 여인이 어디 한 둘이겠냐?”
도병우의 시기 어린 목소리에 동무벽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 염소수염을 기르는데 누가 널 따르겠느냐?”
“네놈의 고슴도치 같은 수염은 어떻고?”
동무벽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턱수염을 만졌다.
“이상하군.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말야.”
“으윽!”
끼이익.
거대한 청의문의 대문이 열렸다.
위지청은 옆에 자신의 애마에 타고 있는 위지평을 향해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 괜찮을까?”
“뭐가 말이냐?”
“상대가 청룡도 육우령이라며.”
위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북천의 하늘 아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자다.”
“휴. 분명히 육두팔비(六頭八臂)의 괴물일 꺼야.”
투덜대는 위지청을 바라보며 위지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의 뛰어난 고수들은 다 그런 괴물이더냐?”
“쳇. 하지만 화산파의 오백정예를 일수에 무너뜨렸다며.”
“소문을 너무 믿지 말거라.”
위지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런데…”
위지청은 걱정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당문에 부탁해 만든 특제 철마차가 보였다. 소문주인 청수성의 조예림이 타고 있는 마차다.
“소문주님까지 가시는 건 그렇지 않을까?”
위지평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문주님의 뜻이다.”
“하지만…”
“조용히 하거라.”
위지청은 사부 하후패의 말에 고개를 움츠렸다. 말없이 전방을 쏘아보는 하후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사부인 하후패가 질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약간은 힘을 얻었다.
청의문주 청연장 조상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들어라. 지금 북천방의 선발대가 섬서성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장내에 울려 퍼지는 조상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화산의 정예 오백의 영혼이 아직 구천을 헤맬 것이다. 그들의 숭고한 뜻. 우리가 잇는다.”
조상의 손이 높이 들어올려졌다.
“가라. 청의문의 힘을 보여줘라. 중원 무림이 왜 아직 한번도 세외에게 넘어가지 않았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존명!”
차차차차창.
일제히 검을 뽑아드는 청의문의 고수들을 보며 조상의 손이 앞을 향해 내려졌다.
“가자!”
조상의 말을 필두로 청의문의 고수 일천이 말을 내달렸다.
두두두두두.
창궁검 백건호(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