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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검 백건호
영호천은 유세운이 올 것을 알았음인지 금세 시녀들이 술상을 봐왔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세운의 물음에 영호천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어제 그렇게 난리를 치고 들어오고 오늘 우형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단 말인가?”
“아니 뭐 그렇지는 않지만…”
유세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영호천은 유세운의 잔에 죽엽청을 부어주며 웃음 지었다.
“각오 단단히 하는게 좋을 거야.”
“무슨 각오를 말입니까?”
영호천은 자신의 잔에 죽엽청을 따라 부으며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이 스물다섯에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사내. 강호 역사에 남을 일을 벌써 몇 가지나 해치워낸 사내. 딸을 가진 무인이라면 누구나 넘볼만한 사내지.”
“하하하. 형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유세운은 당황하며 백연혜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영호천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백소저만한 분이 어디 있겠냐만 그건 아직 모를 일이지.”
백연혜는 영호천을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영호대협께서 이렇게 짓궂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영호천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 두 사람 보기에 샘이 나서 그런거니 이해해 주시오.”
유세운은 술잔을 들며 영호천을 쏘아보았다.
“형님. 저한테도 그런 농은 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더욱 샘나게 하는군.”
단숨에 술을 들이킨 영호천은 유세운에게 물었다.
“그래. 철마성은 어떻던가?”
영호천의 물음에 유세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위험한 곳이더군요.”
“호오.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란 말인가?”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철마성의 태상성주가 심검에 들었을지 몰랐던 탓도 컸습니다.”
“그가 심검의 경지에?”
영호천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영호천이 알기로 그는 절대 극마의 경지를 넘어설 인물이 아니었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요 근래 몇 가지 심득을 얻지 못했다면 그곳에 뼈를 묻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허허. 자네 입에서 그 정도 말이 나올 정도란 말인가?”
“뭐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태상성주보다 더 위험한 자가 그곳에 있더군요.”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와 영호천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동무벽과 관백은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죽립인이었는데… 검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검을 품에?”
“예. 보통은 허리나 등에 차는데 웃기는 자더군요.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심검의 경지였습니다.”
“그런가?”
영호천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백연혜는 유세운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무사히 나온 거예요?”
“태상성주가 그를 말렸지. 솔직히 죽립인까지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정말 위험 했을 거야.”
“다행이네요.”
영호천은 생각에 잠겨 있다 둘의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참 이렇게 찾아와서 둘이 얘기 할 거면 날 왜 찾아 온 건가?”
“하하하. 형님도 참. 한잔 드시지요.”
유세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영호천을 향해 잔을 건넸다.
특별히 부탁해 얻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렀다. 태극의 유함에 강함을 담기 시작해 이제는 거의 완성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끊이지 않을 듯 태극을 그리던 검이 멈춰졌다.
“무슨 일이냐?”
작지만 힘 있는 말투. 예전과는 사뭇 다른 말투다.
다가오던 젊은 도인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숙부님. 운백입니다.”
대답없이 멈춰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운백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찾아가지 않으십니까.”
반개한 눈에 잠시 갈등이 스쳤다.
“나도 그가 온 것은 알고 있다.”
검을 회수한 사내는 운백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먼저 그를 찾아 가야 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내게는 없다.”
운백은 자신의 사숙이 되는 동철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무당 최고의 기재다. 누구도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능력은 현요진인을 넘어서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수련. 그의 목표가 어딘지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과연 수련만이 전부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운백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주제 넘는 참견을 한 것 같습니다.”
동철은 옆에 놓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운백이 물러가고 동철은 숨을 고르고는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도 느끼고 있다. 얼마 전인가부터 더 이상 사부님의 말이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사부님조차 검풍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 그것만으로도 무당에서 알아주는 검객이건만 당신조차 가보지 못한 경지를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장문인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건만 정협련의 행사로 인해 이곳으로 와버렸다.
답답한 마음이 검에 실려 줄기줄기 풀어내갔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베겠냐?”
뒤에서 들려온 음성.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그 목소리의 익숙함에 검이 절로 멈춰졌다.
돌아서는 동철의 눈에 한 사내가 석탁 위에 앉아 웃음 짓고 있었다.
“세운이냐?”
“그럼. 이렇게 너를 찾아올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냐?”
영호천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먼저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얘기가 생각나 백연혜에게 물어 달려왔다.
무엇인지 모를 응어리가 느껴지는 검기.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고민 있냐?”
유세운의 물음에 동철은 쓴 웃음을 지었다.
“별로…”
유세운은 별궁에 들려 받아온 술병을 흔들었다.
“그럼 곡차나 한잔하자.”
“그래.”
옆에 와 앉는 동철에게 술병을 건네 준 유세운은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팔짱을 낀 유세운은 술병의 마개를 열고 들이키는 동철에게 물었다.
“그거 알고 있냐?”
“어떤 거?”
유세운은 한 손을 눈높이에 맞춰 들어올렸다.
“자연지기라는거 말야.”
“자연지기?”
유세운의 손 위에 은빛의 강환이 나타나 와선형으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무인이 가질 수 있는 내력이 얼마나 될까?”
“무인마다 다르겠지.”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 위에 나타난 강환은 이리저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맞아. 하지만 한계라는 것은 있지. 그걸 뛰어 넘게 해주는게 자연지기야.”
유세운의 손 위로 다시 한 개의 강환이 더 생겨났다. 동철은 한모금의 술을 더 들이켰다.
“그렇다고 자연지기가 아무나 다룰 수 있느냐? 천만의 말씀이지.”
유세운의 손 위로 다시 늘어나는 강환. 어느덧 다섯 개를 넘어섰다.
“마음이야. 세상 무엇보다 빠르고 무엇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마음이야.”
유세운의 시선이 반개한 동철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환? 단순한 의지의 발현일 뿐. 더 높은 경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느끼기에는 그래.”
유세운의 손을 떠난 강환들이 그의 주변을 은빛으로 물들이며 선회했다.
“난 검사는 아냐. 하지만 무인이긴 하지. 너에게 물어 봐. 네 손에 들린 검에 물어. 너의 마음으로 묻고 들어. 깨달음은 멀리 있는게 아니니까.”
유세운의 말 한마디 한마디 동철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연 속으로 돌아가듯 서서히 사라지는 은빛의 강환을 바라보는 동철의 시선이 격정에 휩싸였다.
술병을 내려놓고 절로 검을 뽑아 들었다. 현요진인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곁에 있던 검이다. 동철의 반개한 눈이 검극을 향했다.
유세운은 소리 없이 움직여 술병을 들어 입에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 친구로서 해줄 충고뿐.
동철의 멈춰 있던 검극이 아주 작게 태극을 그렸다. 거의 움직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움직임. 하지만 끊어짐이 없다.
동철의 마음으로 묻고 듣는 검.
동철은 속으로 한탄했다. 왜 다른 이에게 듣고자 했음인가. 길은 항상 자기 곁에 있음인데.
유함 속에 강함을 담는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태극은 태극이거늘. 그 안에 무엇을 담는다는 것 자체가 태극을 일그러뜨리는 것이었다.
끊어지지 않는 태극 속에서 푸른 검강이 뻗어 나왔다. 응어리지는 검강. 작은 검환을 만들고 태극을 따라 돌았다.
유세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그렇게 한걸음씩 가면 되는 거야.’
유세운은 술병의 마개를 살며시 닫고서는 신형을 뽑아 올렸다. 무아지경에 빠진 동철의 수련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밖으로 나온 유세운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이봐.”
작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사내. 운백이다.
운백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급히 포권을 취했다.
“동사숙이라면 지금 연무장에 계실 겁니다.”
유세운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알아. 만나고 왔어.”
유세운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보다 지금 동철이가 깨달음을 얻는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도 연무장으로 못가게 해라.”
유세운의 말에 운백은 크게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유세운은 운백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말고 괜히 동철의 깨달음을 막지나 말도록 해.”
“예.”
유세운의 발이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날았다. 운백은 멀어지는 유세운을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문상 초평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하지?”
갑자기 들려온 전언. 화산파 정예들의 전멸이 가져온 파문은 컸다.
그들의 행보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실감했다. 청의문에서 북천방 일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바보 같은 이.”
화산파의 집법장로가 직접 나선 일이었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다. 북천방이라면 또 다른 무림의 절대자. 그들의 뜻을 일개 방파가 막는다는 생각 자체에 코웃음이 쳐졌다.
선발대의 행보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전멸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배첩을 받고 모인 무인의 수는 물경 삼천을 헤아리지만 그들 중 쓸만한 고수를 꼽으라면 채 천을 넘지 못한다. 그나마도 좋게 봐준 숫자다.
가뭄의 단비처럼 낭인천을 모두 끌고 온 영호천이 고맙기만 했다.
“문상 계신가?”
들려오는 하후패의 목소리에 초평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다. 하후패는 초췌한 모습의 초평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너무 무리하는거 아닌가? 꼴이 말이 아니군.”
“아아. 지금 머리가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하후패는 초평을 향해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예. 들어오시지요.”
초평을 따라 들어온 하후패는 뒷짐을 진 채 방안 가득 널려진 지도들과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배첩을 받고 무인들의 신상명세와 섬서성의 세부 지도들. 하후패는 걱정스레 물었다.
“화산파의 일은 어떻게 됐나?”
초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표한다면 무림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사기를 올릴 수는 있을 겁니다.”
하후패는 섬서성의 지도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긴 하겠지만 정말 무모한 짓을 했군.”
초평은 같이 섬서성의 지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고작 알아낸 거라고는 선발대의 대장이 누구라는 것 정도 밖에는…”
“누군가?”
초평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청룡도 육우령이라고.”
“허허. 그가 선발대의 대장인가?”
“예.”
창궁검 백건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