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창틈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는 햇살에 유세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제도 너무 많이 마셨군.”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며 걸어 나간 유세운은 문을 열고 나왔다. 말없이 조용히 서 있는 양관척의 부인 진령이 있었다. 양손에 꿀물을 들고서 있는 진령을 보고 유세운은 웃음 짓고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다른 이들은 어디?”
유세운의 물음에 진령은 옆으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음.”
유세운은 밖으로 나가서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자신들의 말에 올라타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들. 술자리에서 나눈 말들이 생각났다.
동무벽이 걸어 나오는 유세운을 보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일찍 출발한다더니 역시나…”
“일찍들 일어났군.”
유세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옆에 나와 있던 양관척이 슬며시 다가왔다.
“문주님.”
“응?”
양관척의 손이 품안에서 나왔다. 자그마한 목함 하나를 꺼내든 양관척은 웃음 지으며 유세운에게 건넸다.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이게 뭐야?”
유세운은 목함을 받아들고 열어보았다. 옥으로 된 팔찌. 봉황 한 마리가 새겨져 있건만 얼마나 정교한지 지금이라도 목함을 벗어나 날아갈 것만 같았다. 유세운은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예쁘군.”
양관척은 미소를 지었다.
“선물하시면 좋아 하실 겁니다.”
“아아. 고마워.”
이것저것 챙기는 양관척의 모습에 유세운은 미소를 지었다. 유세운은 양관척의 뒤에 서 있는 곽부설을 보며 말을 건넸다.
“이곳을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별로 걱정은 안하지만. 아! 그리고 항상 의기상인의 뜻을 가슴에 새겨 놔.”
“의기상인을 말씀이십니까?”
곽부설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언(武言)을 해준다고 생각했다.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자네에게 검을 직접 휘두르는 수련보다는 그 네 글자의 참뜻을 이해하는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유세운은 시선을 돌려 말없이 서 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마주치는 시선.
“언제라도 떠나라.”
“약속을 지키고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대답.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심 없는 유세운의 한마디에 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속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동무벽이 자신의 고슴도치 같이 뻗은 턱수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안 가십니까?”
“아니. 지금 간다.”
유세운은 말머리를 돌렸다. 뒤돌아선 유세운은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히힝.
앞으로 튀어나가는 갈색 말 위에서 유세운의 시선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창천궁을 향했다.
사천성 무산의 창천궁.
보름 전부터 무인들이 줄을 서서 들어서고 있었다. 거대한 철문 옆의 작은 문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무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줄을 서 있었다.
턱수염이 짙게 난 태진문의 송가라는 무인도 쌍검의 곽가라는 무인과 줄을 선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 이거 줄이 잘 줄지를 않는군.”
“그러게 말일세.”
도착한지는 이틀이 지났건만 아직도 들어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보게.”
곽가가 송가의 어깨를 두들겼다.
“왜 그러나?”
송가는 곽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한두 기의 기마가 만들 수 있는 먼지구름이 아니었다.
“누구지?”
곽가의 시선에 의혹이 깃들었다. 송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서둘러 와봤자 줄 서서 며칠을 기다려야 하건만 저리 많은 인원이 왔으니 지루하진 않겠구먼.”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 기마들이 보였다.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한 자루 고검을 옆에 차고 달려오는 인물 뒤로 파리한 안색에 보통의 장검보다도 한자나 긴 검을 차고 있는 사내. 그리고 그 옆에 검을 세 자루나 허리에 차고 말을 달리는 사내가 보였다.
그들의 뒤로 가지각색의 무기와 행색의 사내들이 줄을 지어 말을 달렸다.
송가는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며 의아해 했다.
“그런데 저들…”
“그렇군. 창천궁의 대문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한데?”
열려져 있기는 자신들이 왔을 때부터 열려있었다. 하지만 아직 대문으로 들어서는 자들을 본적은 없었다. 대체 누가 있어 저 대문을 들어설까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을 정도였다.
역시나 창천궁의 무사들이 순식간에 대문을 막아섰다. 백여 명의 무인들은 길을 막고 서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마주 달려오는 기마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다섯의 인물이 섰다. 다섯 가지 색의 검을 차고 있지만 하나인 듯 닮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초로의 검객들.
바라보던 송가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이보게.”
쌍검을 차고 있던 곽가의 얼굴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설마하니 창궁오행검(蒼宮五行劍)이 직접 나선건가?”
“그런 듯 허이.”
그들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정문을 막아선 이들과 말을 몰아오는 자들에게 향했다. 달려오던 기마들이 천천히 멈춰 섰다.
곽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저들 마치… 낭인 같군.”
송가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낭인들이 저 정도나 같이 뭉쳐 다니는 것 본적 있나?”
“없지.”
그들의 이야기는 창궁오행검중 적색의 검을 찬 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하는 통에 멈춰졌다.
“누구신가?”
창궁오행검이라면 내성의 고수들. 말에 담긴 내력이 가볍지 않았다.
선두에 말을 몰던 죽립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죽립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빛에 창궁오행검의 셋째인 화검(火劍)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죽립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난 영호천이라 하오.”
간단한 말 한마디.
줄을 서서 기다리던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낭인천주이자 지금 전 무림에 천하제일에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창궁오행검의 화검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소. 그렇다면 뒤의 낭인들은?”
영호천의 옆에 있던 서중이 앞으로 나섰다.
“낭인천의 천주님 이하 이백오십이 명의 낭인천의 무사들이오.”
서중의 말에 화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잘 오셨소. 안으로 드시지요.”
좌우로 갈라서는 백여 명의 무인들 사이로 영호천이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바라보던 곽가와 송가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훗. 저 정도는 돼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군.”
“천검 영호천이라면 어딜 가도 저런 대접은 받을 수 있겠지.”
처소에 앉아 동경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던 백연혜는 여운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소공녀님.”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여운의 얼굴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운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문을 들어선 일행이 있습니다.”
백연혜의 얼굴에 기쁨이 서렸다. 창천궁의 대문을 들어설 자. 전 무림을 통틀어도 손에 꼽힌다. 여운에게 특별히 부탁해 대문을 들어서는 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건 유세운을 생각하고 한말.
여운의 말이 이어졌다.
“낭인천주 천검 영호천 이하 이백오십이 명의 낭인들이 입성했습니다.”
여운의 말에 백연혜의 얼굴에는 실망이 스쳤다.
“영호대협이 오신건가요?”
영호천이라면 그녀와의 연도 가볍다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장강삼검이라는 절초를 가르쳐준 사람. 어찌 보면 스승에 다름없다.
백연혜는 고개를 돌려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매일 자신을 꾸미며 유세운을 기다렸다. 스승에 다름없는 영호천이 왔다는 이야기에도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휴. 그래도 오셨으니 찾아뵈어야 겠죠?”
백연혜의 말에 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문주님과도 각별한 사이이니 찾아뵈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백연혜는 자리에 일어서서 자신의 머리에 꽂은 봉황비를 어루만졌다. 오늘은 꼭 올 것 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그의 소식이 없었다.
“가보도록 하죠.”
여운은 문을 열고 백연혜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뒤따랐다.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송가는 웃음을 지었다.
“이보게. 다음이면 우리 차례구만.”
“휴. 다리가 다 후들거릴 지경일세.”
대답하는 곽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져가는 시간이 다됐다. 잘못하면 오늘도 창천궁에 들어가지 못할 뻔 했다.
끼이이익.
창천궁의 거대한 대문도 오늘은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음인지 닫혀가고 있었다. 송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따뜻한 물에 씻을 수 있겠군.”
“응? 이보게.”
“왜 그러나?”
송가는 곽가의 시선을 따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들이 보였다.
쿠웅.
대문이 닫히고 달려오는 무리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전신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네 명의 사내들. 말들도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무리해서 달린 모양이었다.
곽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늦은 줄도 모르고 저렇게 서둘러 온 모양이군.”
“응? 잠깐 저들 지금…?”
곽가의 시선도 흔들렸다. 일직선으로 닫힌 대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내들. 송가가 웃음을 지었다.
“우리 뒤로 있는 줄이 보이지도 않는가?”
“그러게 말일세. 이미 닫힌 문이 열릴 리도 없지 않은가?”
그들이 말을 하는 사이 대문의 십장 앞에서 말을 세운 사내들은 숨을 골랐다.
“헉헉. 이제 다 온 겁니까?”
염소수염의 도병우의 물음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물어가는 석양의 붉은 빛이 성벽을 불태우는 모습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군.”
유세운은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보았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왔다. 온통 먼지투성이의 동무벽과 관백, 도병우의 모습에 웃음이 지어졌다.
특히 관백의 수려한 외모에 먼지와 땀에 전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가끔 이렇게 달려야겠는데? 그래야 관호법의 저런 모습도 볼 수 있고 말야.”
관백은 손사래를 쳤다.
“문주님.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동무벽도 머리의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너무 늦게 온 거 아닙니까? 문도 닫혔는데.”
도병우는 주변을 돌아보다 아직 닫히지 않은 옆문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아직 늦진 않은 듯 합니다. 저기로 들어가면 되겠군요.”
유세운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갔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야? 왔으면 대문으로 들어가야지.”
“이미 닫혔지 않습니까?”
도병우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옆문으로 다닌단 말인가? 닫혔으면 열고 들어가면 되지.”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의 얼굴에 설마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부시고 들어가실 생각이라면 참아 주십시오.”
유세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설마하니 그렇게야 하겠어?”
유세운은 창천궁의 정문을 바라보며 내력을 끌어 소리쳤다.
“광오문의 이대 문주 유세운이오.”
북천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