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관백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해?”
관백의 물음에 유세운이 되묻자 도병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창궁검 백노대협의 팔순잔치랍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유세운의 물음에 동무벽이 머리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창궁검 백노대협을 모릅니까? 창천궁 태상궁주로 삼십년 전에 천하를 논하던 분 중 한분 아닙니까.”
유세운은 동무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유세운의 말에 동무벽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우러러보던 우상이었지만 유세운에게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유세운은 점소이가 가져온 죽엽청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어쨌든 가야 하니 서둘러 가는 일 밖에 더 있겠어.”
관백도 자신의 잔에 죽엽청을 따르며 말했다.
“문주님. 저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북천방의 이야깁니다.”
유세운은 관백의 말에 생각난 듯 도병우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북천방의 이야기는 뭔 소리야?”
도병우는 유세운의 물음에 곰방대의 재를 털며 대답했다.
“북천방주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중원을 치겠다고 북천의 무인들을 모은다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중원을 친다고?”
“예.”
유세운은 죽엽청으로 목을 축였다.
“캬. 좋다. 아니 그런데 북천방이 어떤 곳이기에 중원을 넘봐?”
유세운의 물음에 도병우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북천의 하늘이라는 곳이지요. 북천의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방파입니다.”
“그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유세운을 보고 도병우는 이야기의 심각성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이었다.
“초원에 흑무기마대. 북천의 북천방. 이 두 세력이 세외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들입니다. 여태껏 말은 없어도 서로의 영역을 넘보진 않았습니다만 현 북천방주가 야심을 크게 가진 듯 합니다.”
“북천방주는 어떤 잔데?”
도병우는 유세운의 물음에 곰방대를 다시 등에 매며 대답했다.
“이미 예전에 심검의 경지에 든 자라는 소문 밖에는 못들었습니다.”
“심검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는 유세운의 반응에 도병우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소문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심검이라…”
유세운은 잔을 들고도 마실 생각을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심검의 고수와 겨뤄 본 결과 상당히 피곤하고 귀찮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진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꽤나 고생할 듯한 예감이 들었다.
유세운은 들고 있던 잔을 비우며 물었다.
“음. 그보다 창천궁의 태상궁주라면 궁주의 아버지 되나?”
유세운의 물음에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육대세력은 세습되고 있소.”
“그래? 그렇다면 빈손으로 가기도 그렇군.”
유세운의 말에 관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굳이 저희가 뭔가 들고 갈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만.”
관백의 말에 유세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빈손은 안돼.”
단호한 유세운의 말을 들으며 동무벽과 관백은 시선을 마주쳤다.
(역시 뭔가 있어.)
(가보면 알겠지.)
잠깐 사이에 오가는 전음. 관백은 유세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악양에 잠시 들르도록 하지요.”
“악양에?”
동무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 녀석을 만나면 뭔가 해결책을 내놓을 겁니다.”
동무벽의 말에 유세운은 웃음을 지었다.
“양총관을 잊고 있었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도병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설마 양관척을 말하는 거냐?”
도병우의 물음에 동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다른 양가를 말하겠냐?”
“하지만 양관척은 완전 망하지 않았어?”
도병우의 말에 관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기반을 닦고 있을걸.”
“하지만 천마방이 버티고 있는데?”
도병우의 물음에 유세운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일은 다 해결됐어. 아직 못 들었나 보군.”
유세운의 말에 도병우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운은 잔을 들어 다시 한모금 죽엽청을 들이키며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꼭 녀석을 만나 봐야겠군.”
창천궁의 창주궁.
칠층의 대청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창천궁의 문상인 초평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철마성주의 선언이었습니다. 자신들 휘하의 강남 군소방파의 해방과 삼 년간의 봉문.”
초평의 말에 백선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백선후의 옆에 앉아 있던 하후패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이란 말 밖에 나오질 않는군요.”
하후패의 말에 초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하후패는 초평의 말에 수긍했다.
“적이 아닌게 천만다행이지.”
“그렇군요.”
초평은 중원의 지도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유문주 덕분에 저희가 뒤를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초평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북천방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초평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백선후는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왜 그쪽으로 향했는지는 알겠는가?”
“아직까지 자세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섬서성으로 향했는지 초원을 가로질러 오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후패는 심각한 표정으로 초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그들이 흑무기마대와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
하후패의 물음에 초평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저희도 아직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흑무기마대의 활동지역은 교묘하게 피해서 이동하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백선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제발 그러기를 바라야지. 흑무기마대까지 온다면 감당하기 힘들 거야.”
“선발대와 본대의 거리가 꽤 멉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초평의 말에 백선후는 다시 시선을 지도로 옮겼다. 꽤나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선발대의 행로다. 보고를 들을 때마다 거리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선발대의 대장이 누군지는 들었는가?”
“아직 알아내지 못 했습니다.”
“그런가?”
백선후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하후패는 초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대로라면 청의문에서 가장 먼저 그들을 상대하겠군.”
하후패의 물음에 초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저희가 모인 강호동도들을 데리고 지원군을 보낼 시간적 여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아버님의 팔순에 맞춰 모이게 한 것이 실수였군.”
하루 한시가 아깝거늘 그들의 선발대가 이렇게 서두를 줄 몰랐던 탓이 컸다. 이미 배첩은 돌았고 무인들이 창천궁을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들을 서두르게 할 방법은 없었다.
하후패는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유문주의 행방은 알아봤소?”
초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경로로 움직이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선후는 지도가 놓인 탁자를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유문주가 있어야만 하네.”
백선후의 말에 초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패는 생각난 듯 백선후에게 물었다.
“아. 태상궁주님은 어떠십니까?”
백선후는 하후패의 물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도 대단한 성취를 이루신 것 같더군. 말은 안하시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네.”
백선후의 말에 하후패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유문주가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태상궁주님이 계시니 다행이군요.”
하후패의 말에 백선후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힘드실 거야. 같은 경지라면 젊은 그를 당해내지 못할 걸세.”
백선후의 말에 초평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천방주는 천고의 기재라 불린 자. 사십이 되기 전에 심검에 든 자입니다. 아직 오십도 되지 않은 그를 당해내시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후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뿐인가?”
“예. 그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찻잔을 드는 섬섬옥수가 멈춰졌다.
“뭐라고요?”
여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늘 전언이 들어왔습니다.”
여운을 바라보는 백연혜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철마성주의 선언으로 그날 부로 강남무림의 군소방파들을 해방하고 삼 년간의 봉문에 들어갔습니다.”
백연혜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앞에 놓인 찻잔의 주인. 힘든 일이나 어려울 것 같은 일에 항상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해치워 나가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호 육대세력 중 한 곳을 홀홀 단신으로 찾아간다며 말하던 그가 그토록 걱정되었건만 들려온 소식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천하의 철마성을 봉문 시키다니. 비록 그 시간이 삼년이라지만 그들의 행사를 막은 일도 여태껏 육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 있었다.
그 당시에는 육대세력 전부의 행사였지만. 고금제일지라 불리는 여천의 묘가 발견되었을 때의 일.
백연혜는 자기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렸다.
“하하. 다행이네요.”
여운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그녀만큼 유세운을 걱정했다. 불확실한 믿음. 무사하게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소식을 들어보니 무사히 돌아오는 정도가 아니다.
여운은 말없이 찻잔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백연혜를 향해 읍을 해보이고는 소리 없이 자리를 물러났다.
백연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날처럼 붉은 석양. 타오르는 듯 붉은 석양에 유세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 백연혜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걱정시키다니. 어서 돌아와요.”
쨍그랑!
동으로 만들어진 거울이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묵편에 방안의 기물들이 부서져 나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인. 거칠게 뱉어내는 숨결 또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뾰족한 음성은 듣는 사람을 당혹케 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아직도 팔목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다. 온갖 영약을 써서 치료하고 있지만 깊이 새겨진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다. 볼 때마다 느껴지는 그 순간의 고통과 분노.
혈라묵편 황혜란의 커다란 눈에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혈영!”
“예.”
황혜란은 자신의 묵편을 든 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보고해.”
“철마성주의 선언입니다. 군소방파의 해방과 삼 년간의 봉문.”
“하하하.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보고 하는 거야!”
분노한 황혜란의 외침에도 혈영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강호에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육대세력의 한곳이 봉문한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혈영이다. 그 또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황혜란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혈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최고의 차도살인지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스스로 뛰어든 일이니 차도살인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황혜란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난…난 놈을 용서할 수 없어.”
황혜란의 시선이 점점 초점을 찾아갔다.
“용서 하지 않겠어.”
모이는 군웅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