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오문-129화 (129/194)

(129)

창천궁으로

예전의 폐가처럼 보이던 집이 훨씬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 보는 유세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군.”

“크흐흐. 녀석 우리가 온 줄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동무벽의 말에 유세운은 말을 멈춰 세웠다.

“놀래켜 줄까?”

관백도 유세운의 물음에 흥미가 동한 듯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관백의 물음에 유세운은 담을 가리켰다.

“담을 넘어서 쳐들어가면 놀라겠지.”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나이에 무슨 월담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유세운은 멀뚱히 도병우를 바라보다가 간단히 말했다.

“그럼 사람이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훼방 놓지 말고.”

“문주님.”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도병우를 무시한 유세운은 말에서 내려섰다. 높이가 일장이 넘는 담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번 웃어주고 넘기에도 충분했다.

“그럼 먼저 간다.”

가볍게 발을 구르고 높이 떠오른 신형은 소리 없이 담벼락에 올라섰다.

뒤따라 올라서는 동무벽과 관백을 보고 유세운은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었다. 도병우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몸을 날렸다.

유세운은 집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물었다.

“어딜까? 지금 이 시간에 양총관이 있을 만한 곳이?”

“아마도 대청이나 서재에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대청으로 가자.”

유세운은 발을 굴러 담장에서 날아오르려다 멈칫했다. 슬며시 돌아본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대청이 어디지?”

관백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몸을 날렸다. 생긴 것만큼이나 매끄러운 신법. 유려하게 몸을 날린 관백의 뒤를 이어 차례로 몸을 날렸다.

금새 대청의 지붕까지 올라간 유세운은 웃음을 지으며 먼저 뛰어 내렸다. 소리 없이 내려서는 문도들을 향해 웃음을 지은 유세운은 대청의 문을 소리 내어 열었다.

벌컥.

들어선 유세운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대청에 앉아 서류더미에 몰두하고 있는 사내 한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일을 하던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유세운은 당황했다.

얼굴의 반을 덮는 흉터. 파리한 안색의 사내의 외모를 단숨에 흉악범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유세운을 당황하게 한 것은 사내의 두 눈.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혜지가 번뜩이는 눈.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유세운의 생각은 사내의 입이 벌어지면서 멈춰졌다.

“누구신데 주인의 허락 없이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지 물어도 되겠소?”

사내의 목소리에 담긴 힘에 유세운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보기보다 상당한 경지의 고수. 동무벽이나 관백에 비해 손색이 없어보였다.

동무벽과 관백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넌 뭐하는 놈이냐?”

유세운의 말에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집에 소리 없이 대청까지 들어와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 자에게 들을 말은 아닌 듯한데… 그러는 댁은 누구시오?”

유세운은 싸늘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내가 먼저 물었다. 넌 누구냐?”

유세운의 기세가 삼엄하게 뻗어 나왔다.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사내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었다.

“당신이 유세운인가 보군.”

사내의 말에 유세운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건방지구나.”

삼엄한 기세에 살기가 묻어나오기 시작하자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소.”

유세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말로해서는 듣지 않을 자로군. 마지막으로 묻지. 넌 누구냐?”

사내도 유세운의 말투에 느껴지는 경고를 알았음인지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성은 잊어버렸소. 현이라고 불러주면 되오.”

스스로를 현이라 밝힌 사내를 향해 유세운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좋아. 이름은 들었으니 됐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현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그려졌다.

“당신은 눈이 없소? 지금 서류 정리하는 것이 안보이오?”

동무벽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너 언제까지 문주에게 그따위 말투로 말할 거냐?”

현은 동무벽의 기세에 웃음을 지었다.

“이거 실례했군. 고의는 아니었소.”

현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유세운의 기분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너… 묘하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놈이군.”

유세운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봐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날리려했다. 일검혈 곽부설이 자신의 앞에 부복하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오셨습니까?”

유세운은 곽부설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응. 일단은 좀 비켜봐.”

갑작스레 대청에서 느껴지는 기파에 서둘러 달려온 곽부설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식객으로 있는 자입니다.”

곽부설의 말에 유세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저런 기분 나쁜 녀석을 식객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어?”

유세운의 말에 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훗. 식객이란 능력을 보는 경우가 첫째니까.”

“문주님. 언제 오셨습니까?”

다급히 뛰어 들어오며 인사하는 양관척을 본 유세운은 시선을 현에게 고정시킨 채 물었다.

“하나만 묻지. 양총관이 받아들인 자인가?”

“아. 그거라면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유세운은 화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빨리 얘기 하는게 좋을 거야.”

유세운의 말에 양관척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앉으시지요.”

유세운은 양관척의 말에 상석으로 걸음을 옮겨 주저앉았다. 유세운의 시선은 현에게 고정되었다.

묘한 느낌. 아까부터 누굴 닮았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투나 행동거지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양관척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허락 없이 식객을 받아들인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상관없다. 식객이란 필요하면 받을 수도 있겠지.”

양관척은 현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워낙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문주님을 만나야겠다고 하기에 받아 들였습니다.”

“나를?”

유세운의 물음에 양관척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의 시선은 현을 향했다.

“뭐 때문에 나를 만나자고 한거냐?”

현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주변을 물러주면 말하겠소.”

현의 말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 진심이냐?”

“그렇소.”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라.”

유세운의 말에 좌중은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세운의 말이 이어졌다.

“이들은 광오문의 전부다. 난 문도들에게까지 비밀스런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도 않다.”

유세운의 말에 현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유세운의 눈빛에 현은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별 거 아니었소. 과연 당신이 천하를 논할 그릇인가가 궁금했을 뿐.”

유세운은 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천하를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헛다리를 짚었군.”

유세운의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무공이 전부라 생각하는가?”

현의 물음에 담긴 아픔에 유세운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공이 전부냐고? 그렇다면 강하기만 하면 되냐고 묻는 거냐?”

“그렇소.”

현의 물음에 유세운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내가 마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유세운은 현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모든 것을 무공이 전부라는 잣대를 가지고 본다면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다.”

현은 유세운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의외군.”

유세운은 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말해주지. 나도 무공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무공을 깨우쳐가는 즐거움도 알고. 하지만 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유세운의 말에 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유세운도 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처음의 불쾌함은 많이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의 아픔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함을 당신은 왜 모르는 것이오?”

누구에겐지 모를 질문을 던지며 웃음을 터트리는 현을 바라보는 유세운은 씁쓸히 웃었다.

“이봐.”

유세운의 부름에 현은 눈에 물기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현을 바라보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현이라고 했나?”

“그렇소.”

유세운은 말을 이었다.

“광오문에 들어 올 수 있는 자는 아니군. 때가 되면 떠나라.”

유세운의 말에 현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슨 말이오?”

현의 물음에 유세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그것이 다인 것 같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도 그게 전부고. 그러니 떠나라.”

유세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현의 혜지가 번뜩이는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장 하고자 하고 가장 듣고자 싶었던 말. 내가 아닌 그에게 묻고 들어라.”

유세운의 말에 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세운은 아무 말 없이 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결국 현의 흉터자국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다행이오.”

“뭐가?”

유세운의 물음에 현의 미소가 진해졌다.

“당신을 만나러 오길 잘 한 것 같소.”

유세운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유세운은 현을 향해 협박조로 말했다.

“식객으로 머물러 있는 이상 밥값은 하고 가라.”

“하하하하. 물론이오.”

현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 비록 일신의 무예가 출중하지 못하지만 누구 못지않은 머리는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소.”

현은 시선을 돌려 양관척을 바라보고는 뒷말을 이었다.

“양대인의 계획. 적어도 두 배 이상 빨리 이룰 것이오.”

현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잊지 않도록 하지.”

유세운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양총관은 나 좀 봅시다.”

“예. 문주님.”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의 서류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양관척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인 서재를 좀 이용해도 되겠습니까? 아직 일이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그러게나.”

현은 서류를 들고 나가다 문 앞에 서서 유세운을 돌아보았다. 마주친 시선. 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동무벽은 양관척을 향해 고개를 다가가며 작게 으르렁 거렸다.

“넌 대체 뭘 믿고 저런 자를 곁에 둔거냐?”

양관척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건 정말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뭔 소린가 그게?”

관백의 물음에 양관척은 고개를 내저었다.

“현이라는 사내. 무공을 떠나서 천하를 꿰뚫어보는 사내야.”

“천하를?”

양관척은 탁자에 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천하를 얼마나 알겠냐마는 저 사내. 상계의 흐름도 꿰뚫고 있어.”

양관척은 유세운을 바라보고 간청 했다.

“저희 문에서 받아들이면 안 되겠습니까?”

유세운은 양관척을 보며 미소 지었다.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예. 품에 거두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적이 된다면 평생을 후회하게 할 뛰어난 인재입니다.”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내가 아냐.”

유세운의 시선은 그가 나간 대청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 곁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창천궁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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