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북천방
영호천과 마주 앉아 찻잔을 들던 백연혜의 손이 멈춰졌다. 자신의 귀를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 백연혜에게 영호천이 웃음을 지었다.
“유아우가 왔나봅니다.”
“설마…지금 제가 들은게 잘못들은 건 아니죠?”
별궁에 자리 잡은 낭인천의 무사들. 그중 영호천을 만나러 찾아와 가볍게 차를 나누며 담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창천궁 전체에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 백연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영호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호대협.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영호천은 찻잔을 어루만지며 웃음 지었다.
“그렇게 해요.”
백연혜는 여운을 대동한 채 종종걸음으로 별궁을 벗어났다. 전신의 내력이 다되도록 경공을 전개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영호천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백연혜의 뒷모습을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어울리는 한쌍이야.”
백연혜가 나가고 들어오던 서중이 물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으신 겁니까?”
서중의 물음에 영호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아닐세. 그건 그렇고 소감이 어떤가?”
“무슨 소감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궁금해 하던 그가 온 거 아닌가.”
서중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력만으로 얘기하자면 전 완전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서중의 말에 영호천은 웃음을 지었다.
“궁금하군.”
서중의 뒤를 이어 방으로 들어오던 단량이 문을 닫으며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다는 겁니까?”
영호천은 자신의 고검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도 나도 아직은 완성을 향해 가는 중이야. 과연 누가 더 앞서 가고 있을까?”
영호천의 말에 서중과 단량의 눈이 빛났다.
창주각 칠층에서 회의를 하던 백선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문주가 온 것 같군.”
백선후의 말에 하후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서둘러 왔다해도 어찌 이리 빨리 도착했는지…”
하후패의 말에 초평도 웃음을 지었다.
“모르지요. 그렇게 서둘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지.”
백선후는 초평의 말에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팔순잔치를 위한건 아닌 것 같지 않소?”
“하하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하후패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백선후는 초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세. 어차피 영호천주와 유문주가 온 이상 회의는 다시 해야 되지 않겠나.”
“예. 이것으로 저희의 승산이 높아졌습니다.”
지도를 말아 정리하는 초평을 향해 하후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문주 덕에 이렇게 머리 아파지는 회의도 멈추고 좋군요.”
초평은 하후패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상은 편하시겠습니다. 저는 유문주와 영호천주 덕에 다시 계획을 세우느라 오늘밤도 세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하. 대신 며칠 후면 내가 더 바빠지지 않겠소?”
초평은 하후패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무상을 가장 바쁘게 만들어 드리지요.”
“적당히 해주시오. 이젠 몸도 예전 같지 않아서…”
엄살을 부리는 하후패를 보고 백선후는 웃음을 지었다.
“그만들 하고 나가 봅시다.”
“예.”
찰칵.
하루 종일 휘두르던 검을 회수한 유청운은 수건을 들어 땀을 닦았다.
“녀석. 드디어 온 건가?”
유청운은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가기는 좀 그런데…”
“오라버니!”
나는 듯이 경공을 발휘해 연무장으로 달려온 유주란을 보고 유청운은 수건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가보는 길이냐?”
“물론이죠.”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유주란을 보던 유청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생각이라면 참아라.”
“예?”
유청운은 유주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자마자 손찌검 할 생각이라면 나갈 생각을 말아라.”
뜨끔해하는 표정을 짓는 유주란을 보며 유청운은 웃음을 지었다.
“철마성의 소식이 전해진 걸로 봤을 때 쉬지도 않고 달려왔을 거다.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하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녀석이 친 사고를 봐요.”
입술이 한자나 나와서 투덜거리는 유주란을 향해 유청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된 것 아니냐.”
“그래도… 철마성 일은 해결됐지만 이제 혈천문과 흑무기마대는 어떻게 하려구요!”
“네가 가서 나무란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끄응.”
잔뜩 토라진 표정을 짓는 유주란을 보고 유청운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포기했다.
“같이 가자꾸나.”
“예.”
끼이이익.
서서히 열리는 창천궁의 대문을 바라보며 동무벽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문주님 말 한마디에 닫힌 창천궁의 문도 열리는군.”
“아마 몇이나 될까?”
관백의 물음에 도병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 유일하다고 봐야겠지.”
도병우의 말에 유세운은 싸늘한 시선으로 돌아봤다.
“그거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무슨…”
유세운은 완전히 열린 창천궁의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솔직한 심정은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모습에 동무벽과 관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병우도 곰방대를 향해 뻗어가던 손이 멈춰졌다.
백 명의 검사가 좌우로 길게 늘어져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늦은 시간 대문을 억지로 열었다고 투덜대도 할말이 없을 터인데 그들의 얼굴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유세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몰아갔다.
또각. 또각.
말굽이 청석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동무벽과 관백은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앞서 가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물어가는 석양. 붉게 물든 창천궁의 대문 사이로 늘어선 검사들. 그곳을 향해 말을 몰아가는 모습에 동무벽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살아생전에 이런 모습도 보게 되는군.”
“그러게 말일세.”
관백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들이 목숨을 맡긴 광오문의 문주가 받는 최고의 대우에 그들의 어깨에도 힘이 절로 들어갔다.
도병우는 곰방대를 꺼내 피지도 못하고 투덜거렸다.
“쳇. 보는 눈이 너무 많군.”
유세운은 말을 몰아가면서도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길. 그냥 주루에 묵으면서 씻고 내일 올 것을 이 무슨 창피야?’
관백의 수려한 외모가 저 정도로 망가질 정도라면 자신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유세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런 유세운의 생각도 말이 채 대문을 지나기 전에 멈춰졌다.
붉은 석양이 대지를 물들이고 도열해 있는 검사들 사이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성취가 있었는지 펼치는 경공에 군더더기란 하나 없어 보였다. 유세운은 말에서 내려섰다.
차차창.
검사들이 일제히 뽑아드는 검날이 석양의 빛을 반사했다.
눈부신 검광들 사이로 달려온 백연혜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유세운은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달려오던 백연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유세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백 명의 검사만이 있는게 아니다. 달려오는 그녀의 뒤로 창천궁주와 자신의 가족도 보였다. 하지만 자신만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그런 그들이 보일 리 만무했다.
“운오라버니.”
조용조용하고 조신하기만 하던 그녀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품으로 달려들었다.
퍼억.
뒤로 밀려날 뻔한 유세운은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경력을 흘려냈다. 품에 안긴 백연혜의 머리에 꽂힌 봉황비가 눈에 들어왔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도 하고 있네?”
백연혜는 고개를 들어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약속했던 그날처럼 붉은 석양에 물든 그의 얼굴에 백연혜는 가볍게 뺨을 물들였다. 백연혜는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유세운은 아무 말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은 채 토닥여 줬다. 백연혜는 유세운의 손길에 훌쩍이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을 얼마나 걱정했는데…흑.”
유세운은 백연혜의 울음에 당황했다. 검을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사만 백 명이고 대문 밖으로 줄을 서 있는 무인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난처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창천궁주와 문상, 무상이다. 아니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누나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형이었다.
백연혜의 투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들리는 소문은 싸웠다는 얘기 뿐. 마지막에 가서는 종적조차 확인이 안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흐느낌이 잦아들며 품에 안겨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은가. 유세운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쉬지 않고 어디 머물지도 않고 달려와서 그래.”
백연혜는 유세운의 품에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왜 쉬지도 않고 달려 왔어요?”
유세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너무 보고 싶은 이가 있어서… 쉴 수가 있어야지.”
백연혜는 유세운에게서 몸을 살짝 때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워낙 서둘러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다. 지금 유세운의 상황이 어떤지를. 땀에 먼지에 온통 얼룩진 모습. 옷에 쌓인 먼지로 원래의 색깔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백연혜의 눈에 다시 한번 눈물이 맺혔다.
자신만 그를 기다리고 그렇게 걱정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정도로 먼지가 쌓일 정도로. 종적이 그 넓은 창천궁의 정보망으로도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서둘렀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백연혜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다시 유세운의 품에 안겼다. 유세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약속했는데 왜 걱정을 해. 내가 그런 약속도 못 지킬까봐?”
“그래도… 그래도.”
점점 작아지는 백연혜의 목소리에 유세운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백선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좌우를 물렸다. 백 명의 검사들은 검을 검집에 회수 하지도 않은 채 썰물이 빠지듯 소리 없이 물러났다.
백선후는 유세운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번 북천방과의 결전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철마성의 일은 마무리 되었어야 했다. 자신들이 상상도 못한 결과를 이끌어 내준 유세운을 향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조용히 물러가는 백선후와 문상, 무상을 따라 유주란과 유청운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무벽과 관백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봤어?)
(물론이네. 허허. 살아생전에 창천궁주가 고개 숙이는 모습도 다 보게 되는군.)
도병우는 배알이 뒤틀리는지 결국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유세운은 백연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날 믿어. 그리고 괜한 마음 걱정 하지마. 앞으로라도 그러고 있을거 생각하면 내가 더 걱정되니까.”
유세운의 말에 백연혜는 품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느껴지는 백연혜의 움직임에 유세운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야…”
“예?”
고개를 드는 백연혜에게 유세운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나 좀 씻어도 될까?”
백연혜는 유세운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걸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품에 안겨버리는 백연혜를 보고 유세운은 결국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하하하하.”
북천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