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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들 하시오.”
힘 있는 목소리. 청삼에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의 한 마디에 대청은 조용해 졌다.
엽패도 억지로 화를 참으며 자리에 앉았고 하후패의 시선도 중년인을 향해 돌려졌다.
현 청의문의 문주인 청연장(靑燕掌) 조상.
그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있었다.
“지금 한시가 급한 시기에 우리가 싸워서 뭘 하자는 거요.”
조상의 말에 엽패도 하후패도 고개를 숙였다.
“부문주의 말도 외문주의 말도 모두 일리는 있소.”
엽패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하후패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조상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외문주가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빼고 인원을 뽑아보시오.”
“예. 문주님.”
힘차게 대답하는 하후패를 보고 엽패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문주님…”
조상은 손을 들어 엽패의 말을 막았다.
“지금 저쪽에서 온 것은 선발대요. 본대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소. 우리가 할일은 저들의 선발대를 막아내는 것이오.”
조상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정도라면 육대세력의 일좌를 맡고 있는 우리로서 충분히 가능할 것 아니오.”
조상의 얼굴에 단호한 빛이 서렸다.
“출정은 삼일 후. 외문주는 내일까지 내게 인원을 뽑아 주시오. 그리고 부문주는 내문의 고수 중 절반의 인원을 뽑아 주시오. 이번 출정은 본인도 같이 가겠소.”
조상의 말에 엽패의 얼굴과 하후패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문주님. 문주님은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엽패와 하후패가 동시에 말을 건넸지만 조상의 뜻은 완고했다.
“나 또한 중원의 무인.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향원정에는 한두 송이 씩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 은은히 감도는 매화향에 유세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향기 좋은데.”
“많이 변하셨나 봐요?”
장난스레 걸어오는 백연혜의 목소리에 유세운의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글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나?”
“그러게요. 한 여인의 마음이 타들어갈 정도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유세운은 뒤로 돌아서서 토라진 표정의 백연혜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흥. 그럼요.”
코웃음을 치는 백연혜에게 다가간 유세운은 그녀를 안으려 했다. 백연혜의 수도가 날카롭게 찔러왔다.
“흥. 벌 받아야 되요!”
장강불진의 일초의 묘리가 담긴 일수.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정말 많이 늘었는데?”
유세운의 좌수에서 뻗어 나온 와선형의 내력이 백연혜의 수도를 옆으로 흘렸다.
비틀거리는 백연혜를 안은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 기다렸다는 말 맞아? 그동안 이렇게 실력이 늘었다는 건 기다리지도 않고 수련만 한거 아냐?”
유세운의 장난에 백연혜는 화를 내며 그를 밀쳤다.
“뭐라구…”
하지만 밀친 속도보다 빠르게 다시 유세운의 품에 안겨버린 백연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유세운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어라. 이상한데? 한 여인의 마음이 탔다고 하더니 향긋하기만 한걸?”
“정말!”
다시 한번 밀친 백연혜는 유세운이 순순히 뒤로 물러나자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유세운은 품에 손을 넣은 채 웃음을 지었다.
“난 그래도 약속은 지킨다고.”
“흥.”
고개를 트는 백연혜의 모습에 유세운은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유세운은 품에서 양관척에게 받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백연혜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게 뭐예요?”
“글쎄? 가져가 봐.”
“흥. 그럼 제가 못 가져갈 줄 알고요?”
백연혜의 좌수가 장강붕파의 묘리를 실은 채 휘둘러졌다. 뻗어오는 기세에 목함이 부서져 나갈 듯하자 유세운은 가볍게 손을 튕겼다. 목함을 튕겨 올리고는 작은 손짓으로 경력을 풀어 헤쳤다. 떨어지는 목함을 향해 장강불진의 일초를 펼치는 백연혜를 향해 유세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부드럽게 백연혜의 수도에 가져다 댄 유세운의 왼손에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거력이 뿜어져 나왔다.
“꺅!”
놀란 백연혜의 신형이 반대로 돌아섰다. 돌아선 백연혜를 안은 유세운의 손에 목함이 가볍게 내려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유세운의 체온에 백연혜는 얼굴을 붉혔다. 유세운은 백연혜를 안은 채 목함을 열어보였다.
달칵.
봉황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 조각된 옥으로 된 팔찌를 보고 백연혜의 얼굴에 기쁨이 서렸다.
“너무 예뻐요.”
유세운은 백연혜의 왼손을 잡고 팔찌를 껴주었다. 새하얀 섬섬옥수에 옥환이 무척이나 어울렸다. 유세운은 백연혜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웃음 지었다.
“잘 어울리네.”
“고마워요.”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던 백연혜는 유세운의 얼굴이 코앞에 있자 얼굴을 붉혔다.
살며시 감기는 눈. 유세운의 눈도 감겼다.
짧은 입맞춤. 석양 아래 했던 입맞춤이 떠오르는 순간.
“흠!”
도병우의 헛기침 소리에 유세운의 감긴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 떨어진 백연혜는 얼굴을 붉힌 채 말을 돌렸다.
“아! 영호대협도 와 계세요.”
분노를 주체 못하고 삼엄한 기세를 뿜어내려던 유세운의 두 눈이 떠졌다.
“영호형님이?”
“예.”
향원정에 오를 때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건만 들리도록 헛기침을 한 도병우를 향해 유세운은 말없이 살기를 보냈다.
노총각으로 지내고 있는 도병우는 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오갈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형님이 이곳에 와 계실 줄은 몰랐네.”
“저희도 영호대협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안내해줘.”
백연혜는 해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같이 가요.”
별궁의 서궁에 자리 잡은 낭인천의 무사들. 겨울철의 따뜻한 햇살에 기와에 올라가 잠을 자는 자. 정원에 나와 잠을 자는 자등 사방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백연혜와 같이 나타난 일단의 무리를 향해졌다.
유세운의 뒤를 따르는 동무벽과 관백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자신들도 모르게 병장기로 손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고개 숙인 채 따라오는 도병우에게 시선이 멈춘 그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낭인들에게 있어 용병단은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무도를 쫓다가 포기한 자들의 집단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누구시오?”
초췌한 안색에 보통의 장검보다도 한자나 더 긴 장검을 맨 인물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백연혜를 향해 가볍게 목례한 사내의 시선이 유세운을 향했다.
유세운은 초췌한 안색의 사내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어디 아픈가?”
가벼운 말 한마디에 사방에 널려 있던 낭인들의 어깨가 흠칫했다. 초췌한 안색의 사내. 낭인천에서 세 손가락 안에 항상 꼽히는 병환검(病幻劍) 단량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다.
단량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장검의 손잡이를 잡아가는 단량을 보고 도병우가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게 누군가? 고집 쌔기로 유명한 단량이 아닌가?”
단량의 시선이 도병우를 향했다.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도병우는 자신의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키는 게 좋을 거야.”
단량의 비쩍 마른 우수가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동무벽이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나만 말해주지.”
단량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동무벽이 두 눈을 빛냈다.
“그거 뽑는 순간 넌 죽어.”
코웃음을 친 단량은 동무벽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멈칫했다. 결단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동무벽의 기세를 느꼈음인가 별궁에서 서중이 걸어 나왔다.
“뭐야? 누가 여기 시비 걸러 왔어?”
서중도 느꼈음이다. 동무벽이 내뿜는 기세. 손이 근질근질해질 만큼 승부욕을 자극하는 기세다.
유세운은 검을 세 자루나 차고 나오는 서중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팔이 두 갠데 왜 검이 세 개냐?”
유세운의 말에 서중의 불같은 성격이 터져 나왔다.
“뭐 이런게 다 있어? 해보자는 거냐?”
대뜸 검의 손잡이를 잡아가는 서중을 향해 관백이 고개를 내 저었다.
“그만 하시죠. 섣부른 판단이 피를 부릅니다.”
관백의 아찔한 미소와 함께 하는 말에 서중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뭐냐 이것들은?’
유세운은 가만히 둘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줄기줄기 뻗어가던 동무벽과 관백의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형님을 만나러 와서 실례 할 수는 없지. 비켜라.”
단량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지 아직 밝히지 않았다.”
유세운은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영호형님. 소제 유세운이오. 들어가도 되겠소?”
유세운이라는 말에 단량과 서중은 물론 별궁의 여기저기 널려있던 낭인들의 어깨가 흠칫했다. 낭인천주와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물.
천하제일에 거론 되는 인물 중 하나.
낭인들의 눈에 승부욕이 번뜩였다. 별궁의 문이 열리며 영호천이 나왔다.
“오래간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영호천의 고검이 뽑히며 눈부신 옥빛의 검강을 뿌렸다.
치이익.
어느새 들어올려진 유세운의 좌수 앞에는 세 개의 강환이 와선형으로 회전하며 옥빛의 검강을 제지했다. 한 치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검강을 보고 영호천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마주보는 유세운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하하하하. 이거 그동안 몰라보게 강해졌군.”
덥썩 껴안는 영호천을 마주 안으며 유세운이 투덜거렸다.
“안 강해졌으면 그 일 검에 두 쪽 났을 겁니다.”
“하하하하. 그 정도는 막아 낼 줄 알았지.”
영호천의 일검과 그것을 막아내는 유세운을 본 낭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저 정도의 일 검을 펼친 적이 없는 영호천이었다.
쾌와 패의 기운이 같이 서린 일 검.
그 앞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일 검이었다. 코앞에서 펼쳐진 저 일 검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선 유세운의 일 수.
세 개의 강환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만드는 이는 듣도 보도 못했다. 낭인들의 눈에 영호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유세운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모두 들어간 별궁을 바라보며 서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그동안 천주한테 속은 느낌이야.”
단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는 일 검이군.”
서중은 별궁의 계단에 주저앉으며 사방에 널린 낭인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인정해라. 천주도. 유문주도.”
“천주야 예전부터 인정하고 있었소.”
투덜거리는 낭인 하나가 뒷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거지?”
낭인의 말에 단량도 서중의 옆에 앉으며 답했다.
“나이가 무슨 필요냐. 우리의 목표가 생긴 것뿐이다.”
단량의 말에 낭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별궁 안으로 들어가 대청으로 들어선 영호천은 웃음 지었다.
“하하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네를 만나러 온 이들이 실망할까봐 그랬네.”
“저를 만나러 왔단 말이 무슨 말입니까?”
유세운의 투덜거림에 영호천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철마성을 단신으로 봉문 시킨 자. 낭인들로서는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자네와 손속을 겨루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이 이백오십을 넘었네. 그래서 자네와 그들의 차이를 느끼게 해준 거지.”
“영호형님. 두 번만 보여주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습니다.”
유세운의 진지한 말투에 영호천은 미안해했다.
“아마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을 걸세. 미안하군.”
“하하하. 그보다 정말 오랜 만입니다.”
유세운의 말에 영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창궁검 백건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