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동무벽은 마주 선 철마오령을 보며 관백에게 물었다.
“저놈들 기세가 심상치 않은데?”
관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악보다는 조금 약해 보이는군.”
동무벽은 흩어지는 먼지사이로 철마오령 뒤에 우뚝 서 있는 독고청을 보고 자신의 보도를 움켜쥐었다.
“쳇.”
관백도 부채를 꺼내들고서는 기세를 끌어 올렸다.
“진건가?”
독고청은 철마오령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감히 노부의 일에 끼어들라 하더냐?”
독고청의 말 한마디에 철마오령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태산과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독고청을 바라보며 동부벽과 관백은 손에 땀을 쥐었다.
“뭐해?”
동무벽과 관백은 뒤에서 들리는 유세운의 목소리에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유세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동무벽과 관백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비켜봐.”
“예.”
동무벽과 관백은 유세운의 뒤로 가서 섰다. 유세운은 가볍게 웃어 주고는 독고청을 바라보았다.
“계속할까?”
독고청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 보았다.
청석으로 깔린 바닥에 새겨진 자신의 발자국. 열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났다. 시선을 들어 유세운을 바라보았지만 고작 세 발자국. 먼저 출수하고도 득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주변의 진기를 거두어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가볍지 않은 내상. 독고청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물러날 때가 된 건가?”
독고청은 유세운을 바라보았다. 유세운은 독고청의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시인한건가?”
흔들림 없는 모습. 자신처럼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직도 하건만 어디에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고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하를 넘보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나 보군.”
유세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독고황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얘기를 계속해볼까?”
유세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독고황은 안색을 굳혔다. 유세운은 독고황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물었다.
“내 뜻은 분명히 밝혔다. 어떻게 하겠는가?”
주저하는 독고황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저 아이 말대로 하거라.)
독고황은 자신의 귀로 들린 전음을 믿을 수 없어 독고청을 바라보았다. 독고청은 미소를 지은 채 전음을 다시 보냈다.
(지금 철마성은 너무 약해져 있어. 삼년이라면 긴 시간도 아니지만 지금 있는 자들을 정예화 하기에 짧은 시간도 아니지. 멀리 내다보거라.)
독고황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철마성의 역사에 오점이…)
(지금 우리의 능력이라면 창천궁이 전면전으로 나왔을 때 당해낼 방법이 없을게다.)
독고청의 전음에 독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철마성은 이미 유세운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어 창천궁과의 전면전이라도 벌어지면 사라질지도 모를 상황이다.
그래도 역시나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그래. 알았다.”
독고황은 유세운을 바라보며 내력을 담아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철마성은 삼년간의 봉문에 들어간다. 그리고 강남무림의 군소방파를 모두 풀어주도록 한다.”
유세운은 독고황의 말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유세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죽립인을 향했다. 또 하나의 변수.
결코 가볍지 않은 상대다. 느껴지는 기운만이라면 독고청만큼 강해보였다.
죽립인의 오른발이 앞으로 내디뎌지며 품에 안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를 막아서는 손.
“그만하게.”
자신을 막아서며 말하는 독고청을 바라보는 죽립인의 시선에 의혹이 어렸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보고 싶어 부른 아이일세. 돌려보냄이 마땅하네.”
죽립인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한 존재.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죽립인의 말을 들은 독고청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다.
“안될 말.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신의라는 건 지켜야만 만들어지는 것일세.”
죽립인은 말없이 독고청을 바라보다가 한걸음 더 내디뎠다. 독고청도 완전히 몸을 돌아섰고 철마오령이 그의 뒤에 섰다.
“노부의 말을 듣게.”
죽립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몸으로 저를 막으시겠다는 겁니까?”
죽립인의 말에 독고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자네 혼자 철마성을 상대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철마성이 강호의 육대세력 중 한 곳임은 변하지 않는다네.”
독고청의 말에 죽립인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한 독고청의 말에 모두의 시선은 자신을 향했다.
자신들이 이용하려 했던 만큼 그들의 힘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천하를 논할 수 있는 세력.
죽립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은 어차피 도주님의 뜻으로 결정된 일. 도주님의 폐관 수련이 끝나고 보고를 올려야 한다. 내가 독단적으로 행할 일은 아니군.’
죽립인은 검을 다시 품에 안고 한발 물러섰다. 독고청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유세운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의 승부. 평생에 기억될 만한 승부였다. 돌아가도 좋다.”
유세운은 독고청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기억에 남을 승부였소.”
유세운의 말을 들은 동무벽이 관백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문주는 정말 저런 말투가 안 어울리는군.)
(웃지 말게.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니지 않나.)
간단하게 오간 전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세운은 말을 이었다.
“약속은 지키리라 믿겠소.”
독고청은 유세운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운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말에게로 다가갔다.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독고청이 물었다.
“자네는 목표가 무엇인가?”
유세운은 독고청의 물음에 뭔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독고청은 유세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하제일이 목표인가?”
유세운은 독고청의 물음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천하제일? 고작 그런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소.”
“고작이라…”
유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사부의 뜻을 받아들인 몸. 고금제일인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겠군.”
유세운의 말에 독고청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고금제일인이라. 역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르군.”
유세운은 말머리를 틀며 손을 흔들었다.
“하!”
유세운은 말의 옆구리를 차 철마성의 거대한 성문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유세운의 뒤를 따르는 광오문의 문도들을 바라보며 독고청은 작게 중얼거렸다.
“고금제일인… 한번 되어 보거라. 그래야 죽어서도 노부의 이름도 기억되겠지.”
성문을 벗어나서도 말없이 한참을 달리는 유세운에게 관백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관백의 물음에 유세운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까부터 자연지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자연지기에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태연한 척 철마성에서 애를 썼지만 자신도 독고청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독고청이 계속하자고 했으면 되레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 같았다.
유세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빛 눈썹에 은빛의 머리. 은태정의 얼굴이 생각났다.
“제길. 뭐가 천하에 심검에 든 고수가 없다는 거야.”
죽립인의 기세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자 또한 최상의 상태에서도 승부를 겨뤄봐야 알만한 자.
진다는 생각은 없지만 쉽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다음에 만나면 두고 보자고요.”
유세운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가자! 창천궁으로!”
먼저 달려가는 유세운의 뒷모습을 향해 동무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창천궁에 뭐가 있다고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흐음. 사모가 되실 분이 있나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겠나.”
관백의 대답에 동무벽은 웃음 지었다.
“크흐흐. 아마 그렇겠지?”
“좋아. 우리도 가지. 어디 창천궁도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고.”
달려 나가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병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철마성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어이가 없군.”
“차핫!”
챙!
거칠면서도 한 치의 빈틈없이 뻗어나가던 검세는 한 자루 고검에 쉽게 막혔다. 하지만 이어지는 또 한 자루의 검 또한 쉬이 볼 수 없을 만큼 기세가 날카롭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고검에 튕겨나간 사내는 검을 움켜쥐고 숨을 가다듬었다.
“이번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사내의 말에 상대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 말은 처음에도 했던 말 아닌가?”
“쳇! 지금은 그 때랑 또 다를 겁니다.”
양손에 쌍검을 들고도 허리에 한 자루의 검이 더 차져 있는 사내.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건만 뿜어내는 기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기세를 빌어 뻗어내는 우검의 검강이 푸른빛을 발했다. 하지만 상대는 한 자루 고검을 휘둘러 검강을 베어내며 앞으로 마주 달려왔다.
이어지는 좌검의 끝에 모인 것은 검환. 생사를 가르는 겨룸인지 검환을 휘두르는 좌검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상대는 자신의 고검을 사내의 좌검에 가져다 대고 옆으로 밀어냈다. 아무리 검환이라도 상대를 베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것, 피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검환마저 피해버리고 코앞까지 달려온 상대를 보는 사내의 눈에 회심의 빛이 서렸다.
“하앗!”
손도 대지 않았건만 사내의 허리에 차진 검이 뽑혀져 나왔다. 눈을 아리게 하는 푸른 빛. 한눈에 봐도 대단한 보검임을 알게 했다.
코앞에서 뽑혀져 나온 검에 어린 검환에 상대는 다시 한번 고검을 휘둘렀다. 내뻗어진 고검은 세 번째 검마저 옆으로 흘려버리고는 사내의 옆구리를 검면으로 쳐냈다.
퍼억.
“컥!”
삼장이나 밖으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던 사내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대는 자신의 세 번째 검을 고검으로 받쳐 들고서는 가는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각진 턱과는 다르게 섬세하게 생긴 상대의 미소를 보고 사내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한번도 봐주질 않아요.”
사내의 투덜거림에 상대는 그의 세 번째 검을 던져주며 웃음 지었다.
“서중 자네는 한번이라도 봐주면 위아래 없이 덤빌 녀석이니까.”
서중이라 불린 사내는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꽂힌 세 번째 검을 집어 허리춤에 차고는 양손에 들린 쌍검도 꽂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천주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서중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당연하지. 너의 세 번째 검은 아직 완성된게 아니잖아.”
그들의 옆에 앉아 구경을 하던 초췌한 외모의 사내. 눈 밑이 검게 물들은 병자처럼 보이는 사내의 말에 서중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뭐야? 한번 받아 보겠다는 거야?”
서중의 말을 들은 초췌한 인상의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장검. 보통 검보다 한자는 더 길어 보였다. 사내는 자신의 검병을 두들기며 말했다.
“언제라도.”
서중의 인상이 구겨지는 찰나 천주라 불린 사내가 웃음을 지으며 말렸다.
“단량. 서중. 그만하게.”
단량이라 불린 사내는 서중을 보고 작게 웃음 짓고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중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천주를 바라보았다.
천주는 서중의 세 번째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사부가 이르고자 했던 것은 심검. 그중에 이기어검의 경지야. 아직 자네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세 번째 검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밖에.”
“휴. 제 나이에 무슨 심검입니까. 한 오십은 넘어야 가능하려나?”
서중의 말에 천주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 이미 자네 나이에 심검에 든 고수가 있거늘. 그 무슨 말인가?”
“그 소문 말입니까? 그거 순 거짓말일걸요?”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서중의 말에 천주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직접 겨뤄 봤는데 심검의 경지가 맞아.”
“엑? 정말입니까?”
천주의 말에 서중과 단량의 두 눈이 빛났다. 천주는 그 둘의 시선을 받더니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렇다면 그를 만나러가자.”
모이는 군웅들...