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33화 (133/194)

(133)

따뜻한 물에 몸을 담고 있어서인가 졸음이 쏟아져 왔다. 쉬지 않고 달려온 길 지금 생각해보면 용케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필의 말은 지쳐서 견디질 못해 산에 풀어주고 마지막까지 달렸다. 그리고 재회.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간신히 달래서 보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다.

“하하하.”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까지 물속에 잠겨든 유세운은 물로 얼굴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가족과의 인사도 채 못 나누고 씻으러 달려왔었다. 다른 이들도 지금쯤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을 터였다.

푸른 청삼을 걸치고 허리띠를 묶은 유세운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럼 슬슬 만나뵈러 가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문을 연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다들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의 꾀죄죄한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구척 거한의 몸에 맞는 옷을 창천궁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푸른 청삼을 입은 동무벽의 모습과 황삼을 걸친 관백의 모습. 그리고 칙칙한 회의를 입은 도병우가 서 있었다.

“입어도 꼭 그런 색을 입어야 돼?”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자신의 염소수염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천연색은 왠지 상당히 맘에 안 들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유세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쨌든 아버지를 뵈러가자.”

“예.”

유세운은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십년도 넘게 떨어져 있어 보았으니 그거에 비하면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대청으로 들어선 유세운은 가족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 유태청은 유세운의 어깨를 가만히 두들겨 주었다. 유청운도 유주란도 일어나 다가왔다.

유세운은 유주란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를 보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뭐 때문에 저러는 거지?’

유주란은 유세운을 향해 다가오며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나가서 사고만 치고 온 주제에 그런 눈꼴 시린 장면을 보여주다니 염치도 없구나.”

유주란의 말에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가 그러니까 아직 남자가 없는 거야.”

“뭐얏!”

일갈하며 달려들려던 유주란은 유청운의 눈빛에 제지당했다. 유청운은 유세운을 향해 미소만 지어 주었다.

“다치지 않고 돌아와 다행이구나.”

“하하하. 뭘요. 그 정도 다녀오는데 다치기야 하겠어요?”

유세운은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형. 누나. 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어요.”

유태청은 유세운의 뒤에 서 있는 일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의 소식은 들었다만 소개해 주겠느냐.”

“예. 일단 여기 이쪽은 광오문의 우호법이 된 동무벽이라고 해요.”

유세운의 소개에 동무벽은 포권을 취해보였다.

“참풍마도 동무벽이라고 합니다.”

동무벽의 인사에 유태청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그 명성 익히 들었소. 이렇게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구려.”

동무벽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유장주님의 협에 대한 이야기는 이십년 전부터 들었습니다.”

“과찬이오.”

유세운은 옆에 서 있던 관백을 소개했다.

“이쪽은 좌호법이 된 관백이라고 해요.”

“단풍선주 관백입니다.”

“허허. 천풍쌍기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유태청이라 하오.”

관백의 수려한 외모에 미소가 그려졌다.

“동호법이랑 유장주님이 어떤 분일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이렇게 뵈니 소문이 오히려 부족하군요.”

유태청은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 육룡보다 뛰어나다던 기재들이 아니었소? 이렇게 보니 당시의 소문이 부족한 감이 있구려.”

유세운은 마지막으로 칙칙한 회의를 입고 온 염소수염의 도병우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도병우라고 광오문의 군사를 맡았습니다.”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소개한다고 속으로 궁시렁 대고 있었건만 처음으로 자신의 직책을 들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경천뇌 도병우라고 합니다.”

“허허. 도단주였구려.”

“용병단은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 말씀은 거두시지요.”

“허허. 그런 일이 있었소? 이렇게 만나보게 되어 반갑소.”

유청운도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유청운이라고 합니다.”

유청운의 인사에 도병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정말 강호의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더니 유공자의 무위가 삼룡삼봉 못지않구려.”

“과찬의 말씀입니다.”

도병우는 유주란을 보며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이쪽은 산검낭자 유소저겠군.”

“알아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유주란이라고 합니다.”

유태청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를 준비시켰으니 앉아서 차나 마시며 담소를 나누지요.”

“예.”

푸르르릉.

보통의 말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흑마의 콧김이 하얗게 퍼져나갔다.

흑마의 위에 길이 일장에 달하는 거대한 청룡도를 비켜든 사내가 타고 있었다.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구리 빛 피부에 호안의 사내.

북천의 하늘 아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청룡도 육우령이었다. 그의 뒤로 늘어 서 있는 이천여 기의 기마대.

북천에서 중원을 향해 검을 든 무인들이다. 누구하나 이름이 안 알려진 자 없고 북천방에 들지 않은 무인 중 태반이 모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대와는 일부러 떨어져서 나왔다. 선발대라는 명목 하에.

육우령의 시선은 자신들 앞을 가로 막은 무인 너머 중원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엇이었을까?

묘한 끌림이었다. 비록 북천방주 이청형에게는 중원의 무인들과 겨루어 보고 싶다고 했지만 뭔지 모를 끌림에 이 길을 향했다. 그 답을 듣기 위한 걸음.

이청형의 본대와 같이 온다면 그 답을 듣지 못할 지도 몰랐다.

육우령의 입이 열렸다.

“우리의 길을 막은 자. 누구냐?”

육우령의 물음에 한 도인이 앞으로 나섰다.

“북천방의 무인이오?”

육우령의 시선이 도인에게 향했다. 한 자루 잘 갈고 닦은 검을 보는 듯 날카로워 보이는 기세다. 일생을 검만을 파고들었음이 느껴졌다.

“그렇다. 우리는 북천을 대표해 온 자. 중원을 대표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물러서라.”

육우령의 말에 도인은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우리가 비록 중원을 대표하지는 못하지만 그대들의 흙발이 중원을 더럽히게 할 수는 없소.”

육우령의 시선이 도인의 뒤를 향했다. 도인과 같은 복색의 사내들. 그 중에는 소매에 매화가 그려져 있는 자들도 보였다. 하지만 수가 너무 적다. 고작 해야 오백의 인원.

육우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원으로 우리를 막겠다는 건가?”

“인원은 상관없소. 이것은 우리의 의지. 중원의 의지요.”

육우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도인을 향했다.

“이름을 말하라.”

“도인에게 이름이 무어 필요하겠소만 본도는 청송자라 하오.”

화산의 집법장로이자 화산 장문인 다음가는 고수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 곧은 심지로 더욱 유명한 그는 화산의 고수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육우령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 이름은 육우령이다.”

말을 마친 육우령의 거대한 흑마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청송자의 말도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육우령의 뒤로 이천의 기마가 내달리기 시작했고 청송자의 뒤로 오백의 화산 정예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청송자의 검에서 푸른 검강이 길게 뻗어 나왔다.

육우령의 흑마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청송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어리석은 자!”

청송자의 검이 허공을 향해 열두 송이의 매화를 그렸다. 매화모양으로 뻗어가는 검풍.

육우령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머리위로 치켜든 청룡도의 날이 푸르게 빛났다.

“참(斬)!”

열두 송이의 매화가 힘없이 스러지고 갈라진 검풍 사이로 가슴이 길게 베어진 청송자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쿠쿵.

쓰러져가는 청송자의 옆에 내려선 흑마의 발걸음에 땅이 울었다. 육우령은 빛을 잃어가는 청송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검이다. 중원의 첫 상대로 나쁘지 않았다.”

청송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분노한 매화검수 다섯이 날아올랐다.

“용서할 수 없다.”

“감히 집법장로님을!”

분노에 찬 매화검수들을 바라보는 육우령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무인은 검으로 얘기하는 법. 그는 내게 검으로 물었고 검으로 답했거늘.”

하늘을 가득 매우는 매화검기를 향해 육우령의 청룡도가 한 획을 그었다.

슈아악.

대번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다섯의 매화검수들.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 입에서 선혈을 쏟아내었다. 육우령은 청룡도를 들어 땅에 찍었다.

쿵.

그리고 터져 나오는 사자후.

“멈춰라!”

육우령의 외침에 북천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러 화산의 무인들을 뒤로 물리고서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육우령은 청룡도를 들어 선혈을 토하는 매화검수들을 향해 겨누었다.

“물러가라.”

육우령의 기세에 매화검수는 선혈을 토하며 울부짖었다.

“한 발짝도 물러 설 수 없다. 쳐라!”

다시 몸을 날리는 화산의 정예들을 바라보며 육우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희가 놓친 기회다.”

육우령의 청룡도가 춤을 추었다.

“쳐라!”

육우령의 일갈에 북천의 이천 무인들의 검도 같이 춤을 추었다.

쾅!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부서질 듯 내려치는 푸른 손의 주인. 청수혼원장 엽패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청의문의 부문주인 그의 분노한 기세에 좌중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유독 고개를 들고 대답하는 인물.

까칠해 보이는 턱수염에 각이 선 얼굴. 청의뢰검(靑衣雷劍) 하후추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화산의 청송자외 오백의 검수들. 전멸입니다.”

“그들이 왜 북천방의 선발을 막으러 나갔냐고 묻고 있는 것 아닌가!”

불같이 분노한 엽패를 바라보며 하후추의 시선에도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더욱 안으로 끌어들여 시간을 벌자고 한 게 누구십니까.”

하후추의 말에 엽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노부에게 하는 말인가?”

하후추는 대답 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엽패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외문주께서 그 일을 꽤나 마음에 담아 두었군.”

하후추는 엽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대세력 중 하나로 불리는 우리가 그들을 막아서는 것이 당연한 일. 다른 문파의 힘을 빌리고자 기다리자고 한 건 부문주님 아니십니까?”

엽패의 얼굴에도 분노가 어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도들만 피를 흘리란 말인가!”

하후추의 얼굴에도 분노한 기색이 어렸다.

“지금 누구를 막론하고 막아서야 할 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위해 수련을 했고, 무엇을 위해 강해졌고, 무엇을 위해 싸운단 말입니까!”

하후추의 분노한 말에 엽패 또한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 했다.

“중원 모두의 일인 것을 우리만 피해를 입을 수 없네.”

하후추의 시선이 냉담해졌다.

“우리가 육대세력에서 말미로 밀려날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외문주!”

엽패의 목소리는 일전이라도 불사할 만큼 분노가 서렸다.

북천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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